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를 기쁘게 하신다. 노여워하실 때도 있지만, 노여움은 잠깐이요, 은총은 평생이다. 하여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베옷을 벗기고 기쁨의 띠를 띠게 하신다. 그뿐인가. 바다의 설렘, 물결의 술렁임, 설치는 사람들을 진정시키면서 아침이 되는 것과 저녁이 되는 것이 즐겁게 하신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환란 중에도 기뻐하며, 어떠한 형편에도 자족한다. 무화과나무 무성치 못하고, 포도밭에 열매 없고, 외양간에 소 없어도, 그저 하나님만으로 기뻐한다. 바울이 괜히 항상 기뻐하라 하였겠는가? 옥에 갇혀서도 괜히 기뻐하고 기뻐하라, 하였겠는가? 이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기쁘신가?


기쁨의 종류

시편 4편의 시인은 두 가지 종류의 기쁨에 대해 말한다. '주께서 마음에 두신 기쁨'이 그 하나요, '곡식과 새포도주가 풍성할 때의 기쁨'이 그 둘이다. 이 두 기쁨 모두 우리의 삶에 활력을 주는 것들이지만, 시인은 '마음에 두신 기쁨'이 '곡식과 포도주의 기쁨'보다 낫다고 노래한다.
  
'곡식과 포도주가 풍성할 때의 기쁨'은 어떤 기쁨인가? 사람이 땀흘려 일해 열매 거둘 때의 기쁨이다. 성취의 기쁨이요, 업적의 기쁨이다.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다. 일년 내 지은 농사가 풍성한 수확으로 나타날 때, 농부의 기쁨은 얼마나 크겠는가?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우리의 수소는 무겁게 실었'(시 147:13-14)을 경우의 기쁨은 얼마나 크겠는가? 이러한 기쁨을 기대하면서 농부는 모든 어려움을 참는다. 이러한 기쁨을 기대하면서 현대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저녁 늦게 눕는' 수고를 감수한다. 한탕해서 팔자 고치려는 무모한 시대에 우리는 이러한 기쁨을 맛보도록 힘써야겠다. 요령 피우지 말고, 꾀부리지 말고, 소처럼 묵묵히 자기의 할 일을 해 나가야겠다. 언젠가는 주어질 성취의 기쁨을 기대하면서 오늘의 수고를 참아야겠다.
  
작고한 최명희라는 작가가 있다. <혼불>이라는 10권짜리 소설을 써 낸 여류 작가다. 이 작가는 나이 서른 셋에 이 소설의 첫 문장을 쓰기 시작하여 나이 쉬흔이 되었을 때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었다고 한다. 꼬박 17년이 걸렸다는 얘기다. 그동안 결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이 작품에만 매달렸다고 한다. 하나의 작품을 쓰기 위해 17년간 집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17년동안 써낸 10권의 책. 이 책들은 그녀가 17년간 동안의 산고 끝에 출산한 그녀의 아이들일 것이다. 이 아이들의 탄생을 위해 하고 많은 밤의 외로움과 서러움을 견뎌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독특한 점이 하나 있다. 어느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작가의 말'이 없는 거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가 물었다. 17년 세월 동안 하고 싶은 말도 많았을텐데 왜 아무 말 안 하느냐고. 그랬더니 대답했더란다. 할 말 다 했는데,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고. 혼신의 힘을 다해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사족도, 설명도 필요 없다는 얘기다. 이러한 깨끗한 치열함에 생각이 미치면 발행된 지 몇 개월만에 수십만부가 팔렸으니 돈깨나 벌었겠지, 하는 생각은 너무 속스럽기만 하다.
  
