금기에 대한 호기심이 불러 일으킨 욕망

기독교의 암흑시대라 불리우는 중세시대에 유행했던 기독사조 중 금욕주의라는 것이 있다. 욕심을 금해야 한다. 그래서 여자를 멀리하는 교부가 등장하고 오리겐은 자신의 성기를 절단했다고도 한다. 돈을 멀리해야 한다. 그래서 사유재산을 소유하지 않았다. 때로는 흥겹게 노는 것 조차도 하나님께 죄악으로 생각하며 '절제된 아름다움'을 미덕으로 삼았다.

아담의 생각도 그러했을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것과 금하신 하나의 것, 갈등하던 그는 결국 타락을 전인류에게 나누어 주었다. 금했던 것에 대한 궁금증!! 알고 싶은 호기심, 금기에 대한 모험심. 결국 중세시대 사람들도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지탄을 염려하여 은닉했지만 수도원의 수많은 아기 시체들과 유골들은 이미 한계선을 넘어 죄악이 차고 넘침을 보여준다.


시간은 금이다

중세를 지나 근세로 오면 산업이 발달한다. 산업혁명으로 전기가 발명되고, 이제 노동의 시간은 주야로 제한을 받지 않는다. 농경시대는 해가 떨어지면 일을 할 수가 없지만 공장은 전등만 있으면 원하는 때에 자본을 창출할 수 있다. 그래서 시간은 금이다. 빨리 일해서 제품을 생산하면 곧 돈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폐해는 무엇보다 빈부의 격차이다. 빈익빈 부익부... 한정된 노동자의 임금에 비해 기업의 이윤은 기하급수적이기에 당연 업주의 사유재산은 늘어만 간다. 농경 시대에 비해 자본의 회전과 규모가 빠르고 크기에 빈부의 격차는 천국과 지옥처럼 완전대립구도로 치닫는다.

이제 교회 안에도 부자가 많아진다. 그들은 교회에 자신들이 가진 돈의 일부를 헌금하고, 구제에 사용한다. 성경에 부자와 과부의 두렙돈 비유가 나온다. 현실로 투영하여 부자의 한달 수입을 3,000만원으로 가정하자(내가 아는 소기업 사장은 한 달 1,500만원을 수입으로 한다. 내가 생각하는 부자의 기준은 이보다 더하다는 가정과 더불어 기존자산의 부풀림까지 어림잡아 보았다). 이들의 십일조는 300만원이 될 것이다. 말이 300만원이지 군인으로 따지면 원스타(여단장, 교육학교장)와 맞먹고, 중하위층 시민의 가계수입과 막상막하일 것이다. 반면 과부의 두렙돈은 하루 생활비임을 가정하면 (국가가 배정한 것은 만원도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3만원으로 어림잡자.

300만원 : 3만원 = 10% : 100%...
액수로는 100배가 차이난다. 그러나 퍼센트로 비교해 보자. 부자는 10%, 과부는 100%이다. 과부가 10배 앞서게 된다는 사실에 일보후퇴 하더라도 과부는 생명을 다해 바친 것이다. 이젠 먹을 것을 살 돈이 없다. 반면 부자는 2,700만원을 어떻게 했을까? 자신의 생활비를 포함해서 전부를 가난한 사람을 위해 환원했을까? 아님 땅 사고, 저축하고, 수영하고, 골프치고, 남은 돈 중에 일부로 이 가난한 과부를 도왔을까?

교회가 부자에 집중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맥락을 같이 한다. 가중치를 무시한 표면적인 돈의 액수가 곧 그 사람의 헌신도가 되고, 믿음이 되는 것이다. 돈에 대한 사대주의, 배금주의가 만연하게 된 것이다.

잠깐 흥분을 했기에 다시 본론으로 들어간다. 과연 부자는 남은 2,700만원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부자는 없다

지금 우리가 과부처럼 모든 수입을 하나님께 드리자는 생각을 예수님이 전하려 하신 건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이라는 게 핵심이요 엑기스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재물을 허락하신 것은 단지 축척을 위해서 주신 것은 아니다. 물론 거사를 진행하기 위한 거대자본을 위해서 저축을 허락하시지만 모두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쓰라고 주신 것이다.

