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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서 하나님을 변호할 셈이냐?"
설교자와 나누는 욥기 이야기(4)
  • 민영진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00.10.05 18:18
설교자의 두 모델

욥이 재앙을 만나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위로하려고 찾아왔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의 현장을 목격하고서 슬픔을 못 이겨 통곡했다. 그의 친구들은 밤낮 이레 동안 욥과 함께 땅 바닥에 앉아서 친구의 고난에 동참했고,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우정이 아닐 수 없다. 욥이 겪는 고통이 너무나도 처참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입을 열어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2:11-13).

이처럼, 욥의 친구들은 욥이 고통을 받고 있는 동안은 욥을 위로했다. 그러나 욥이, 자기가 당하는 고난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며, 하나님께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자기를 치시기 때문에 자기가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 친구들은 하나 같이 모두 욥을 비난한다.  

엘리바스는

"어서 부르짖어 보아라. 네게 응답하는 이가 있겠느냐? ... 미련한 사람은 자기의 분노 때문에 죽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질투 때문에 죽는 법이다"(5:1-2)
라고 말하면서 욥을 비난한다.

빌닷 역시 욥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보고, 욥을 향해서,

"언제까지 네가 그런 투로 말을 계속할 테냐? 네 입에서 나오는 말이 거센 바람과도 같아서 걷잡을 수 없구나. 너는, 하나님이 심판을 잘못하신다고 생각하느냐? 전능하신 분께서 공의를 거짓으로 판단하신다고 생각하느냐?"(8:2-3) 하고 말하면서 욥을 꾸짖는다.

세 번째로 등장한 나아마 사람 소발 역시 욥의 잘못을 규탄하는 것으로 그의 발언을 시작한다.

"네가 하는 헛소리를 듣고서 어느 누가 잠잠할 수 있겠느냐? 말이면 다 말인 줄 아느냐? 네가 혼자서 큰 소리로 떠든다고 해서, 우리가 대답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네가 우리를 비웃는데도 너를 책망할 사람이 없을 줄 아느냐?"(11:3)

여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욥의 친구들이 아무리 친구라 해도, 슬프게도, 우리는 그들의 우정이 그들의 신학적 편견을 초월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친구들은 욥이 자신들의 신학 노선 혹은 자신들의 신앙 노선과는 다른 신학과 다른 신앙을 가진 것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욥의 적으로 변하고 만다. 우리 독자들이 볼 때, 그 세 친구라는 사람들은 욥의 친구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친구인 것 같고, 욥을 변호하거나 위로하기보다는 욥을 비나하면서 하나님을 옹호하고 하나님을 위로하고 있다.

마치 자기들이 아니면 하나님이 모욕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아니, 자기들이야말로 사람에게 모욕당하는 하나님을 그 모욕에서 건지는 하나님의 보호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나서고 있다.  

우리의 설교는 어떤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개인이나 집단을 볼 때 그들의 고통에는 연민을 느끼면서도, 그들이 그러한 고통을 받는데는 고통받는 자들에게서 연유된 그만한 까닭이 있다고 지레 짐작해 버리고 하나님의 편을 들어 그들의 고통을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쉽게 단정해 버리지는 않는가?  

이런 경우, 우리의 설교는, 욥의 세 친구들이 욥을 비난하는 것과 그들이 하나님을  변호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사야서 53장에서 우리는 유사한 무대를 본다.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욥의 경우는, 그의 곁에 앉아서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고서 함께  통곡해 줄 친구라도 있지만, 여기 이 익명의 인물에게는 그러한 위로자도 없다. 그를 위로하는 친구는 없는데, 그를 비난하는 대적들은 많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53:3).

여기에서 그는 "우리도 ..." 라고 말함으로써, 고난을 받고 있는 그 사람을 묘사하는 이 관찰자는 자기가, 고난 받는 그 사람을 비난하는 대열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이 관찰자는 자신의 잘못을 이미 깨닫고 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고(53:4),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 이라고(53:5), 그런데도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고(53:4), 그런데 지금 깨닫고 보니까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고(53:5),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53:6)고 고백한다.

