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에 실린 창조과학회의 설립을 주도한 양승훈 교수의 ‘30년 인연의 창조 과학회를 떠나며’라는 글과 양승훈 교수와 창조 과학회에 대한 갈등의 글을 읽으면서, 목사이자 <뉴스앤조이>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대학 시절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말석에서나마 과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무언가 답답한 심정을 억누를 길이 없어 글을 쓰고자 한다. 더구나 그동안 갈릴레오를 이단 정죄하던 인식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창조과학회의 근본주의적 사고와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진 교회의 이를 향한 칭송, 반면에 과학의 세례를 받은 젊은이들이 교회에 대한 냉소적 시각을 가진 것을 우려 깊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를 남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 하자. 성서는 창조를 과학적으로 설명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천지와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신앙을 이야기 한 책이다. 따라서 성서에서 어떠한 과학적 주장을, 그것이 비록 창조 과학이라고 할지라도, 논증하려는 것은 성서를 과학책으로 전락시키는 불경스러운 일에 지나지 않는다. 성서를 하나님이 불러 주시는 대로 적었다고 주장하는 축자영감설을 신봉하는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있든, 아니면 성서는 노예들의 출애굽으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 체험과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알 수 있도록 선택하셨다는 진보적 신앙을 가지고 있든 성서가 기록되고 정경으로 확립될 당시에는 지구가 해와 달을 도는 것이 아니라 해와 달이 지구를 돌고, 별은 해와 달보다 아주 작은 광명체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의 언어로 기록된 것이라는 것이다.

지구의 나이가 6000년에 불과하다는 세대주의자들에게 감히 묻고자 한다. 하나님이 해와 달을 창조하신 것이 넷째 날이다. 그런데 이렇게 저녁과 아침을 가리키는 해와 달도 없는 시점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이니라’라는 말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있는가? 또 해와 달도 창조되기 전인 셋째 날에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만들어지고 그 식물들의 생존이 가능한가? 하루 차이라서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그 하루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떻게 아담과 하와와 가인만이 창조된 인간 세상에 도시를 나타내는 성이 존재하나? 어떻게 타인들이 존재하고 가인의 아내는 누가 만들었나? 노아 방주로 들어간 정한 동물들은 일곱 쌍씩인가 아니면 한 쌍씩인가?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라면 성서의 인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해와 달과 별은 지구보다 작은 광명체인데 우주의 나이는 과연 몇 살인가?

성서를 과학으로 이해하고 성경의 글자를 교황처럼 받드는 페이퍼 교황주의자들에게는 이러한 구절들이 갈등의 요소가 될지 몰라도, 고대에 성서를 읽은 이들이나 기록한 이들 그리고 그것을 필사한 이들은 전혀 그런 과학적인 인식으로 성경을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구절들에서 갈등을 느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하고, 그 뜻에 따라 사는 삶을 추구했지, 관념적인 지식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오늘 이 땅에 사는 ‘나·인간’의 경험과 인식의 중심은 이 지구다. 나의 삶의 경험 속에서는 지구가 해와 달을 돌지 않고, 해와 달이 지구를 돌고 있고, (먼 친척보다는 가까운 이웃이 더 낫다는 잠언의 말마따나) 아무리 크고 광대해도 몇 억 년 전에 발한 빛을 보고 있는 저 수많은 별들보다 해와 달이 우리 인간에게는 의미가 더 크고 영향이 더 크다.

칠흑 같은 절망의 어두운 인간의 삶에서, 노예로서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함 속에서, 수많은 약탈과 전쟁이 계속되는 약육강식의 무질서 세계에서, (이름과 영혼이 없는) 인간의 모습을 띈 동물로 취급되던 노예 생활을 하던 이들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찾아 가셔서 그들을 해방시키신 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히브리 노예들의 고백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대 서사시임에 틀림이 없다. 태양의 아들 바로를 비롯하여 제각기 자기들의 수호신으로 삼는 지배 계급의 신들은 모두 하나님이 만든 것에 불과하고, 그 하나님은 질서와 빛의 하나님이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모든 인간은 바로에서부터 히브리 노예까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으면서도 죄인이다라는 그들의 고백은 그야말로 창조 신앙의 위대한 선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 신앙에 근거하여 안식일을 제정했다. 365일 놀기만 하는 지배 계급을 위한 것이 아니라 365일 일을 해야 하는 인간들과 모든 피조물들을 위해 안식일을 제정했고, 육체적 일은 하지 않고 쉬어도 월급이 나오는 지배 계급과 교수와 목사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뼈 빠지게 일한 돈으로 헌금해서 목사에게 안식년 동안에도 먹고 살 월급과 외국에 돌아다닐 교통비를 제공하는 교인들과 노예들 그리고 짐승과 땅을 쉬게 하고 해방시키는 안식년 법을 제정한 것이다.