어쨌거나 끈기와 집념을 배울 수 분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하나의 의미에 대한 열심이 자신의 모든 것을 삼켜도, 그것을 허용할 수 있었던 용기가 부럽다.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한 길을 걸으려 애쓰는 사람들을 부추길 수 있는 자극과 격려가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이러한 인고의 과정을 겪고난 뒤의 기쁨 얼마나 클 것인가?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의 기쁨!'의 최고의 형태가 아닌가 한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선악과가 도처에 널려 있어 찰나적인 기쁨을 핥고 있는 탐닉의 시대에 우리도 이런 기쁨을 맛볼 수 있었으면.


주께서 마음에 두신 기쁨

▲ⓒ뉴스앤조이 김승범
그런데 시인은 말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한 기쁨이 있다고! 그것이 바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이라고! 도대체 이 기쁨은 어떤 기쁨이길래 인간의 힘으로 이룩할 수 있는 최고의 기쁨보다 더하다고 하는 것일까? 시인의 간구에서 실마리를 얻는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시 4:6) 그러면 기쁘겠다는 것이다. 이 기쁨이 바로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하므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주의 얼굴이 우리에게 비친 때의 기쁨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다른 시에서 '나는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하고 노래하기도 한다.
  
그러면 '주의 얼굴이 우리에게 비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내 영혼 속에 잠들어 있는 하나님의 얼굴이 깨어나는 것이요, 나의 '신적인 기원'을 자각하는 것이요, 나의 존귀한 본성이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온갖 고정관념으로 세뇌되고 짓눌려 있던 내 본래의 자아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 융이라는 심리학자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은 외부 세계와 접촉하면서 외적인격을 형성한다. 이것을 '에고(자아)'라 하고, 이 에고가 갖고 있는 태도를 '페르조나'라 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가면으로 나의 참모습은 아니다. 나의 참모습은 무의식의 세계에 감추어져 있다. 무의식은 나의 내면의 세계이며 내적 인격을 형성한다. 그런데 이 무의식 또한 여러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림자의 요소, 아니마 아니무스, 그리고 무의식의 심연에 자리잡은 '자기(셀프)'가 그것이다. 바로 이 '자기'가 인간의 참 모습이다. 이것은 개성이기도 하고, 자기 원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인간 안에 있는 본래의 얼굴이며, 신적인 차원인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이 비칠 때 일어나는 일이 바로 이 '자기'가 깨어나는 것이다.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요, 가장 인간다워지는 것이다. 시인에 따르면, 바로 이때의 기쁨이 그렇게 크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이 내적 인간을 만나는 과정이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란 이 참 자기, 즉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과정이요, 기도를 한다는 것이란 바로 이 본래의 자기 자신에 끊임없이 집중하는 것이다.


나 가진 것은 없으나

바로 이 얼굴을 찾을 때, 곧 자신의 참 모습을 찾을 때의 기쁨은 이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시인의 생각인 것이다. 건강을 잃어도, 재산을 잃어도, 팔다리를 잃어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얼굴을 찾았을 때의 기쁨에서 나오는 것이다. 뇌성 마비 시인인 송명희의 노래 중에서 시인은 <나>를 이렇게 노래한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곳 나 없지만 /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중증 장애인인 그에게 있어서 남이 갖지 못한 것, 무엇일까? 남이 보지 못한 것, 무엇일까?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남이 받지 못한 사랑, 그래서 하나님을 공평하다 찬양하게 하는 것,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참 자기요, 본래적 자아요, 영혼의 핵이요, 하나님의 얼굴인 것이다. 이 얼굴을 찾았을 때의 기쁨 이루 말할 수 없어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물론 이 기쁨은 우리의 외적 행위로, 업적으로, 노력으로 얻는 기쁨이 아니다. 나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은총으로(!) 주어지는 기쁨이다. 즉 ‘주께서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출 때(!)’의 기쁨인 것이다. 예수를 왜 믿는가? 그 믿음을 통하여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얼굴이 조금씩 드러나고, 회복되고, 빛나기 때문이다. 이 때 우리들의 내면의 세계에서는 고요한, 그러나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이런 기쁨을 말하지 않고 구원을 말할 수 있을까?