오히려 우리는 고난 받는 사람을 보고, 비록 통곡은 하지 않았어도, 비록 그 고난 당하는 사람과 더불어 이레씩이나 한 자리에 앉아서 고통을 나누지는 않았어도, 고통 받는 이를 보고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사람에게서, 고통 받는 사람을 보고서 자신의 구원자의 임재를 확인하는 그 사람에게서, 우리는 더 진한 우정과 해방과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  

욥을 위로하러 왔으면서도, 욥이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여, 욥을 비난하는 그의 세 친구의 신학적 설교에 아무런 하자가 없음을, 우리 독자들은 앞으로 전개될 제 2, 제 3 라운드의 설교에서도 계속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잘 준비된 일반적인 설교에 아무런 신학적 하자가 없듯이, 욥의 세 친구들의 설교에도 아무런 신학적 교리적 하자가 없다! 오히려 위험성이 있다면,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형벌 받는 죄인을 옹호하고 오히려 "그의" 죄를 "우리의" 죄로 전가시키는 그 익명의 관찰자의 발언일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설교자의 두 모델을 본다. 하나는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 설교를 하고, 신학적 노선을 달리한다고 하여 고통의 현장에서 신음하는 이들을 비난하는 욥의 세 친구들이고, 다른 하나는 전통적 신학과는 거리가 멀고 그래서 교리적으로도 의심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합법화하기보다는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하여 회개하는, 그리하여 고난을  구원의 능력으로 재해석하는, 고난의 종을 보고 있는 그 관찰자이다.


하나님이 욥에게 지혜 주시기를(11:4-12)  

소발이 욥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욥 자신이 스스로 흠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욥이 당하는 고난이 욥의 죄 때문이라고 보는 점에 있어서 소발은 앞의 두 친구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잘못을 범하는지 분명히 아시고 악을 보시면 곧바로 분간하시는데, 그리고, 두루 다니시며 죄인마다 쇠고랑을 채우시는데, 그리고 재판을 열어 죄인을 처벌하시는데(11:10-11), 욥이 받고 있는 형벌은 욥이 지은 죄보다 오히려 가볍다는 것을 욥은 알아야 한다고 윽박지른다(11:6).

소발은 욥의 친구로서 욥이 지혜를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는 우정어린 충고를 한다. 사람이 지혜를 깨닫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이 입을 여셔서 사람에게 지혜의 비밀을 드러내 주심으로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11:5-6). 여기에서 소발은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를 말하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알아낼 수 없다. 전능하신 분의 무한하심을 다 측량할 수 없다. 하늘 보다 높고 스올보다 깊으니 사람의 깨달음이 가 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친히 욥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래서 욥이 지혜를 깨달을 수 있게 되기를 친구로서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발은 욥에게 어떤 희망을 걸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미련한 사람이 똑똑해 지기를 바라느니 차라리 들 나귀가 사람 낳기를 기다려라"(11:12) 하는 악담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히브리어 본문이 달리, "미련한 사람도 똑똑해질 때가 있고, 들 나귀 새끼도 사람처럼 길이 들 때가 있다"라고도 번역될 수 있으니, 후자의 뜻으로 이해하면, 소발은 아직 욥에게 희망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들 나귀 새끼가 사람처럼 길이 들었던 예가 역사에 없으니, 후자처럼 번역하면 조금은 듣기 좋은 말처럼 들릴지 모르나, 욥이 지혜를 깨달으리라는 데에 아무런 희망을 두지 않는 점에 있어서는 전자와 후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욥이 지혜를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소발로서는 처음부터 입에 발린 말이었을 뿐 욥에게 그것을 기대하거나 하나님께서 욥에게 지혜 주시기를 바란다는 말은 아니었다.


소발이 욥에게 회개를 촉구함(11:13-20)

소발은 욥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 몇 가지 단계가 제시되어 있다. 먼저, 마음을  올곧게 바로 잡으라고 한다. 다음 단계는 기도하는 것이다. 셋째 단계는 생활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악에서 손을 떼고 집안에 불의가 깃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11:13-15). 앞의 두 친구보다 더 구체적인 회개를 말하고 있다. 엘리바스는,

"나 같으면 하나님을 찾아서, 내 사정을 하나님께 털어놓겠다"(5:8),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사람은 그래도 복된 사람이다. 그러니, 전능하신 분의 훈계를 거절하지 말아라"(5:17) 하는 말로, 욥이 회개할 것을 조심스럽게 권면한다.

