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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란트 비유, 과연 그러한가?
종말의 의미와 관련하여
  • 구득영 (word009@kornet.net)
  • 승인 2000.10.06 18:18
마태복음의 구조는 마치 십자가라는 산꼭대기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한 걸음 한 걸은 올라가시는 그런 모습을 취하고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시비(?)를 걸으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예정된 죽음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마태복음 28장에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서는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오늘 한번 생각해보고자 하는 달란트 비유가 속해 있는 마태복음 25장은, 이러한 마태복음의 구조에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바로 앞에 놓인다. 이것은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거의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과도 같다는 것이다. 유언이라고나 할까?

이 마태복음 25장에는 유명한 세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첫째가 열처녀 비유이고, 둘째가 달란트 비유이고, 셋째가 양과 염소비유이다. 이것은 흔히들 종말에 관한 비유라고 말들은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설교시간에 전파되고, 성도들 사이에 적용되는 것은 그런 종말의 의미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중에서 제일 심한 것이 바로 소위 '달란트 비유'이다. 이 비유를 생각하면 달란트라는 소위 '은사'의 의미가 너무 강조되다 보니 본문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용되는 허다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교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여기 재미있는 일례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총신의 신대원에 있는 모 교수는 '문예적 해석법에 대한 일곱 가지 오해' 라는 글에서,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무런 도전도 하지 않은 채 옛것에만 매달리면서, 돈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땅에 한 달란트를 파묻은 "악하고 게으른 종"처럼 되어서는 아니 된다. 돈을 잃을 우려는 있지만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라도 두 달란트나 다섯 달란트를 남겨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같은 합동교단의 대구에 있는 모 목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의 취지는, 종말 현상의 선취성(先取性)을 말하는 것으로, 주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의 행위로서 주의 행위를 이해하려고만 하는 모든 자들의 대한 종말적 심판을 공포하는 비유이다. 따라서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하자!" 라고 외치는 자들에게는 비유는 철저히 감추어진 해석 불가능 상태에 놓이게 된다.

아니 도대체 마태복음 25장을 왜 종말에 관한 비유라고 하는가?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하자' 라는 말은 분명히 맞는 말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과연 종말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종말이니 그렇게 하자는 것인가? 종말이 아니면 적당히 놀아도 되는 것인가?

이 달란트 비유는 그런 은사라든지 인간의 열심을 말하는 비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달란트를 은사라고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달란트는 종들이 그 재능대로 주인에게 받은 주인의 돈이다. 어떻게 보면 주인이 없는 마당에 자기가 능력이 있다고 까불면서 돈을 날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돈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받은 달란트는 금 달란트인데, 금 한 달란트가 1억을 넘는다고 한다. 결코 적은 돈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주위에 40대에 명예퇴직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 보통 퇴직금이 1억 정도가 된다고 한다. 과연 그들이 그 돈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아마도 가족에게 물어보면 대부분이 이자가 적어도 은행에 넣어두자고 할 것이다. 주식투자나 식당 등의 개인사업을 하려면 말린다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이 세상을 떠나가신다. 즉, 주인이 떠나가고 없다는 것이다. 물론 언젠가 분명히 다시 돌아오시지만 말이다. 떠나가시면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의 핵심은 무엇인고 하니 '앞으로 내가 이 땅에 없더라도 있는 것처럼 여기고 올 때까지 잘 기다리고 있어라' 라는 것이다.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종말의 때를 계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계산을 해서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평소에는 놀고 있다가 주님이 오실 때가 되면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자는 것인가? 과연 주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우리 집에 초등학생 아이가 두 명이 있는데, 큰놈은 공부를 잘 하지는 못해도 아버지가 있으나 없으나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 그런데 둘째 놈은 공부는 좀 하는 편에 속하지만 아버지가 없으면 놀다가 갔다오는 소리가 들리면 책상에 앉는다는 것이다. 누가 더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겠는가? 처음에는 아버지가 마련해서 그것도 모르고 책상에 앉아있는 둘째를 칭찬했지만,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는 놀고 있어도 큰놈을 더 칭찬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로서 예수님이 오시든지 아니 오시든지 항상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맞지 않는가? 그러나 이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해 보인다는 것이다. 없으면 적당히 하다가 있을 때에 열심히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처세술이고 지혜로운 자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앞선 '열처녀의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기름을 그렇게 필요이상으로 많이 준비한 다섯 처녀가 과연 이 세상에서 지혜롭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문제는 신랑이 더디 왔기 때문에 지혜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의 입장이 서로 바뀌고 말았다는 것이다.

