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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즐거울 수 있는가? 사실 이 의문을 갖고 극장을 찾았다. 달마야 놀자. 친구, 신라의달밤, 조폭마누라의 뒤를 잇는 조폭영화라는 점에서 일단 관심이 갔고, 조폭마누라처럼 작품성과 흥행성이 따로노는 영화가 아니라, 재미와 감동의 두마리토끼를 잡았다는 항간의 소문때문이기도 했다.
  
폭력의 미학이란 말이 있다. 사실 이 말이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이다. 폭력의 미학이라니, 폭력에도 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를테면 인간의 심성 내부에 폭력을 통하여 카타르시스를 느낄수 있다는 이야긴데, 인간의 죄성을 전제하고 난 후라면 이 말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폭력은 가인과 아벨의 사건 이후에 팽창되고 확장되어 왔으니, 타락한 인간의 죄성에는 폭력은 기본메뉴로 자리하고 있을지도
  
아무려나, <달마야, 놀자>는 조폭영화다. 이 영화를 조폭영화로 분류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한 논리이긴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나타나는 갈등의 축에 '건달'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도입부는 조직폭력의 장면에서 시작하여, 배신한 조폭과 의리파 조폭의 한판대결로 마무리된다. 혹시 이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플롯을 무시한 스토리를 읊어보면 이렇다.

업소의 주도권을 놓고 일대 격전을 벌이던 '재규'일당은 예상치 못한 기습으로, 더 이상 숨을 곳도 없어 이름없는 작은 암자로 피해 들어간다. 그러나 그곳은 수행중인 스님들이 자리한곳. 속세의 가장 밑바닥을 사는 이와 그 반대편에 서있는 두 집단의 만남이 결코 순탄할리 없다. 암자의 일상은 이들로 인해 꼬여간다.

주지스님의 허락으로 일주일을 머물수 있게 되었지만, 기다리던 보스의 연락은 오질 않는다. 일주일이 지나고, 더 남아있으려는 박신양과 그들을 밀어내려는 스님들과의 대결은 결국 내기를 통해 결정짓자는 스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게임은 무승부. 결국 중재에 나선 주지의 제안은 밑바진 독에 물붓기. 재규는 밑바진 독을 연못에 내어던짐으로 물을 채우는데 성공한다. 결국 절에 남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지만 단서가 붙는다. 머물되 수도하라는. 그러나 결코 수도생활이 건달들의 몸에 맞을리 없다. 참았던 감정이 폭발한 두 집단은 오고가는 맞짱과 몇 번의 덮치기 등으로 팽팽하게 대립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를 깊이있게 이해하게 되고 화해의 통로가 마련된다. 한편 잠시 하산하여 조직과의 통화를 시도하던 재규는 자신이 믿고 따르던 '창근'의 배신으로 조직이 와해되었음을 알게 된다. 결국 재규를 찾아온 창근일당은 재규일당을 산채로 매장하려는데, 이때 청명을 비롯한 스님들의 등장으로 위기에 몰린 재규일당은 창근일당을 제압하는데 성공한다.
  
영화는 지병에 시달리던 주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하강국면에 접어들고, 날치를 제외한 재규일행은 하산하여 다시 일상에 복귀하면서 이 영화는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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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규파의 리더 박신양과 스님파의 리더 정진영

이 영화는 유쾌한 영화다. 폭력영화지만 폭력장면은 최소화되어있다. 이 영화의 주제가 폭력을 보여주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코메디로 분류되는 이 조폭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물론 유쾌함일 것이다. 너무 뻔한 답을 했다고 돌을 던지지는 마시압. 그러나 이정도로 단정짓고 마는것은 덜된 밥을 씹는듯 떨떠름하다. 적어도 내게 {달마야 놀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첫째, 이 사찰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도 중요한 기독교적 진리가 숨어있다면 이것은 이단아적 발상인가? 큰스님(김인문)의 말중에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 두 대목중 하나. 재규일당이 사찰청소를 하던중 깨뜨린 부처의 귀로 인해 청명스님등이 분노하여 큰스님을 찾아가 항의하자, 큰스님왈, 부처귀가 떨어졌으면 다시 붙이면 되지 무슨 호들갑인겨.부처는 너희 마음에 있는 것이지, 지금껏 나무토막을 섬긴 것이냐,는 질책. 그리고 둘.재규가 큰스님께 왜 자신들을 그리 감싸주는가 묻자 큰스님의 질문, 네가 밑빠진 항아리를 연못에 던질때 무슨 맘으로 던진겨? 재규의 말, 그냥 던졌습니다. 큰스님의 말. 나도 밑빠진 너희들을 내 가슴에 그냥 던진겨.
  
필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뉴스엔조이 독자라면 대충 감을 잡았을것이다. 십자가위에서 고난당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아닌, 십자가가 경배의 대상이 되어가고, 하나님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더 사랑하는 요즘의 우리의 신앙을 첫번째 대사에 비겨 묵상해 볼 만하고, 우리가 세상속에서 세상과 부대껴야 하는 방식은 밑빠진 독, 운운하는 노스님의 말에 힌트를 얻는다.
  