빌닷 역시

"네 자식들이 주께 죄를 지으면, 주께서 그들을 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그러나 네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전능하신 분께 자비를 구하면, ... 네 경건한 가정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8:4-6) 하고, 욥이 회개할 것을 완곡하게 권면한다.

죄도 욥 자신의 죄가 아니고, 욥이 받는 고난도 자식들의 죄 값을 아버지가 치르는 것이라고 말하면서까지, 욥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그런데, 욥을 향한 소발의 권면은 강력하고 구체적인 것이 그 특징이다.

회개의 결과에 대해서도 소발은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회개하고 나면, 부끄러움이 사라진다.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되고 두려움이 없어진다. 괴로움을 다 잊게 된다. 생활이 밝아진다. 희망이 생긴다. 확신이 생긴다. 걱정거리가 없다. 악몽이 사라진다. 자다가 놀랄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환심을 얻고,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11:13-19). 그러나 악한 사람은 눈이 멀어서 도망칠 길 마저 찾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11:20). 길이 막히는 것에 관한 언급은

"어찌하여 하나님은 길 잃은 사람을 붙잡아 놓으시고 사방으로 그 길을 막으시는가?"(3:23) 하고 탄식했던 욥에게서 이미 들은 바 있다.


욥의 대답(12:1-13:18)

하나님께서 욥에게 지혜 주실 것을 바란다는 소발의 말이 욥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한 것 같다. 지혜를 가지고 말한다면, 욥 자신도 그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정도의 지혜만큼은 이미 가지고 있다고, 아니, 그 정도의 지혜는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고 응수한다(12:3). 오히려,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볼 생각은 전혀 못하고, 고통도 당해 보지 않은 것들이 불행을 당한 친구를 조롱이나 하고 비웃기나 하니, 그래, 고통 당하고 있는 내가 죄인이어서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면, 제 집에서 안일하게 지내는 강도는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이란 말이냐?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도 평안하게 사는 판인데, 그렇다면 그들도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란 말이냐고 몰아 부친다. 마치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다 알고 있기나 한 듯이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너희들이야말로, 하나님까지 제 손아귀에 검어 쥐었다고 생각하는 천인공노할 패역한 무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힐난한다(12:1-6).

소발은 욥에게, 욥이 자기의 고난의 처지를 깨닫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지혜의 비밀을 욥에게 드러내어 주셔야 한다고 했는데(11:6), 자기를 그처럼 높게 대접해 준 친구들에게 욥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소발이나 그의 친구들이 아는 채 하고 있는 것은 특별히 지혜라고 말할 것까지도 없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친구들은 금수도 알고 있고 자연도 알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도 모르고 있으니, 친구들은 지혜의 비밀을 드러내 주실 것을 하나님께까지 여쭐 것도 없이, 저 미천한 짐승들에게만 물어보아도 그것들이 욥의 어리석은 세 친구들에게 지혜를 가르쳐 줄 것이라고 말한다.

두뇌라고는 보잘것 없이 작은 새들에게 물어 보아도 그것들이 가르쳐 줄 것이고, 땅에게 물어도 땅이 가르쳐 주고, 바다의 물고기에게 물어도 하나님께서 손수 하시는 일을 일러줄 터인데, 세 친구들이 지혜를 가졌다고 하지만, 짐승의 지혜나 물고기의 지혜보다도 못하다는 것이다(12:7-11).

하급 관리를 고관으로 만드시는 것만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고관을 벗은 몸으로 끌려가게 하시는 일도 하나님은 하신다. 판단력이 있는 사람을 재판관으로 만드시는 것만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다. 재판관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시어 그들을 바보로 만드시는 일도 하나님이 하신다. 한 나라의 왕을 하나님이 세우시지만, 왕이 백성을 결박할 때 그 포승줄을 풀어 오히려 왕을 결박하시는 일도 하나님이 하신다. 제사장을 임명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지만 제사장들을 맨발로 끌려가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능력과 지혜가 다 그분의 것이라는 것이다(12:12-25).

친구들이라는 사람들은 이 모든 이치도 모르니, 욥으로 하여금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 까닭도 없다. 이 고난의 이유를 모른다는 점에서는 욥도 마찬가지이다. 알고 있는 사람은 다만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를 듣고 있는 독자들뿐이다. 욥이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의 고난이 친구들이 생각하듯이 죄의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다.

