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8월 26일 경북 대구시 출생
1964년 서울 상경
1965년 평화시장 내 삼일사에 견습공, 한미사 재단보조, 재단사로 일함
1969년 6월 재단사 모임 '바보회' 조직
1970년 9월 바보회를 투쟁단체인 '삼동친목회'로 새롭게 조직, 회장에 선출됨
10월 7일 평화시장 기사특보가 경향신문에 남.
10월 8일 삼동회 대표들 (주)평화시장 사무실에 찾아감. 다락방 철폐, 노조결성지원 등 8개항의 요구를 제출함.
10월 24일 근로조건 개선 시위를 기도했으나 실패.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경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분신. 밤 10시경 성모병원에서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에 안장.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理想)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生)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전태일 1970년 8월 9일 일기에서-



▲KSCF와 한기연은 9일 저녁 이화여대 대학교회에서 31주년 전태일 열사 추모예배를
드렸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열사의 31주년을 앞둔 9일 저녁 이화여자대학교 대학교회 2층 소예배실에서는 KSCF와 한기연의 회원들이 모여 전태일 열사 추모예배를 드렸다.

"열사의 넋 우리 가운데 흐르게 하소서"란 주제로 열린 예배는 열사의 뜻을 다시 이어가려는 마음이 곳곳에 숨어있었다. 다 함께 회개하는 기도에서는 풍족함과 나태함, 이기적인 모습, 안일한 모습으로 열사의 뜻을 저버린 죄를 조목조목 고백하고 회개했다.

"오늘 우리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 참된 것을 말한 전태일 열사를 기억합니다. 그는 정녕 사랑으로 가득찬 사람이었습니다. 어둑어둑한 다락방에서 점심조차 굶은 채 하루 15시간의 노동으로 지친 어린 누이들을 위해 자신의 차비마저 내놓고 집까지 걸어가던 그였습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현실 속에서 형제들과 어린 누이들을 위해 앞장서 싸우던 그였습니다. 우리는 '기독청년 전태일의 묘'라 써있는 그의 묘비를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까지 이웃을 위해 내어준 진정한 기독청년의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칠흙같이 어두운 시대에 등불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이제 우리 그의 삶과 죽음을 묵상하겠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삶과 죽음을 묵상하는 청년들. ⓒ뉴스앤조이 신철민

참석자들은 숙연히 머리를 숙여 열사의 삶과 죽음을 묵상하고 전태일 민중의 나라를 불렀다.

전태일이 1970년 8월 9일 결단을 내렸듯이 청년들고 작은 결단을 한다. 전쟁반대와 조선일보 반대. 서울대 96학번 방서택 씨는 1970년 평화시장의 상황과 지금 미국이 저지르고 있는 아프간 전쟁은 똑같이 평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라며 불평등한 강제로 인한 모든 억압에 대해 반대했다.

"저는 보복을 위한 전쟁이 또다른 보복을 낳기에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지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평등한 구조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선일보 반대 발언에 나선 고려대 00학번 한성민 씨는 조선일보 반대 세미나를 통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며,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메이저신문이 우리의 현실인식을 가로막고 있다며 굳이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이유로 삼았다.

▲참석자들이 열사의 정신을 본받아 한달동안 실천할 내용을 쓰고 있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두 명의 작은 결심은 참석자 모두가 결단하는 기도로 이어졌다. 열사의 삶을 좇아 살기로 약속하고, 예수의 참된 제자로 살기위해 이 세상을 거스를 수 있는 용기와 사랑을 호소했다. 이어서 열사의 애띤 얼굴이 인쇄된 수첩크기의 종이에 자신들이 한달 동안 열사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과제를 한가지씩 적고 소중히 간직하기도 한 것이다.

예배를 마치고 이어진 2부는 열사를 기억하고, 넋을 살리는 마당으로 전태일 열사와 같이 평화시장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한 정인숙 씨(전 여성노조연맹위원장)가 강연했다.

60-70년대의 시대적 환경과 평화시장의 구체적인 노동자들의 현실 그리고 노동조합이 태동하고 이후 많은 변화들을 알려주었다.

"전태일은 굶는 시다에게 풀빵을 사주려고 버스값 10원을 아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이 사람답게 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었지요. 혼자 한문으로 된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우리의 권리를 찾자고 했습니다. 혹 어떤이들은 살기 힘들어서 자살한게 아니냐고 하지만, 태일이는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고 신앙으로 살려던 사람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결단했던 겁니다."

▲전태일 열사와 같이 평화시장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한 정인숙 씨(전 여성노조연맹위원장)가 강연을 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1970년 11월 13일 분신한 전태일 열사. 화상은 사람에게 가장 극심한 아픔을 안겨주면서 죽음을 맞게 한다. 정인숙 씨는 어머니 이소선 씨에게 들은 말을 들려주었다.

"화상을 입은 전태일은 극심한 고통속에서도 차분이 말했답니다. "어머니 아들이 죽는다고 아파하고 울 때가 아닙니다. 내가 죽는 의미를 살려야 합니다."며 흐트러짐 없이 숨을 거뒀답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화상으로 사경을 헤매던 전태일의 유언이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당시 전태일의 분신을 동아일보 기자와 조선일보 기자가 사건을 알렸고, KSCF와 학생들 그리고 지식인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전태일 어머니는 아들이 그렇게 원하던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노동조합이 뭔지도 모르는 분이었지요. 그래도 만들려고 했고 그걸 만들어야 장례를 치르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일평생 살 수 있는 돈도 마다하고 끌려가고 회유해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1월 27일 청계노동조합이 만들어졌습니다."

전태일의 친구들과 어머니와 함께 청계노동조합에서 일하기 시작한 정인숙 씨. 당시 빨갱이 취급을 당하고 소금 세례를 받는 등 어려움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단다. 10년 후 군사정권은 민주노동조합을 모두 해산시켰다. 이후 80년대 90년대 열거한 변화상은 작은 불씨가 일으킨 소용돌이였다.(청계노동조합의 역사)

전태일기념사업회는 10월 27일부터 11월 13일까지를 추모 및 기념주간으로 정해 열사의 뜻을 기리고 있다. 추모기간에 맞춰 60여명의 기독청년들은 열사의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유언을 다시 되새기고 오늘 기독청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궁구했다.

▲함께 손을 맞잡은 기독청년들은 전태일 열사의 유언처럼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으리라. ⓒ뉴스앤조이 신철민


전태일 열사 추모기간의 행사는 다음과 같다.

10일 오후 7시 숭실대에서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
11일 오후 2시 여의도공원에서 전국노동자대회
13일 정오에는 마석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전태일 열사 31주기 추도식

(관련자료 전태일기념사업회(www.juntaeil.com, 02-3672-4138)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가 분신 항거한 장소는 현 평화시장 라, 마동 앞 횡단보도 근처로 열사의 분신 항거 장소라는 안내판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장소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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