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올해 39의 양희길 씨. 시골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 부터 지금까지 7년동안 잦은 병치레를 치르고 있다. 3남1년중 둘째인 양희길 씨. 형제가 있다는 것일뿐 물직적인 도움을 바랄만큼의 처지는 아니다. 역시 어려운 형편이기 때문이다. 그간 도움의 손길을 뻗었던 친구들에게도 이젠 손내밀기가 미안할 정도다.

그래도 작년까지는 그럭저럭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병마저 들고나니 일조차 나갈 수 없는 신세다. 올 초 계속된 장염으로 먹은 걸 다 토해낸 양 씨. 두달을 그렇게 보내다 검사를 받았다. 검사결과는 간경화 초기. 바득바득 살기도 어려운 처지에 무조건 쉬라하고 식이요법을 해야 한다니 억장이 무너진다. 이젠 더이상 기댈데가 없어 이곳저곳에 자신의 신세한탄을 시작했다. 그렇게 뉴스앤조이에도 연락이 왔다. 전화하고 팩스보내고 또 전화하고...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부여잡으려는 듯.

처음부터 이런 처지는 아니었다. 88년 군제대후 상경해 직장에 다녔다. 직장에서 맡았던 업무와 관련된 업종으로 사업을 시작한 것은 1996년이다. 퇴직금과 저축한 돈을 다 털고 은행대출을 받아 사업을 시작했고 직원도 셋 둔 사장이었다. 세상에 내세울 것 없어 돈이라도 어느 정도 벌면 낫겠다 싶어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1997년 IMF가 오면서 1년을 조금 넘긴 사업은 급속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자금이 넉넉해서 버틸 지경도 못됐다. 결국 부도로 빚만 떠앉은 채 주저앉고 말았다.

"직원들 월급은 다 줬어요. 어떻게 그걸 떼 먹습니까. 빚을 내서 다 줬습니다."

순진한 건지 고지식한 건지 모자란 건지, 빚을 내 직원 월급을 챙겼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물론 인정있는 일이지만 말이다.

갈수록 첩첩산중이다. 가진 것이라곤 은행빚 700만원과 사채 2300만원 어떻게 갚긴 해야 겠는데 그럴 형편이 못된다는 건 채권자들이 더 잘 안다. 원금만 갚으라며 종용하고 있는 상태가 벌써 3년째다.

생활보호대상자로 근근히 살아온 양 씨. 그래도 몸이 성한 동안은 근로봉사도 하고 2년 전부터는 막노동을 해 생활을 꾸려갔다. 고작해야 제 한 몸 건사하면 됐기에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올초 그만한 사정조차 호사가 되었다.

올 2월 잠에서 깬 안 씨. 돌연 두 다리가 마비된 채 풀리지 않아 병원을 찾았다. 이유도 원인도 모른단다. 겨우 4월부터 일을 나갔는데 6월부터는 장염으로 연일 토하고 설사해 입원을 했다. 의원에서는 결과가 안나온다며 종합병원으로 옮겨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 검사결과 안 씨에게는 간경화 초기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망연자실할 일이다.

"이젠 아파도 친구들에게 연락해 도와달라기도 부끄럽습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요"

잇달아 기독교단체에 도움을 청했다. 그렇게라고 해야 했다. 이젠 살 수 없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20만원짜리 월세도 한 달 밀렸고, 전화도 세 달째 요금이 밀려 곧 끊긴다는 통보다. 또 매달 받는 병원 검사는 20만원 정도가 드는데 고작 손에 쥔 돈은 매달 들어오는 생활보호대상 지원금 10만 6천원에 친구들이 십시일반 건네준 돈 얼마가 있을 뿐이다.

겉으로 보면 멀쩡하게만 보이는 양희길 씨. 그러나 몸은 병들었고, 마음은 메말라진 상태다.

"착잡합니다. 도와주시면 병 고치고 열심히 살렵니다. 저보다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겠습니다."

별 수 없는, 그러나 실낱같은 희망조차 포기할 수 없는 푸념으로는 어리숙하기까지 하다. 언론에서 알려주면 어떻게든 도움을 받을 수 있을거란 단순함이 더 안스럽다. 어떤 곳에서는 게시판에 올려주는 성의도 보였고 어떤 곳은 미안하다며 연락하지 말라 권유도 받았다.

1호선 외대앞 후미진 골목길을 헤매다 양희길 씨의 월세방에 들었다. 둘이 마주 앉으니 방은 꽉 차고, 시시콜콜 그간의 사정얘기를 듣고 난 기자는 그저 그렇게 사는 어려운 사람 중에 하나란 생각만 들었는데...

같이 사는 세상. 십시일반 모으는 손길이 이 사람에게 얼마만한 것인지는 가늠하지 못하겠다. 그에게 그것이 희망인지 아님 모면인지조차... 고작해야 단지 병치레 잘하고 일해서 생활할 수 있는 것이 최선이고 최고인 건지.

굳이 신앙을 물었다. 부모님을 따라 다니 교회. 상경해서도 6년동안 한 교회를 다녔다. 청년회에서 열심도 내 보았도 봉사활동도 남처럼 했다. 그러나 교회생활은 도리어 아픈 기억만 남는다고 한다. 자존심만 팍 상한 기억만 늘어놓았다. 끼리문화 일부 대학파벌 등등. 스스로 설자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분위기도 그랬다고 했다.

"다니던 교회에 몇년만에 찾아갔어요. 그런데 아는 사람이 없더라구요. 청년부 목사님도 다 바꿨더군요."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려는 생각을 그렇게 접었다. 아니 싫었는지도 모른다.

"다음 달이면 방세도 걱정이고, 전화도 곧 끊기고 병원치료비도 꿀 때가 없습니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도와주실 수 없나요?"

▲쪽문앞에서 배웅하는 양희길 씨
ⓒ뉴스앤조이 신철민
어려움 속에 있는 그래서 이렇게 밖엔 방법이 없는 처지. 길가에 난 작은 쪽문을 열고 그래도 찾아와 얘기를 들어준 기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잠시 반짝인다. 꼬치꼬치 깨묻고, 마치 훈계하듯 '왜 그렇게 밖에 못 살았냐'는 타박투로 들렸으면 자존심도 무척 상했을텐데, 퍽 야속도 했을텐데...아예 이젠 그런 것조차 둔하고 무뎌진게란 짐작이다.

이렇게만 생각하기로 하자. 어쩌면 같은 하늘아래 산다는 이유만으로 짊어질 책임이 있다면 바로 이런 거 아닐까 하는 생각말이다. 그렇게 배웅을 받고 흔들리는 전철 속에서 문득 머리속이 멍해진다. 우린 다 똑같은 사람인게 맞는지.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환경과 여건과 희망을 품고 사는 것은 불가능한 건지. 아니 그게 안 된다면 적어도 그 이하로 살지 않도록 할 순 없는 건지... 단지 숨쉬고 사는 것을 이어나갈 최소한의 부담에 허덕이는 양희길 씨. 그 최소한의 부담을 조금씩 나눠갖는 일이 가능한 건지...

(양희길 씨에게는 지금 따뜻한 위로와 기도, 그리고 물질적인 후원이 절실합니다)

주소 :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1동 299-3호 (전화 : 3295-4962)
후원구좌 : 국민은행 078-21-0880-503(예금주:양희길)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