욥기의 배경을 서론에서 이미 읽어 알고 있는 독자들은 욥의 생각이 옳다는 것도 알고 있다. 욥이, 고통을 당해 보지 않은 친구들이야말로 불행한 이들의 처지를 조롱하고 비웃는 자들이라는 것, 그들이야말로 넘어지려는 사람을 떠미는 사람들이라고 (12:5) 욥이 말할 때, 그렇게 말하는 욥을 이해한다.

욥은 친구들을 경멸한다.

"너희는 무식을 거짓말로 때우는 사람들이다. 너희는 모두가 돌팔이 의사나 다름없다. 입이라도 좀 다물고 있으면, 너희의 무식이 탄로 나지는 않을 것이다"(13:4-5).

우리 독자들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욥기의 독자들은,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을 위하는 듯한 신학을 전개할 때 그 신학의 허상을 폭로하는 욥의 예리한 관찰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욥을 규탄하는 친구들의 설교와 그 설교 밑에 깔려 있는 그들의 신학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것인가를 여지없이 들추어내는 욥의 관찰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리고 친구들의 설교가 "한낱 쓸모 없는 잡담일 뿐"임을 인식하였다면, 동일한 통찰력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설교를 관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욥은 친구들에게 추궁한다.

"법정에서 하나님을 변호할 셈이냐? 하나님을 변호하려고 논쟁을 할 셈이냐?"(13:8).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이 신학자나 설교자의 신학적 변호나 받아야 존재할 수 있는 무력한 우상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 욥의 통찰이다. 마치 하나님이 법정에 섰는데, 자기들이 하나님을 변호할 변호사로 와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욥의 통찰이다. 하나님이 마치 자기들의 변호라도 받아야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재판하는 법정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인 양 의기양양한 친구들이야말로, 어느 누구의 변호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존엄과 하나님의 자유를 모독하는 자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욥의 통찰이다(13:6-13).  

곤경에 처한 인생에게 있어서 신학이나 설교는 하나님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정면으로 솔직하게 대면하도록 안내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솔직함과 담대함, 그리고 그렇게 대면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대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는 욥에게서 본다. 아뢰야 할 기막힌 사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나서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사악한 사람이 아니겠느냐는 것이 욥의 확신이다.

"나라고 해서 어찌 이를 악물고서라도 내 생명을 스스로 지키려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나를 죽이려고 하셔도, 나로서는 잃을 것이 없다. 그러나 내 사정만은 그분께 아뢰겠다. 적어도 이렇게 하는 것이 내게는 구원을 얻는 길이 될 것이다. 사악한 자는 그분 앞에 나서지도 못할 것이다"(13:14-16).


욥의 인간 이해(14:1-6)

다른 두 친구와의 첫 라운드와는 달리, 소발의 발언이 있은 다음에는 욥의 답변만 나오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욥의 기도가 연이어 나온다. 그의 기도는 30여 절이나 될 만큼 길다(13:20-14:22). 먼저 그는 두 가지를 빈다. 자기를 치시는 하나님께서 그 진노의 채찍을 거두어 주실 것과 하나님께서 욥을 두려워 떨게 하시는 일을 그쳐주실  것을 간구한다(13:20-21). 하나님은 욥에 대해 고문과 위협을 그쳐달라는 간구이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왜 자기를 원수로 여겨 위협하시는지 답변해 주실 것을 요청한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이 상대도 안 되는 사람을 가지고 무슨 적수라도 되는 듯이 고발하고 조사하고 하시느냐고 원망한다. 하나님께 도저히 적수가 안 되는 연약한 인간임을 묘사하는 그의 기도에 인간의 진면목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욥은 인간의 부정적 측면을 묘사하고 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인간의 불완전성과 허무를 다섯 가지 측면에서 하나님께 아뢰고 있다. 여자의 몸을 빌어서 태어난 사람은 (1) 사는 날 수가 적다. (2) 그 사는 날마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3)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은 마치 꽃의 경우와 같아서 피었다가 곧 지고 만다. 그러기에 연약한 인간이다. (4)  인생은 그림자처럼 신속하게 지나간다. (5) 인생이 사는 날 수와 달 수는 이미 한정되어 있고 그런 한계를 인간은 극복할 수가 없다. 이것이 욥기 14장 1-6절의 다섯 가지 주제이다.