우리의 실상

이런 기쁨이 우리에게 얼마나 있는가? 기쁨은커녕 날이면 날마다 지치고 피곤하여, 짜증내고 원망하고, 그러다가 헐뜯고 싸우고, 마침내 어제의 친구가 내일의 원수가 되고,  하지 않는가? 왜 이 지경인가? 하나님의 얼굴을 찾지 않아서다. 하나님이여,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하고 기도하지 않아서다. 자기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려고 애쓰지 않아서다. 왕의 자손으로 태어났는데 허구헌 날 시정잡배들과 어울린 까닭에 존재의 고상함을 잃어버려서다. 그저 껍데기만 가꾸느라 눈이 멀어서다.
  
요즘 사람들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겉 얼굴 가꾸느라 애쓰는 것이 눈물겹다. 잘 보이려고, 잘 팔리려고, 그래서 화장을 한다. 그렇게 해서 예뻐지고 여우같아진 얼굴에 사람들의 눈이 돌아간다. 눈 돌아가면서 혼이 덩달아 돌아간다. 세상이 그대로 있을 턱이 있다. 세상도 함께 돌아간다. 소용돌이친다. 우리 세대가 미친 까닭은 다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얼굴 찾으려 하지 않고, 그저 껍데기만 가꾸려 노력하는 바로 거기에. 그러나 그런 노력이 모두 쓸 데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는 것이 아니다.
  
화장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지난 80년대에 의식깨나 있다 하면서, 운동합네 하면서 화장도 안 하고 선머슴처럼 다녔던 사람들 보는 것 만큼 시각의 권리를 빼앗았던 것도 없었다. 화장은 인간의 - 특히 여성의 - 특권이요, 고도의 영성적/신학적 행위일 수 있다. 화장의 어원은 코스모스다. 코스모스는 질서요 조화를 뜻한다. 화장품을 뜻하는 코스메틱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했다. 어원적으로 볼 때, 화장이란 얼굴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화장을 통해 질서와 조화의 체험을 한다. 거죽 화장에만 머무는 것이 문제지만, 외적질서의 체험을 내적 질서의 체험으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영성적 잠재성이 화장이라는 행위에는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때 화장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 마치 시편 19편 시인이 외적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통해 내적 우주 곧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의 실상을 깨닫고, 내적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간구하듯 말이다.
  
겉 얼굴을 좀 더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얼굴에 대한 집념은 이제 화장을 넘어선다. 성형수술이 그것이다. 화장이 판은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여러가지 색칠을 해서 질서와 조화를 만들려는 시도라면, 성형수술은 아예 판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이다. 이름하여 새판짜기다. 혁명적이어서 좋기는 한데 부모와 영 딴 판인 이상한 물건이 나오면 어떡하나.
  
얼굴에 대한 집념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얼굴에 무지한 것이 문제요, 속 사람의 얼굴에 무관심한 것이 문제다. 이것은 그야말로 우리 자신을 모독하는 것이요, 우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직접화법으로 전달한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시 4:2)'


내면으로 들어가라!

어떻게 하면 허사와 궤휼(거짓)과 욕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나, 경건을 회복해야 한다. 경건하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분위기이다. 둘, 자리에 누워서도 '심중에 말하고 잠잠해야 한다.' 즉 늘 깊은 '침묵의 명상'을 해야 한다. 셋, 의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 형식적이지 않은 진실한 마음이 깃들어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 셋의 공통점은 모두 '내면에의 집중'이다. 그렇다. 내면으로 들어가라! 그 속에 하나님의 얼굴이 있다. 그 얼굴이 당한 형편을 잘 살피라. 그리하여 그 얼굴 살리는 일에 힘 좀 써라. 새롭게 그것을 찾으라, 깨우라, 빚으라! 이때의 기쁨, 얼마나 큰 줄 아는가.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한 기쁨이 우리의 전 존재에 스며들 것이다. 이 기쁨을 날마다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시인과 함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도하기를 바란다.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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