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국립박물관 경내로 들어가서, 올리브 나무가 줄을 지어선 넓은 계단을 따라 조금 걸어 들어가다 보면, 오른 쪽으로 '성서의 전당'(聖書殿堂, the Shrine of the Book)이라는 독립된 건물이 있다. '책의 전당' '성서의 전당' '성경의 전당'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이것은 구약 성서 사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기원전 3세기 전후의 사본들인 사해사본(死海寫本)이 보관되어 있는 박물관의 이름이다.

독특한 건축 양식부터가 방문객들에게 호기심을 일으킨다. 직육면체의 검은 대리석 벽과 흰 돔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구조의 건물이다. 그렇게 지은 것은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 사이의 싸움'이라고 하는 쿰란(Qumran) 공동체의 중요한 신학 사상을 건축 양식을 통해 나타내 보인 것이다.

직육면체의 검은 대리석 벽은 '어둠의 자녀'를 상징하고, 단지 뚜껑 모양의 흰색 돔은 '빛의 자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누가 보아도 그 검은 대리석 벽은 육중하게 보인다. 이 검은 대리석 벽이 주는 중압감은 보는 이들에게 2천년 이상이나 이스라엘 민족을 짓눌렀던 박해를 상기시키기에 충분하다. 땅 위로 보이는 흰 색깔의 둥근 돔은 박물관의 지붕인데, 박해를 당하던 하나님의 백성을 지켜준 성서의 말씀을 상기시켜 준다.

사해사본 박물관 자체는 지하에 들어 있다. 검은 대리석 벽 옆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으며, 박물관 입구에서 사해사본이 보관되어 있는 사본실까지 이르는 지하 통로는 부등변사변형(不等邊四邊形 trapeziform) 아치들이 사다리꼴로 서로 엇갈리게 연속되어 있어서, 마치 본래 그 사본들이 보관되어 있던 쿰란 지역의 동굴을 실감케 한다. 실내 온도와 습도는 항상 일정하도록 조절되어 있어서 진열된 사본의 부패를 방지하고 있다.

사해사본실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커다란 단지 안에 들어 간 기분을 느끼게 돈다. 땅 위로 솟은 흰 돔의 모양은 바로 사본이 들어 있던 단지의 뚜껑을 모방한 것이고, 실내의 단순한 내부 구조는 바로 그 단지 속을 본뜬 것이다. 중앙에 높이 솟은 손잡이 모양의 꼭지가 달린 커다란 원기둥은 그 단지 속에 들어 있던 사해사본의 두루말이 모양을 확대시킨 것이다.

그 원기둥의 윗 부분에는 쿰란 제1동굴에서 발견된 이사야서 사본 두루말이를 다 펴서 전시하였다. 원기둥의 밑 부분에는 특수 안전 장치가 되어 있어서, 원자폭탄 같은 것이 폭발했을 때, 혹은 이 건물이 폭격과 같은 공습을 받게 될 때, 이 사본이 자동적으로 땅 밑으로 깊이 들어가도록 장치가 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복제품을 전시하고 원본은 모처에 보관해 두었다고 한다.

여기에 와서 보면, 성서는 인류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값진 보물이라는 말에 실감이 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성서는 인류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개개인에게 있어서도, 가장 값진 보물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귀하게 여긴다면, 생명을 주는 말씀인 성서야말로 우리에게 생명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성서의 이런 놀라운 가치를 과연 알고 있는가? 귀한 것은 우리가 귀하게 보관한다. 금고에 넣어 두던가 은행에 맡기던가 한다. 그러나 성서는 귀한데도 불구하고 그처럼 유폐된 곳에 보관할 물건이 아니다. 성서는 읽고 듣고 실천해야 할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서가 가치 있는 책이라면 그만큼 쓸모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서가 지닌 이런 가치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는가?

유대인에게서 우리는 몇 가지를 배운다. 사해 서북부 쿰란이라고 하는 곳에는 기원 전 3세기부터 기원 후 1세기까지 엣센(Essene)파라고 하는 유대교의 한 분파에 속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광야에서 수도원적인 고행과 집단생활을 한 사람들이다.

