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빈들입니다. 오색이 붉게 물들었던 가을산은 찬바람에 검은색으로 갈아입고 적막하기만 합니다. 가을의 풍요로움은 짧고 겨울의 배고픔은 깁니다. 어제 추수를 했는데도 오늘 우리의 곳간은 텅 비어 있습니다. 10년의 양식을 1년에 먹어 치우는 사람들의 곳간에는 언제나 차고 넘치는데 우리의 곳간은 빈약합니다.  

이 추수감사절기에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감사의 조건들을 나열하며 한해 동안 수 십 배, 수 백 배의 결실을 맺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만, 우리는 이 감사절기에 감사 드릴 것이 없습니다. 결실의 계절, 풍요의 계절에 우리의 들녘은 빈들이고, 우리의 곳간도 텅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차고 넘치는 풍요의 계절에 우리는 참 가난합니다. 멀쩡한 교회를 허물고 다시 짓는 교회들 속에서 우리 교회는 참 가난합니다. 하늘의 축복으로부터 멀어진 것은 아닐까? 우리는 언제까지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하는가?


빈들살림을 배움
  
1993년, 여름 어느 날, 나는 신장암 수술을 받고 요양 중인 최경철 목사님을 뵙기 위해 강원도 평창에 있는 산돌교회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나에게 자그만 앉은뱅이 책상을 손수 만들어 주셨습니다. 신새벽에 일어나 교회 앞뜰에 앉아 내게 줄 책상을 정성스레 손질을 하시던 목사님은 마지막 니스 칠을 한 후에, 책상 한 귀퉁이에 작은 글씨로 '빈들살림 눅 9:12'라고 흰 물감으로 손수 써 주셨습니다. '빈들살림!'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앉은뱅이 책상을 끌어안고 내내 생각했습니다. 가을걷이가 끝나 아무 것도 없는 빈들, 황량한 빈들, 싸늘한 바람만이 허허하게 부는 빈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빈들에서 살림을 일군다는 말은 무엇인가? 무엇으로 살린단 말인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곧 성경을 펴고 누가복음 9장 10절 이하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 벳새다라는 성읍으로 가시자 무리들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해 주시고 또 병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만 날이 저물었습니다. 날이 저물자 열두 제자들은 예수께 와서 다음과 같이 아뢰었습니다. '무리를 흩어 보내서 주위의 마을과 농가로 찾아가서 잠자리도 구하고 먹을 것도 구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제자들은 곧이어 말합니다. '주님,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들입니다.'"

제자들의 생각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황량한 빈들이니 저들을 먹이고 쉬게 하기 위해서는 무리를 흩어서 마을과 농가로 내려보내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주란 말인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황량한 들녘, 겨울들녘처럼 빈 쭉정이만 바람에 날리는 이 빈들에서 무엇으로 어떻게 저 많은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란 말인가?

그러나 17절로 내려가 읽어보면,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일입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빈들에서 모두들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구나. 주님의 살림은 '빈들살림'이었구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빈들에서 주님은 그들을 살리신 것입니다. 차고 넘치는 밥상에서 살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빈들에서의 살림,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것 없어도 서로 나누며 서로를 살리는 살림이었습니다. 이것은 배부른 부자가 할 수 없고, 배부른 교회가 할 수 없으며, 배부른 성직자가 할 수 없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생명살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게 남아 있는 무엇이 있어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나눌 수 있는 믿음이 있어서 나눈다는 것을, 주님의 빈들살림은 떡과 물고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눔이라는 기적이 있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었고 증언했던 예수님은 언제나 빈들로 오시었습니다. 넉넉하게 차려진 밥상에 오시지 않았고, 화려한 교회와 배부른 부자들에게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모두가 떠나가고 아무 것도 없는 버려진 빈들, 누구 하나 찾아 주지 않는 외롭고 쓸쓸한 빈들로 오시었습니다. 그 분은 빈들 예수가 되시어 빈들에서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참 가난한 우리 교회
  
이러 저러한 이유로 해서 3년 전에 저는 약 7개월 동안 교회를 우리 집으로 옮겨와 5명의 교우들과 목회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 건물도 없었으며, 교인도 적었습니다. 건물관리사로 일하는 수홍씨, 서울시정연구원에서 일하는 충현씨, 가정주부가 된 연실씨, 전투경찰로 군복무중인 재민씨, 아내와 나는 15평 남짓 되는 우리 집에서 매주일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내 목회생활에서 가장 빛나고 행복했던 시절은 바로 7개월 간의 이 가정교회시절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에게 교회 건물은 없었지만, 정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습니다. 크고 웅장하고 풍요롭고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는 참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주간 동안 열심히 일을 하고 식구공동체로 모여 서로 말씀을 나누고 다시 세상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받친 거의 모든 헌금을 시골교회와 우리의 사랑이 필요로 하는 곳에 나누어주고도 배고파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교회는 소유가 없는 가난한 빈들교회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교회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는 가난한 교회이어야 한다는 것을. 교회가 가장 가난할 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서 가장 빛 날 것입니다.
  
부유한 교회, 배부른 교회는 더 배부르고 거대할 꿈을 꾸기에 나눔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더 높은 종탑, 더 커다란 건물을 구하기 위해 설교와 찬송만 커질 뿐, 현대교회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와 그 나라는 볼 수가 없습니다. 많이 가지면 마음의 근심이 더 많은 법. 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 인해 근심이 생기고 마음이 불안해져 교회의 본질을 잃게 됩니다.

자기의 소유를 내어놓으니 가난한 사람 하나 없었던 초대교회(행전 2:43-47)처럼 교회는 가난을 선택함으로써만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빈들로 오는 구원
  
주님은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 프란치스꼬는 "가난은 우리 자신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들어올리는 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이웃과 나눠 가질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을 높이 들어올리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청빈부인(淸貧婦人)과 결혼하여 산 프란치스코 성인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가난과 겸손을 보다 온전하게 지키기 위해 형제들의 모든 집과 움막을 반드시 흙과 나무로 지어야 한다는 내용을 유언으로 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자기의 것을 자연에 돌려보내고 자기에게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은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가난하지 않고서는 구원과 진리와 생명에 대한 자각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맑은 가난, 즉 청빈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삶의 미덕입니다.
  
세리 삭개오는 죄인이었지만,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눔으로 가난을 스스로 선택했기에 주님은 그에게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궁핍하게 추하게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손을 구하고, 빌어먹는 가난은 추하지만, 내 것을 나누어줌으로 나 자신을 위해 소비하지 않음으로 오는 가난은 아름답습니다.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내일을 위해 곳간에 쌓아 드리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절제의 삶입니다.
  
빈들은 차고 넘칠 일이 없습니다. 빈들은 가난하지만, 그 속에는 언제나 생명을 살리는 풍요가 있습니다. 빈들에는 내일의 양식이 없지만, 오늘의 양식을 함께 나누니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는 빈들입니다. 그래서 빈들 한가운데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 가난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가난하다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곳은 빈들이요, 빈들은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주님은 빈들로 오시고, 하나님의 의는 빈들에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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