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의 구조는 마치 십자가라는 산꼭대기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한 걸음 한 걸은 올라가시는 그런 모습을 취하고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시비(?)를 걸으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예정된 죽음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마태복음 28장에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서는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오늘 한번 생각해보고자 하는 달란트 비유가 속해 있는 마태복음 25장은, 이러한 마태복음의 구조에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바로 앞에 놓인다. 이것은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거의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과도 같다는 것이다. 유언이라고나 할까?

이 마태복음 25장에는 유명한 세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첫째가 열처녀 비유이고, 둘째가 달란트 비유이고, 셋째가 양과 염소비유이다. 이것은 흔히들 종말에 관한 비유라고 말들은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설교시간에 전파되고, 성도들 사이에 적용되는 것은 그런 종말의 의미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중에서 제일 심한 것이 바로 소위 '달란트 비유'이다. 이 비유를 생각하면 달란트라는 소위 '은사'의 의미가 너무 강조되다 보니 본문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용되는 허다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교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여기 재미있는 일례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총신의 신대원에 있는 모 교수는 '문예적 해석법에 대한 일곱 가지 오해' 라는 글에서,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무런 도전도 하지 않은 채 옛것에만 매달리면서, 돈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땅에 한 달란트를 파묻은 "악하고 게으른 종"처럼 되어서는 아니 된다. 돈을 잃을 우려는 있지만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라도 두 달란트나 다섯 달란트를 남겨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같은 합동교단의 대구에 있는 모 목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의 취지는, 종말 현상의 선취성(先取性)을 말하는 것으로, 주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의 행위로서 주의 행위를 이해하려고만 하는 모든 자들의 대한 종말적 심판을 공포하는 비유이다. 따라서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하자!" 라고 외치는 자들에게는 비유는 철저히 감추어진 해석 불가능 상태에 놓이게 된다.

아니 도대체 마태복음 25장을 왜 종말에 관한 비유라고 하는가?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하자' 라는 말은 분명히 맞는 말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과연 종말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종말이니 그렇게 하자는 것인가? 종말이 아니면 적당히 놀아도 되는 것인가?

이 달란트 비유는 그런 은사라든지 인간의 열심을 말하는 비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달란트를 은사라고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달란트는 종들이 그 재능대로 주인에게 받은 주인의 돈이다. 어떻게 보면 주인이 없는 마당에 자기가 능력이 있다고 까불면서 돈을 날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돈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받은 달란트는 금 달란트인데, 금 한 달란트가 1억을 넘는다고 한다. 결코 적은 돈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주위에 40대에 명예퇴직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 보통 퇴직금이 1억 정도가 된다고 한다. 과연 그들이 그 돈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아마도 가족에게 물어보면 대부분이 이자가 적어도 은행에 넣어두자고 할 것이다. 주식투자나 식당 등의 개인사업을 하려면 말린다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이 세상을 떠나가신다. 즉, 주인이 떠나가고 없다는 것이다. 물론 언젠가 분명히 다시 돌아오시지만 말이다. 떠나가시면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의 핵심은 무엇인고 하니 '앞으로 내가 이 땅에 없더라도 있는 것처럼 여기고 올 때까지 잘 기다리고 있어라' 라는 것이다.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종말의 때를 계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계산을 해서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평소에는 놀고 있다가 주님이 오실 때가 되면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자는 것인가? 과연 주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우리 집에 초등학생 아이가 두 명이 있는데, 큰놈은 공부를 잘 하지는 못해도 아버지가 있으나 없으나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 그런데 둘째 놈은 공부는 좀 하는 편에 속하지만 아버지가 없으면 놀다가 갔다오는 소리가 들리면 책상에 앉는다는 것이다. 누가 더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겠는가? 처음에는 아버지가 마련해서 그것도 모르고 책상에 앉아있는 둘째를 칭찬했지만,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는 놀고 있어도 큰놈을 더 칭찬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로서 예수님이 오시든지 아니 오시든지 항상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맞지 않는가? 그러나 이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해 보인다는 것이다. 없으면 적당히 하다가 있을 때에 열심히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처세술이고 지혜로운 자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앞선 '열처녀의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기름을 그렇게 필요이상으로 많이 준비한 다섯 처녀가 과연 이 세상에서 지혜롭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문제는 신랑이 더디 왔기 때문에 지혜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의 입장이 서로 바뀌고 말았다는 것이다.

달란트 비유에서, 아니 '게으른 자의 비유' 라고 해야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왜 한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둔 자가 게으른 자가 되었는가? 그것은 주인이 그렇게 말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그는 결코 게으른 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돈을 땅에 묻어놓고 돈도 없이 주인이 올 때까지 살려고 열심히 일을 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거지처럼 동냥이나 하면서 그렇게 게으르게 살았겠는가?

그렇다면, 이 한 달란트를 받은 자가 어리석다고 책망을 받고 쫓겨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주인의 마음을 몰랐다는 것이다. 주인의 마음이 무엇인가? 그것은 주인이 없어도 있는 것처럼 하고 살라는 것이다. 아니 분명히 주인이 없지 않는가? 그러나 주인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없어도 있는 것처럼...' 이것이 바로 이 마태복음 25장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종말이라는 것이다. 뒤에 나오는 '양과 염소비유'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주님이 없다고 해서 말로만 떠벌리지 말고 주님을 믿고 따르는 형제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형제 한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그 형제의 배후에 주님이 계시기에, 그런 행동 하나 하나가 바로 주님에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주님과 동행하는 그런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제 글을 맺고자 한다. 소위 이 달란트 비유의 결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함께 하심'이다. 결코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주를 위하여 일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가 알아서 열심히 일해서 주님의 일을 제대로 한 사람이 이 세상에는 단 한사람도 없음을 명심하자.                                                             옥봉교회  구득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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