1) 우리가 그들에게서 배우는 것 중의 하나는, 그들이 그들의 경전인 성서가 전쟁이나 지진으로 파손될 것을 염려하여 자신들이 사용하고 있는 성서사본 외에 여러 벌을 복사하여 분산 보관하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 계통의 사본만이 아니라 여러 계통의 서로 다른 사본을, 현재까지 알려지기로는 모두 11개의 동굴에 분산 보관하여 전승시키려 하였다는 것이다.

전쟁과 지진은 모든 것을 파괴했다. 성서 사본도 파괴될 수 있었다. 아직 인쇄술도 발명되지 않았었고 출판기술도 발달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파피루스나 양피지 위에 손으로 일일이 써야만 했다.

<신약전서> 한 권을 양피지에 쓴다고 할 때, 우리말 번역 <성경전서 표준새번역>을 기준으로 할 때 신약전서는 모두 362쪽이다. 이만한 분량의 말씀을 양피지에 기록하려면 보통 크기의 양을 60여 마리를 잡아야 한다고 한다. <구약전서>는 1,226쪽으로서 신약의 네 배이다. 따라서 신구약전서 곧 <성경전서>를 다 양피지에 적으려면, 보통 크기의 양을 이 백 오십 마리 내지 삼백여 마리를 잡아야 했다. <성경전서>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지금 삼백여 마리로부터 벗겨낸 양피지 사본 위에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마 종이가 발명되지 않았더라면 기록되는 성서 때문에 숫한 양들이 희생될 뻔했던 것도 그러려니와 그 많은 분량의 말씀을 휴대하고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2) 우리가 유대인에게서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은, 성서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다. 세상 사람들은 일찍부터 유대인들을 '책의 백성'(the People of the Book)이라고 불렀다. 텔아비브 박물관에 전시된 유대인 화가 샤갈의 '고독'(孤獨)이라는 그림을 보면, 사람이 완전히 고독한 혼자 있는 순간에도 그 사람은 구약성서 두루마리를 가지고 있다.

유대인들을 책의 백성이라고 할 때 '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히 '성서'를 일컫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언어 표현에서 우리는 그들의 독특한 의식구조의 일단을 볼 수 있다. '땅', '집', '책' 등이 그 좋은 예들이다.

달리 어떤 설명이 없는 한 단순히 '땅'(하아레츠)이라고 하면 그것은 곧 이스라엘 땅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으뜸이 되는 땅은 곧 이스라엘 땅(에레츠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집'(바이트)이라고 하면 그것은 곧 예루살렘 성전(베트 하미크다쉬)을 일컫는 말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집들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집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책의 으뜸은 성서이다. 그래서 구태여 거룩한 책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읽는 것'(미크라)이나 '책'(핫쎄페르)이라고만 해도 그것이 성서를 가리키는 것인 줄 다 안다. 그러므로 그들을 책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성서를 읽는 백성이라는 말이다.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성서를 읽는다. 장바구니에도 성서가 들어 있다. 버스 정류장에서도 차에서도 비행기에서도 성서를 읽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정통파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예루살렘 구 시가지 가게 점원도 손님이 없을 때는 성서를 읽고 있다. 이것은 곧 신명기에 나타난 명령의 실천이다.

(6)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7)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쳐라. (<표준새번역> 신 6:7-8)

3) 정통파 유대교 학교인 '예쉬바'(yeshiva) 학생들 중에는 '자기 성서'라고 하여 구약의 낱개 책을 암기하기도 한다. 이것 역시 어떠한 상황에서도 성서의 말씀을 전승시키려 하는 그들의 노력이다.