달란트 비유에서, 아니 '게으른 자의 비유' 라고 해야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왜 한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둔 자가 게으른 자가 되었는가? 그것은 주인이 그렇게 말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그는 결코 게으른 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돈을 땅에 묻어놓고 돈도 없이 주인이 올 때까지 살려고 열심히 일을 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거지처럼 동냥이나 하면서 그렇게 게으르게 살았겠는가?

그렇다면, 이 한 달란트를 받은 자가 어리석다고 책망을 받고 쫓겨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주인의 마음을 몰랐다는 것이다. 주인의 마음이 무엇인가? 그것은 주인이 없어도 있는 것처럼 하고 살라는 것이다. 아니 분명히 주인이 없지 않는가? 그러나 주인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없어도 있는 것처럼...' 이것이 바로 이 마태복음 25장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종말이라는 것이다. 뒤에 나오는 '양과 염소비유'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주님이 없다고 해서 말로만 떠벌리지 말고 주님을 믿고 따르는 형제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형제 한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그 형제의 배후에 주님이 계시기에, 그런 행동 하나 하나가 바로 주님에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주님과 동행하는 그런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제 글을 맺고자 한다. 소위 이 달란트 비유의 결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함께 하심'이다. 결코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주를 위하여 일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가 알아서 열심히 일해서 주님의 일을 제대로 한 사람이 이 세상에는 단 한사람도 없음을 명심하자.                                                             옥봉교회  구득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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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8
  • 구목사친구 2001-11-30 12:12:45

    이럴땐 가만히 있는거여
    누가 뭐라고 하든지 그저 자네 할 말 다했으면 꾹 눌러 앉아 있는 거여.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저 파르르 끓기는...   삭제

    • 길가는 나그네 2001-11-29 22:36:11

      '종말', '종말'하는디 워디 종말이 왔어?
      본문은 말이여, '종말'에 대하여 야그하는게 아니라, '천국'에 관하여 야그(비유)하자는 거여.
      이상한 '교리'와 '신학'에 세뇌되어 본문에도 없는 '종말'야그 하지덜 말어.
      글쓴이도 이상한 소릴하고 독자들도 요상한 소리들 하는구먼.
      '관점'을 달리허야 성경이 제데로 보일게 아녀?
        삭제

      • 읽어보시죠. 2001-11-29 00:46:48

        충현교회철럼 큰교회의 유명한 목사들의 말만 성경적이고,
        진리인것처럼 보이나 봅니다.

        또, 아니라면...어쩌나...크고 힘있는 유명한 목사인데...
        그는 분명 "하나님의 위대한 종"인데...아니래도, 그 허물을 덮어줘야지...
        그렇게 생각하시죠??? 디아스포라님!!

        구목사님처럼 이름도 없고 작은교회의 힘 없는 목사님이 글을 쓰니...
        우습고, 꼴깝이죠??? 디아스포라님!!   삭제

        • 마당쇠 2001-11-28 17:00:54

          디아스포라님은 달란트 비유를 므나 비유와 혼동하

          고 있군요.

          먼저 두 비유가 같은 비유인지 다른 비유인지 설명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비평을 할려면 똑바로 해야지 그렇게 무례

          하게 해서 됩니까?



            삭제

          • 구득영 2001-11-28 16:38:00

            여기에 대해서 나름대로 공부를 하신 것 같은데, 그러지 마시고 님이 알고 있는 그 로마황제와 분봉왕과의 정치적 관계에서의 해석을 한번 들어봅시다. 제가 감히 국제전화를 할 형편은 못되고, 여기서 같이 살피는 것도 좋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가 한 달란트 비유는 독특한 것이 아니고,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그런 내용이지만, 한국교회에서 달란트라는 용어자체 때문에 너무 이 비유가 왜곡되어 사용되어지기에 용기를 내어서 한번 적어본 것입니다.