비록 모든 인간이 피조물로서 평등함에도 불구하고 죄인이기 때문에인간의 노력과 절약의 차이에 의해서 생기는 불평등을 인정하되 자기가 만들었건 돈을 주고 샀건 그 어느 것도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선언으로 희년을 제정한 것이 바로 창조 신앙으로 인한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 안식일마저 인간을 얽매는 날로 만든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안식일은 인간을 위한 날이라고 선언하셨고, 율법을 통해서 불평등을 조장하고 그 불평등에 눌려서 죄인취급을 받는 자들을 비롯해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가 우리에게 오셨다고 초대 기독교회는 고백했다. 그렇기에 초대 교회는 단지 신앙의 공동체만이 아니라, 유무상통의 생활의 공동체였다.

반면에 창조 과학은 글자에 얽매여 이러한 창조 신앙을 애써 무시하면서 성경을 한낱 과학의 책으로 전락시키고, 과학계의 웃음거리로 전락시키고 있다. Harald Fritzsch는 석학은 그의 ‘<Creation of Matter>'(우리말로는 <철학을 위한 물리학>)라는 책에서 MIT의 교수인 바이스코프 박사의 ‘전문가란 점점 더 좁아지는 분야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는 사람, 그리하여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현대의 과학자들이 자기의 전문 분야에는 환하지만 울타리만 벗어나면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단지 과학자라는 타이틀을 가졌다고 해서 성서를 그들의 좁고 맹목적인 시야를 절대화하여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만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 못지않게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서 변증을 할 필요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열심이나 주장이 진지하고, 과학적(즉, 상대방의 주장에 일리가 있는 것은 받아들이되 그것의 잘못을 논박하는 것)이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것은 옳지 못하다. 그들이 과학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성서의 글자에 얽매여서 옳거나 귀를 기울일만한 주장에 대해서, 중세 교회가 행한 마녀 사냥식의 제명 혹은 이단 사냥을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그러한 의미에서 양승훈 교수가 창조과학회로부터 제명을 당하는 모습은 전혀 과학적인 방법도 아닐 뿐더러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방법도 아니다.

성서는 말한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 방법과 내용은 우리가 알 수 없다. 그것이 현대 과학이 주장하는 방법일 수 있고, 창조 과학회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성경에 나오는 글자 그대로의 방법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내용이다. 무질서와 흑암의 세상에 하나님은 질서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주인이시다. 인간은 피조물이다. 그러기에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밑에 인간 없다. 또한 공산주의식의 사유재산을 (억지로, 일당 독재를 통해서) 무조건적으로 철폐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지만, 사적소유를 절대화하는 자본주의도 하나님의 창조 신앙에 근본적으로 어긋난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는 영광을 땅에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의 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형제와 이웃을’ 그리고 ‘원수마저도’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살리는 평화를 위해서 일해야 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보전하기 위해서 일해야 하고, 인간과 인간의 차별을 고착화하는 경쟁 제일주의 세상에서 평등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자본주의를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올드(Old)나 뉴(New) 라이트(right)나 그렇다고 래프트(left)도 아닌 좌우로 치우침이 없는 신앙과 삶 그것이 바로 창조 신앙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창조 과학이 아닌 창조 신앙이다. 창조 과학이라는 이름을 빙자한 마녀 사냥을 벗어나서,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노래하고 실천하는 그 아름다운 길로 손잡고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야말로 무신론의 세계를 이기는 유일한 길이다.

김재일 / 예장생협대표·연평도 연평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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