즉 과부의 마음을 가지고 전부다 드리는 마음을 근간하여 사회와 국가에 환원해야 된다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교회에 대한 것을 잠깐 짚고 넘어가자. 십일조... 많은 논쟁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십일조는 하나의 관례라 생각한다. 즉 절대적 기준은 아니다. 왜냐 자칫 10%만 주장하면 율법주의에 빠질 위험이 내포되어 있기에... 더 드려야 할 사람은 더 드려야 한다. 10%에 묶으면 바리새인이 된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상황이 절대절명의 위기일 때는 10%이하로 드려도 된다. 만약 10%에 맞추면 형식적이 되는 것이다. 설명을 하다보니 오해의 여지가 남게 되었지만 십일조의 정신과 아울러 될 수 있으면 십일조를 권장하고 싶다. 그러나 율법적인 형식으로 남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고, 단지 훈련과정의 하나로, 복받는 수단의 일환이라면 재고의 여지가 있다.

재언급하면 우리생활에 슬림의 기준으로 돈을 남겨두고 나머지 것은 약자와 빈자와 교육과 나라를 위해 환원하는게 참신자의 삶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이 아무리 많이 부어 주셔도 흘려 보낸다면 내 수중에 돈이 남을 여지가 있을까


고인 물이 썩는다 - 제로섬 게임을 향해

작금의 문제는 부자들이 돈을 손아귀에 쥐려 하는데 있다. 물론 미래의 일을 위해서 축척해야 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부자들은 들어온 돈을 모두 흘려 보내야 한다. 곧 제로섬 게임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런 부자가 기특해서 더욱 많은 돈을 주어도 주위를 둘러 보라. 가난한 사람과 사회간접자본확충과 제3국의 의료지원 등 소비할 곳은 무궁무진하다. 찾아만 봐라. 밑빠진 독처럼 모두 돈을 기다리고 있다.

뉴조에서 어떤 분이 가난에 대한 심정을 토로한 것을 읽었다.

"주어진 가난은 극복해야 하지만 내가 선택한 가난은 삶의 미덕이며 아름다움의 결정체이다."

난 가난해지자는 말이 아니다. 우린 부자이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영원히 마르지 않는 돈줄(?)을 잡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대로 흘려 보낸다. 나보다 그것을 바라는 이들에게... 그리고 단지 돈만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함께 보낸다.

혹자는 막시즘의 유령을 불러온 것이 아니냐 할 것이다. 언젠가 '칭찬합시다'에서 한 공무원을 소개한 적이 있다. 그분은 불우한 어린 시절 때문에 남을 돕는데 최선을 다한다. 자신의 월급을 대부분 지역의 불우이웃을 위해 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자신의 퇴직금까지 미리 가불하여 구제했다는 것이다. 아침마다 수도시설이 제한된 달동네 주민에게 물을 공급한다(새벽에 떠서 가져다 줍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집에서는 검소하다. 아니 스쿠르지 영감보다 더하다. 반찬은 오직 하나. 양파이다. 이 양파로 양파무침, 양파조림, 양파김치, 생양파 등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로서 8개정도의 반찬을 해 먹는 걸로 기억난다. 자식들의 옷은 재활용과 버려진 옷을 수선해서 입힌다. 지켜보던 반려자도 지쳐서 그분과 같이 일한다고 한다.

그는 막시즘을 실현하려는게 아니다. 그분이 교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마음속의 뜨거운 사랑을 그렇게 실천한 것이다.


<>진정한 영혼 사랑

우리는 영혼을 사랑한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귀중한 존재이며, 선택된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산 세상보다 귀한 존재임을 뜻한다. 따라서 불신자가 사랑을 하는 것보다 더욱더 열정과 최선을 다하여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부자의 돈 문제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하다면 현실적으로 가난하고 미련한 자이지만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부요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소유한 백성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돈 많은 부자가 존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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