            알고 있으면 같이 나눕시다. 한 수 배우겠습니다. 그리고 이 글이 종말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군요.   삭제

            • 디아스포라 2001-11-28 15:33:19

              달란트의 비유를 가지고 기사를 쓰시는 것인지 아니면 목회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실려는것인지 구분이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구득영님의 달란트의 비유에 대한 해석 역시 옳지않은 해석이고 보면 말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의 해석은 기자님의 의견대로 열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게으름의 문제 역시 아닙니다  기자님은 이 비유를 종말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은 하셨는데 정작 님의 해석은 종말과는 전혀 상관 없는 해석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왕으로 오실 것을 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왜 달란트를 사장시켰는고 하면 예수님이 정말로 왕으로 오실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오시는 것을 반대하는 뒷공작을 했기 때문입니다...이 비유를 이해하시기 위해서는 당시의 로마 황제와 분봉왕의 정치적인 관계를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좀더 이 비유에 대하여 토론을 원하시면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한마디 덧붙이면 알량한 지식을 함부로 내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뉴엔조이도 기사는 기사답게 쓰시기를 바랍니다........
              제 연락번호는 미국 510-481-5001입니다.....   삭제

              • 주님사랑 2001-11-28 12:43:15

                어...정말 오랫만입니다.^^
                한동안 게시판에 글이 안보여서 어찌되었나 걱정했는데...
                이제는 이렇게 정식 기자로써 글을 올리셨군요.
                한걸음 진일보한 모습을 보는것 같아서 기쁘네요.^^
                어쨌든 오랫만의 글!!, 반가웠습니다.


                목사님의 글 중 마지막 부분이 참으로 맘에 듭니다.

                -----------------------------------------------
                >결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함께 하심"이다.
                -----------------------------------------------
                                                               삭제

                • 세대주의 2001-11-28 03:43:34

                  성경과 세대주의의 관계


                  성경은 오류없이 글자 하나하나가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기에 하나님의 절대 권위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글자 하나하나에 영감을 받은 그 말씀들이 의미하는 바를 " 기록된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어야 하며, 이러한 해석을 "문자적 해석"(literal interpretation)이라고 한다.

                  문자적 해석은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신 성경의 권위를 올바로 제시하는 성경적 해석이며, 변개되지 않은, 즉 삭제되거나 첨가되지 않은 직역성경이 있을 때 가능하다. 또한 이러한 성경해석은'세대주의'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그동안 변개되지 않은 성경이 없었던 한국교계는 당연히 '세대주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결여될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종말론에 잘못 오용되기도 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신학체계 자체가 규정되기 때문에 성경해석의 방법론은 신학이론이 체계화되기 전에 결정되어야 한다. 이에 성경과 '세대주의'의 관계를 설명함으로써 올바른 성경해석과 적용의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성경의 영감과 언어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는가? 어떻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오류없이 영감받았고 섭리로 보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주이시고, 또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는가? 이는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들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연을 통해서(시8:1; 19:1; 104:24; 119:130; 145:9, 사40:26, 행14:17, 롬1:19-20), 꿈이나 환상이나 음성을 통해서(창 37:5-11, 겔 1:1, 단 7장), 천사를 통해서(창 19장, 단 12장, 계1:1), 양심을 통해서(롬 2:14-15), 또한 그 외의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서(히 1:1-2),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기록하고 있는 성경을 통해서(롬 15:4, 딤후 3:16-17)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하신다. 성경을 제외한 다른 방법들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리고 성경이 기록되기까지는 사용하셨으나 지금은 온전한 성경을 주셨기 때문에(고전 13:10, 딤후 3:16) 언어로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올바로 아는 것이 성경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은 인간의 언어에 대해 회의를 표시한다. 하나님은 무한하고 절대적이신데 반해 인간은 유한하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제한된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을 표현하기에는 부적당하다고 한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그 분의 메시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학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성경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에 관해 회의를 표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으며,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그것을 기록했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만드셨고 그 언어로 인간이 알아야 할 것을 인간에게 계시하셨으며,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여 기록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영감받은 말씀을 보존하셔서 우리가 지금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통용되는 언어가 있었다. 최초의 사람 아담은 하나님과 대화했는데, 그 도구는 언어였으며 이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아담은 모든 생물의 이름을 지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있다.(창 2:19). 아담과 이브는 서로 대화했으며(창 2:23),그들은 『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창 3:8) 주 하나님의 면전에서 피하여 동산 나무들 사이에 숨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지은 죄를 지은 것과 그에 대한 형벌을 말씀하실 때, 하나님과 아담과 이브 사이에는 구체적인 대화가 있었고 서로에게 어떤 오해도 없이 그 판결은 종결되었다.