욥이 인간의 이와 같은 부정적인 측면을 말한 것은 하나님의 모종의 행위에 대하여 제동을 걸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다. 고난 당하고 있는 욥은 그 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생각한다. 욥은 하나님의 쉴 사이 없는 감시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하나님이 폭군처럼 욥 자신을 감시하고 폭력까지 동원하고 잔인한 고문을 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과는 상대도 안 되는 이 연약한 인간, 덧없는 삶을 사는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왜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시느냐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데려다가 재판하려고 하시느냐는 것이다(14:6).

제발 이런 연약한 인간을 더 이상 분노의 눈길로 쏘아보지 말고 그 인간이 이제 좀 쉴 수 있도록 놓아 달라고 부르짖고 있다.  3절에서 욥이,

"주께서는 이렇게 미미한 것을 눈 여겨 살피시겠다는 겁니까?"

라고 한 말은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에게 관심을 두신다는 사실에 대한 욥의 감격을 표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지금 당장 그 혹독한 심판을 유보해 주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불만 섞인 욥의 주장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재판해 보셔야 그 결과는 뻔하다는 것이다. 더러운 인간에게서 깨끗한 것이 나올 리 없고, 더러운 것 밖에 더 나올 것이 없는데 재판은 해 보나마나 인간의 유죄판결일 뿐이라는 것이다(14:4).  

이러한 생각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이 본문에서뿐만 아니라 구약성서의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1) 인생은 짧다. 사는 날이 적다(욥 14:1). 인간의 목숨이 얼마 되지 못한다는 생각은 시편의 여러 곳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주께서 나에게 한 뼘 길이밖에 안되는 날을 주셨으니, 내 일생이 주님 앞에서는 없는 것이나 같습니다."(시 39:5)

(2) 인생은 괴로운 것이다. 짧은 인생마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욥 14:1). 욥기 자체에도 이미 언급되어 있는 생각이다.

"인간이 고난을 타고 태어나는 것은, 불티가 위로 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욥 5:7).

전도서 저자 역시,

"평생에 그가 하는 일이 괴로움과 슬픔뿐이고, 밤에도 그의 마음이 편히 쉬지 못하니, 이 수고 또한 헛된 일이다"(전 2:23) 라고 하였고,

시편의 시인도,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여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시 90:10)라고 하였다.

(3) 인생은 꽃이나 풀과 같을 뿐이다. 피었다가는 곧 지고 마는 연약한 인간이다(욥14:2). 인생의 덧없음과 연약함을 지적한 것은 욥 외에도 예언자 이사야와 시편의 시인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생각이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주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사 40:6-7).

시편의 시인 역시

"나의 일생이 얼마나 덧없이 지나가는 것인지를 말씀해 주십시오"(시 39:4),
"모든 인생을 얼마나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를 기억해 주십시오"(시 89:47),
"(인생은) 아침에 돋는 한 포기의 풀과 같을 따름입니다"(시 90:5)
라고 읊었다.  

(4) 인생은 그림자와 같다. 신속히 지나가는 인생이다(욥 14:2). 히브리어 표현에서 그림자 같다는 것은 "신속하게 지나간다"는 것을 뜻한다. 욥 자신도 다른 곳에서,

"우리는 다만 갓 태어난 사람과 같아서, 아는 것이 없으며, 땅위에 사는 우리의 나날도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욥 8:9) 라고 말한 바 있다.

전도서 저자도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짧고 덧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무엇이 좋은 지를 누가 알겠는가?..."(전 6:12)라고 탄식하였다.

시편 시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걸어다닌다고는 하지만, 그 한 평생이 실로 한 오라기 그림자일 뿐, 재산을 늘리는 일조차도 다 허사이니, 장차 그것을 거두어들일 사람이 누구일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시 39:6),

"나는 석양에 기우는 그림자처럼 사라지고"(시 109:23)
라고 하였다.

(5) 인생은 한정된 묵숨 만을 산다. 인생이 살 날 수, 달 수는 이미 정해져 있다(욥14:5). 시편 시인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이 지혜임을 고백하고 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인간 목숨이 이미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사 지혜의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주님, 알려 주십시오. 내가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내가 언제 죽습니까? 나의 일생이 얼마나 덧없이 지나가는 것인지를 말씀해 주십시오"(시 39:4),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시 9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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