유대인의 3,000년의 역사를 보면 벌써 멸종되었어도 몇 번은 멸종되었을 터인데 유대인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이것은 성서가 생명을 주는 말씀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고 읽고 있는 그 성서가 그들에게 생명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성서를 읽고 성서를 가르치고 성서를 전승시키는 개인이나 가문은 멸망하지 않는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여기에서 얻게 된다. 유대인의 3,000년의 역사가 이것을 실증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서와 함께 살았는데도 망했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대속적(代贖的)인 멸망일 것이다. 실제로 성서와 함께 살다가 망한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성서의 말씀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한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을 들을 수 있다. 우리 민족에게 성서를 전해 주려고 배를 타고 서해안까지 왔다가 순교를 당한 토마스 목사도 그 예에 속할 것이다. 성서 때문에 화를 입은 사람들 중에는 성서 번역자들도 있다.

존 위클리프(John Wyclif)라는 사람은 1382년에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그것을 손으로 써서 최초의 완역 영어 성경전서를 펴냈다. 영어로 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영어로 읽을 수 있게 하였으므로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를 가리켜 '종교개혁의 선구자'(the morning star of the Reformation)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당시 영국 교회는 그가 성서를 번역하여 일반 백성이 읽도록 하였다는 이유로 그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리하여 그가 죽은 지 30년 후에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의 시신을 끄집어내어 화형에 처하였다.

기독교 역사에서 한 때 오래 동안 교회 자체가 교인들로 하여금 성서를 못 읽게 했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성서를 열심히 읽고 배우고 싶어도 자신들의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서 못하는 것이지 교회가 못 하게 하니까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이라는 사람은 신약전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1525년에 영어번역 역사에서 최초로 그것을 인쇄된 책으로 펴낸 사람인데, 신약전서를 번역 출판하고 나서 11년 후인 1536년에 그는 성서를 번역 출판하였다는 이유로 산 채로 화형을 당하였다.  

오늘 우리의 손에 이 성경전서가 있기까지 성서를 번역 출판 보급하다가 자신의 생명을 희생당한 이들이 많다는 것을 성서 독자들은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러한 성서 번역자들을 성서 때문에 멸망당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그 멸망은 하나님께서 그를 멸망시켜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대속적인 멸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대속적인 성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십자가의 죽음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성서 때문에 망했던 그들은 성서와 함께 영원히 살고 있다.

성서, 그것은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칠 말씀이다.

(4)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 (5)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6)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7)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쳐라. (8) 또 너희는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9)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여라.(<표준새번역> 신 6:4-9)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17)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유능하게 하고, 온갖 선한 일을 할 준비를 갖추게 하는 것입니다.(<표준새번역> 딤후 3:16-17)

어릴 때부터 성서를 손에 쥐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카오스'(혼돈) 이론 중에 "초기 조건의 민감한 의존성"(sensitive dependence on initial conditions)이라는 이론이 있다. "입력의 미세한 차이가 출력에서 엄청난 큰 차이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극히 작은 것을 집어넣었는데 그것이 나올 때에는 엄청나게 큰 힘이 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기를 예보하거나 날씨에 관하여 말할 때는 이것을 반 농담조로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라고 하는데, 나비 한 마리가 서울에서 날개를 쳐서 공기를 흔들면 그것이 파장을 일으켜서 그 파장이 태평양을 건너 다음 날 LA에서 폭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릴 때 읽은 성서의 몇 마디 말씀이 그의 평생을 지배한다는 말이다. 어릴 때 읽은 성서 한 절이 커서 읽는 성서 백 독보다 그의 인생에서 더 큰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여러분의 손 안에 성경전서가 있다. 이것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도 더 값진 보물이다. 이 성서의 말씀을 시도 때도 없이 읽고 주야로 묵상하게 되면 '책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일찍이 사도 바울은 "여러분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그것을 여러분 안에 모시고 있습니다"(<표준새번역> 고전 6:19)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라고 했는데, 같은 논리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시고 살면 우리의 몸은 '말씀의 전당'이 되는 것이다. 성서와 우리의 만남도 "초기 조건의 민감한 의존성"이라는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나비 효과"를 볼 수 있다. 우리의 자녀에게 일찍부터 성서를 들려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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