                  에덴에 있었던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나 말씀하신 것(창 2:16-17)을 이해하지 못해서,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정확한 의미와 뉘앙스를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면서 불순종한 것이다(롬 5:19). 아담 이후에 하나님과 개별적으로 대화한 사람들(카인, 노아, 아브라함, 모세, 바울...)은 모두 그 분과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여기에는 전혀 오해가 발생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 가운데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범죄하지는 않았다. 성경 자체가 바로 그 증거이다.

                  어느 누구도 개인적인 경험으로 신학을 정립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시고 기록하신 성경을 통해서 근본적인 교리에서부터 구체적인 성경적 사실들을 알 수 있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이 문자 하나하나에 영감으로 오류없이 기록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것을 인간은 올바로 알 수 없으며, 성경을 해석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신정통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경이 개인에 따라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면 서로의 경험에 차이가 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것이 옳은가를 누가, 어떻게 한단할 수 있겠는가? 오직 "기록된" 성경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성경이 오류를 지니고 있고 인간적인 한계가 드러나는 것이라면(학자들이 주장하는 개념영감, 목적영감, 부분영감, 유기적 영감설에 따른 성경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믿음과 신학은 전혀 성립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한다는 것은 그 전제가 분명해야 한다. 바로 성경은 인간의 언어를 통해 글자 하나하나에 영감을 주셔서 인간에게 주신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글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 때 올바른 성경해석과 적용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세대주의'의 근본원칙이다. 그러므로 성경르 해석한다는 것은 성경의 절대권위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그 성경에 대한 절대권위는 성경이 글자 하나하나에 영감을 받아 오류없이 기록되었다는 믿음이 없이는 무의미한 것이다.

                    

                  2. 문자적 해석이란?

                  일반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며,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언어의 통상적이고 관습적인 용법들에 따라 필자가 원래 의미한 바를 설명하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성경의 문자적 해석은 단지 성경언어의 통상적이며 관습적인 용법들에 따라 성경의 원래 의미를 기록된 그대로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자적 해석은 글이나 말, 생각 등이 어떤 면으로 사용되었는지 모든 단어가 통상적인 용례에서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즉 성경에서 "유리"라고 했으면 그것을 거울이라는 다른 의미로 생각하지 않고 기록된 그대로 유리라고 이해하는 것이며, "피"라고 했으면 그것이 희생이나 사랑이라는 다른 의미로 바꾸지 않고 실제적인 피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자적 해석은 때때로 문법적-역사적 해석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각 단어의 의미가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사실과 연관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자적 해석은 문법과 문맥과 역사적 상황의 전후관계를 무시한 기계적인 문자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상징법이나  여러가지 수사 법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상징, 비유, 예표 등은 모두 문자적 해석에서 통상적이고 평이하게 해석되며, 그것들은 무자적인 해석과 상치되지 않는다. 결국 비유나 상징에 있어 어떤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러한 표현에 문자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문자적인 해석에서 비유과 상징은 그 의미가 분명하게 나타나며, 그것이 독자에게 전해 주는 의미는 통상적이고 평이한 문자 그대로의 의미이다.

                  이와 같이 문자적 해석은 '비유적' 언어, 즉 '상징들'이 성경에서 특히 예언서들에서 사용된다는 것을 부인하거나 '영적인' 교훈들이 그 안에 진술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성경은 "통상적으로", 즉 일반적으로 받아들어지는 언어의 법칙에 따라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글자 하나하나에 영감받았다고 믿지 않는 학자들과 그렇게 믿는다 할지라고 성경에 대해 자연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 학자들은 문자적 해석을 배제하고 풍유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을 한다. 풍유적 해석은 성경 본문의 문자적 의미와는 관계없이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며, 성경이 말하려는 바는 무시되고 해석자가 말하고 싶은 것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은 부차적이고 해석자의 의도가 일차적으로 되어 버린다. 펜테코스트(J.D.Pentecost)는 풍유적 해석에 대해 다름과 같이 올바로 평가했다 ; "풍유적 해석방법은 성경을 연구하려는 것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그리스 철학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합하려는 요구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제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막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정통적인 성경해석의 자녀'가 아니라 '비전통적인 이단적 성경해석의 자녀'이다.