둘째, 만약 이 영화의 배경이 사찰이 아니고, 수도원이나 기도원쯤 되었다면 동일한 성과를 거두었을까. 감독이 굳이 사찰을 선택한 이유는 무얼까. 아직도 한국교회는 한국적 기독교를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불교가 한민족에 전래되고 뿌리내린지는 아득한 옛일이다. 그에 앞서 고구려에는 유학이 들어와 있었다. 물론 역사이전시대부터 지금껏 우리민족에게는 무속(샤머니즘이라고 불러도 좋겠다)이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었고. 말하자면 무속 위에 유교, 그 위에 불교가 뿌리내린 한국민족에게 뒤늦게 기독교가 얹혀있는 형국인 셈.
  
필자가 늘 아쉬운 것은 이대목이다. 유교문화도, 무속문화도, 불교문화도 다 종교적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화의 일부로 인식되고 있으나 유독 기독교만큼은 외래문화라는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대중문화에서 기독교적 소재를 취하는 경우가 적다는 말이되고, 이는 기독교적 소재는 기독교문화 안에서만 통용되는 결과를 낳는다. 더 나아가 기독교적 소재를 다루면 기독교문화, 즉 종교문화의 부류로 치부되는 악순환을 겪는 것이다.여기에 여전히 한국적 신학이 부재하다는 것도 한국적 기독교가 세워지지 못한 이유가 될지 모르겠다.

<달마야 놀자>에서 불교적 풍경은 있어도 불교적 강론은 없다는 점은 눈여겨 보아둘 대목이다. 이 영화의 관심사가 불교에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불교적 문화를 친숙하고 유쾌한 느낌으로 관객들이 받아들이게 한다. 경쟁력있는 선교영화를 만들고자 할때 거칠고 선굵은 메시지보다 부드럽고 우회적이면서도 강한 흡수력을 지닌 문화적 코드를 채택해보면 어떨까.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원색복음과 함께 기독교문화를 배타적인 자세가 아닌, 친숙한 우리문화로 받아들이게 하는것도 우리시대에 간절히 필요하다.
  
셋째, 폭력은 과연 아름다운가. 서두를 열면서 "폭력의 미학"이란 말을 꺼냈다. 많은 사람들이 살인이나 폭력장면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이야기한다.(이 폭력의 미학을 극대화시킨 영상을 선보인 것이 한국영화 중에서는 <인정사정 볼것 없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 폭력의 미는 영상에서 자주 그려진다. 이는 전술한바, 사람 안에 거하는 가인의 죄성이 유전된채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달마야 놀자>에서 보여준 폭력은 달마야 놀자가 보여준 미학의 원천은 아니다. 적어도 <달마야 놀자>에서 폭력다운 폭력은 도입부와 마지막 절정부, 두 군데에서 나타날 뿐이다. 따라서 <달마야 놀자>를 폭력영화라고 부를 수 없다. 조폭을 소재로 다루었다고 할 지언정 말이다. 조폭영화의 '표준어'랄 수 있는 욕설이 이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도 배제했다는 점은 이 영화가 폭력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이 영화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세계, 종교인의 세계와 조폭의 세계가 조우하는 방식에 있다. 이질적은 두 집단의 만남은 가히 문화충돌이라 할만큼 시작부터 삐그덕거린다. 하지만 그 잡음은 사실 두 집단이 서로의 빈자리를 꿰어 맞추며 하나되는 진통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막되어 먹은' 인간들이 사실은 속세에서의 자신들의 모습이기에 이 두 집단은 한달간의 동거기간동안 화해하기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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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영화는 다음과 같은 아쉬움을 남는다. 최근에 한국영화가 조폭이라는 소재에 의지하고 있다는 불안감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는 점, 그래서 조폭의 무리들이 인간답고 정의로우며 멋지다는 왜곡된 속삭임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비록 조폭마누라가 보여준 별 고민없는 웃음이 아닌 좀 더 따뜻한 인간애를 그려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역시 조폭이라는 식상한 소재를 다시 끌어오고야 말았다는 점은 한없이 아쉬운 부분이다. 조폭일색의 최근의 개봉작들을 보면 홍콩영화처럼 결국 퇴행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냐는 평단의 우려가 그리 가벼이 들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사족하나. <달마야 놀자>는 그 위험성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으로 보이지만 최근 한국영화를 볼때 영화판에 투자되는 자본의 규모가 커지면서, 점점 헐리우드 영화를 닮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폭력의 밀도가 깊어지고, 그 물량도 거대해진다는 생각. 반복되는 조폭영화는 결국 폭력에 둔감한 관객을 만들어낼것이고 결국 더 자극적인 폭력, 더 선정적인 장면을 끌어오게 될 것이라는 우려는 괜한 노파심에 불과한 것일까.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영화들은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지만 예술영화를 표방했던 <고양이를 부탁해>같은 영화는 참패를 면하지 못했다는 점은 우리 한국영화의 그늘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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