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회사후소(繪事後素)라 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바탕이 마련된 뒤에 한다는 말에서처럼, 모든 일이 그렇듯이 기본이 바로 서지 않고 진척되는 일들은 대개 끝이 안좋기 마련입니다. 본질이 흐리고 바탕이 어둡다면 제아무리 뛰어난 개인기라 해도 단발로 끝나 버리거나 혹은 자아 상실이라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벼베기가 끝나야 나락이 보이듯이 모든 것은 종말을 통해서 증명될 것이지 과정이 제아무리 화려한들 그럴수록 한낱 찰나의 유희에 지나지 않을 확률이 높아질 것임을 기억합니다. 삶에 무게를 싣는다는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중심이 있는 삶이란 바로 이것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삶일 것입니다.

시인이 노래했듯이 하늘을 우러르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마음', 그리고 노신(老身)의 바울이 옥살이를 통해 경험한 '아직 아니(noch nicht)의 원리'("형제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빌 3:12-14)와 다름 아닐 것입니다.


2.

사랑, 용서, 진리, 믿음, 희망과 같이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지순한 언어가 제 입에서 늘 맴돌곤 있지만, 그것도 저 자신을 향한 말이 아니라 남을 훈계하고 계도하는 데 주로 사용했기에 단어들의 용례와 범주는 치밀하고도 익숙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 님들(사랑, 용서, 진리, 믿음, 희망)조차도 저 자신을 위한 유희적 가치로 전락시켰을 뿐 진정한 의미의 확장과 체화의 과정에선 언제나 실패하는 모습뿐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고백하는 순간에도 현실에 대한 재빠른 판단과 계산을 품고는 고백을 가장한 새로운 제스추어를 취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고백'과 '고백주의'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말들을 하는가 봅니다. 머리숙여 진솔한 척 고백하려 하지만, 밑그림 어딘가에선 손가락을 놀리며 산술적 의미에 고무되어 있는 모습, 아니 더 나가서는 이미 그 산술적 의미 또한 황급히 가려버린 채 스스로 새로운 자아를 축하하고 도취되어 솟구치는 또 다른 자아!
  
지순한 언어들은 이런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직 남에게 보낼 생각은 말라고 말합니다. 네 속 깊이 들어가 보자고 말합니다. 머리에 잠시 잠깐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입과 글을 통해 남발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짐짓 근엄하게 말입니다.


3.

목회를 시작하고 또 회보를 만들면서 저 스스로 끊임없이 되물었던 것, 그리고 아내가 제게 부단히 요구했던 것이 바로 초발심을 잃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순례의 길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고 물을 때에 "처음 사랑을 잃지 말라" 하는 것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회사후소의 삶이란 그 어느 때든지 조급하지 않으며 느긋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조금 더 늘리는 삶일 것입니다. 그것은 지독하게 달콤했던 모던제국의 꿈에서 깨어난 포스트 모던 시대의 구극적(究極的) 가치가 바로 '자기 반성에의 의지'(Will-To-Self-Reflection)라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목회자로 살아나가는 저 자신의 삶은 자기 반성의 길을 통해서만 완성을 향해 다가갈 수 있기에, 자책하지 않지만 자성할 줄 알고 자만하지 않지만 만족할 줄 아는 침묵과 말 사이 물러남과 나아감 사이, 그리고 고백과 공동체의 나눔 사이의 균형을 잘 유지하며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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