                  이러한 풍유적 해석은 이교도들의 산물로서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lo, B.C.20-A.D.54)는 대표적인 풍유적 해석자이다. 그는 성경의 각 부분에서 "표현이 이중적일 때, 이미 알려진 사실이 반복될 때, 단어들이 약간의 변화가 있을 때..." 등의 경우에 다른 뜻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창세기 22:11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내세에서 살 것이다." 라는 의미라고 해석했으며, 창세기 2:21에서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든 것은 신화적인 설명이라고 해석했고, 출애굽기 33:1,3의 "약속받은 카나안 땅"은 "육신으로 나타난 그리스도"라고 했다. 결국 그에게는 문자적으로 "우유"였던이 풍유적으로 "고기"를 의미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대로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필로 이후에 판태누스(Panteanus, A.d.180),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즈(Clement of Alexandria, A.D 155-215), 오리겐(Origen, A.D.184-254),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등에게 이 방법이 전수되었는데, 이들 모두는 초기 성경변개의 절정을 이룬 사람들이었다.

                  오리겐은 "Mr. Allegorism"이라고 불릴 만큼 풍유적 해석을 했다. 그는 신약과 구약에는 모호하고 비이성적인 부분들은 물론 우화들과 실제로 발생하지 않은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한 예로 창조에 대한 창세기의 기록이 실재했던 것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신화라고 했으며, 창세기 18장에서 천사들이 아브라함을 찾아간 기록 역시 실제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출애굽기 1:18-22에서 (이집트에서 산파들에게 사내아이들을 강에 버리라는 문맥에서)"남자와 여자 아이들"을 "혼의 자연적이고 이성적인 기능들"로, "산파들"을 "구약과 신약 성경"으로, "남자의 씨는"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하늘에 가려고 노력하는 영적인 지식으로 각각 해석했다. 이는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하기 위해 아무런 성경적 근거도 없이 적당하게 의미를 부과한 것이다.

                  초기에 풍유적 해석을 했던 사람들은 오늘날 계약신학자들이 "구속", 즉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모든 촛점을 그리스도에 맞추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비스러운 사실들이 모여있는 것이 구약이라고 했다. 이러한 생각에 따라 318명의 할례받은 아브라함의 종들의 숫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했다 : 318을 헬라어 알파벳으로 표시하면 T I H 인데, 여기서 T는 십자가의 모양이고, I H 는 헬라어의 예수(ΙΗΣΥΣ)의 처음 두 글자라고 해석함으로써 318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어떤 하나에 자신이 부과하고자 하는 의미를 자의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풍유적 해석이다. 이러한 예는 해석하는 사람 만큼이나 많기 때문에 오늘날 행해지는 이러한 풍유적 해석의 예는 거명할 수조차 없이 많다.

                  이렇게 초기 성경변개자들에게서 유래한 풍유적 해석은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대 바실(Basil the Great),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암브로스(Ambrose), 어거스틴(Augustine)등에게 전수되어 이들 모두가 예외없이 풍유적 해석을 했다. 특히 오리겐과 어거스틴 이후로 교계에 풍유적 해석이 넓게 유포되었으며 어거스틴은 이러한 해석으로 천년왕국이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영적으로 이미 성취되었다는 무천년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시기에는 루터나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은 풍유적 해석을 배격하고 문자적 해석을 했으며, 그들은 한 본문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한 가지 의미밖에 없음을 올바로 주장했다. 이와 같이 성경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지닌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즉 성경 변개자들과 성경의 옹호자들에 따라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도 차이를 보이게 된다.



                  3. 문자적 해석을 해야 하는 이유

                  이미 성경의 기록과 연관해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즉 글자 그대로 해석해야 하는 당위성을 제시했지만 이 시점에서 문자적 해석을 해야 하는 보다 구체적인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문자적 해석은 언어 그 자체의 목적과 관습에 맞는 해석이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만드신 주된 목적은 인간과 교제하시고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언어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통할 목적으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을 인간에게 전하기에 충분한 언어를 만드셨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하며,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대화와 성경 기록 자체가 이를 증명한다. 언어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 즉 하나님께 언어를 만드신 그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 충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자적 해석을 떠나서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를 알 수 없다.

                  한 단어에는 분명히 여러 의미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 단어가 하나의 특정 상황 속에서 사용될 때는 통상적으로 하나의 의도된 의미만을 지닌다. 이것이 지각있는 사람들 사이에 상식적인 의사소통의 원칙이다. 화자나 필자가 말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자나 필자가 단어들을 주관적으로, 또는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통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견제해야 한다. 이것이 곧 성경해석에서 전제되는 문자적 해석의 근거이다. 이러한 근거가 올바른 것은 성경이 수수께끼가 아니라 계시의 책이기 때문에, 즉 열려진 책이기 때문에 타당한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글을 읽든지 읽는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언어의 관습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언어의 기능이기도 하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 이외의 상징이나 비유나 은유, 또는 다른 형태의 표현은 늘 이차적인 것이다. 누군가 "나는 학교에 간다."고 말하거나 글을 쓰면, 사람들은 그가 선생님과 학생들, 교실과 책상과 칠판이 있는 실제적인 장소에, 곧 학교에 간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여기서 "학교"란 "배움과 학문과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실제적인 학교에 간 것이 아니라 지식을 얻기 위한 순례를 떠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그는 화자나 필자가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자기가 의도한 바를 말하기 위해서 단지 "학교에 간다"는 말을 인용했을 뿐이다. 성경을 이와 같이 풍유적으로 해석하면 무지한 사람들은 "야! 깊이 있고 영적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와는 다르게 해석한 것이며, 해석자의 사사로운 견해를 영적 양식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문자적인 해석이 요구되는 것이다.

                  둘째, 문자적 해석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에 맞는 해석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은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록된 언어에 관한 동일한 약속"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기록된 단어가 통상적인 뜻을 지니고 그 문맥에서 분명한 뜻을 지닌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에 부합하는 문자적인 해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셋째, 문자적 해석은 그 해석의 타당성을 보증받을 수 있는 해석이다. 만일 평이하고 통상적인 문자적 해석을 하지 않는다면 해석한 것의 타당성은 상실되고 만다. 만일 기록된 글자 그대로의 성경 본문이 없고, 또한 그에 대한 문자적 해석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그러므로 통상적이고 평이한 문자화된 기준이 없으면, 인간의 상상력을 초래할 수 있는 우화적 해석의 다양성은 상대적 진리를 낳게 된다. 성경에서 통상적인 의미 이외의 다른 의미를 찾으려고 시도하는 해석은 성경의 기록된 의도와는 관계없이 해석자가 그 의미를 마음대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며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만큼이나 다양한 해석을 낳게 된다.

                  넷째, 문자적 해석은 성경예언의 성취를 올바로 증거하는 해석이다.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구약성경의 예언들 - 탄생, 성장, 사역, 죽음, 부활 등에 관한 예언들 - 이 모두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신약성경에는 이러한 예언들이 비문자적으로 성취된 예는 전혀 없다. 이것은 문자적 해석을 강력히 지지해 주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재림에 관해서는 문자적 해석을 하는 것은 물론 성경 전체에 걸쳐 문자적 해석을 해아 햐는 근거가 된다.

                    

                  4. 문자적 해석과 올바른 적용

                  사람들은 해석하는 것과 적용하는 것을 혼동한다. 이는 영감과 감동을 혼동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영감과 감동의 구분이 중요한 것처럼 해석하는 것과 적용하는 것에 대한 바른 이해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이제 문자적 해석과 올바른 적용을 위한 방법을 간단히 소개하려 한다.

                  첫째, 각 단어의 의미를 연구해야 한다. 둘째, 단어 상호 간의 문법과 관련성을 분석해야 한다. 셋째, 가까이 있는 문맥과 멀리 떨어져 있는 문맥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적게는 앞 뒤 몇 절의 문맥에서, 많게는 한 장 전체나 그 성경 전체와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은 직접적인 문맥의 연구뿐만 아니라 성경대 성경의 비교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문법적으로", "문맥에 따라",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함으로써 위의 세 가지에 근거한 "문자적 해걱"을 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러나 적용은 "교리적 적용", "역사적 적용", "영적 적용"을 나누어서 해야한다. 첫째, 교리적 적용은 성경의 모든 구절이 특정한 사람들(유대인, 이방인, 교회)에게, 특정한 이유로,특정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에 따라 적용하는 것이다. 둘째, 역사적 적용은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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