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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호 특집 짐 월리스와 한국교회]짐 월리스(Jim Wallis):복음주의 사회참여의 새로운 모델
  • 복음과상황 (goscon@newsnjoy.or.kr)
  • 승인 2008.09.18 15:37

I. 글을 시작하며

 
한국의 보수 기독교가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사학법 개정문제를 둘러싸고 목회자들이 삭발투쟁을 전개했고, 전국적으로 기도회 및 반대서명 운동이 거세게 진행되었다. 결국 그들의 힘에 국회가 움직였고, 정치인들은 그들의 표를 의식해 고개를 숙였다. 이후 주한미군철수 반대 및 이라크 파병 지지를 외치는 함성이 서울광장을 가득 채웠다. 지난 대선 때에는 장로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전국 교회가 담합을 해, 교회의 강단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전당대회장으로 변했고, 치밀하고 조직적인 노력의 결과, 세 번째 장로 대통령이 탄생했다. 최근에는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국쇠고기수입 반대 촛불집회를 “사탄의 공작”, “좌파의 음모”, 혹은 ”배후세력” 운운하며, 연일 강도 높은 비난의 독설이 저명한 보수적 목회자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제 한국의 보수적 기독교, 즉 복음주의 교회는 한국 정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큰 손’ 중 하나가 되었으며, 한국의 정치흐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도적 정치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한국의 보수 기독교는 일종의 시민종교로 변모하는 과정에 있다.(주-1) 

물론 교회의 정치참여가 죄는 아니다. 교회가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민주시민의 합법적인 권리요 의무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보수 기독교의 정치세력화 현상, 그리고 그 현상의 방향과 내용 면에서는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되고 있다. 무분별한 정치참여는 종교 혹은 교회의 본질 자체를 왜곡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 혼탁한 시대에 교회가 담당해야 할 예언자적 기능 대신, 현 체제를 맹목적으로 보수하려는 타락한 제사장적 역할로 추락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진지하고 정직한 독서를 통해, 세속의 오염된 사상과 문화를 비판하고 개혁하기보다, 타락한 속세의 정신과 세력이 교회의 성역을 장악하고 파괴하는 괴현상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급속도로 팽창되는 교회의 정치적 기득권에 비해, 교회가 한국사회에 끼치는 긍정적 영향력은 대단히 미미하며, 오히려 교회에 대한 세상의 비판과 도전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타락한 문화 속에서 신앙의 핵심을 보수하면서, 동시에 더욱 복잡해지고 난해해진 사회적 문제들에 보다 탄력적이고 책임 있게 대응해야 할 때에, 한국의 보수 기독교는 자기정체성의 혼란과 사역의 방향감 상실, 그리고 세상과의 적절한 거리유지에 실패함으로써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런 때에, 미국의 복음주의 좌파를 대표하는 <소저너스>의 편집자인 짐 월리스에 대한 관심이 최근 한국교회 내에서 고조되고 있는 현상은 대단히 고무적이다. 사실, 그 동안 한국에서는 짐 월리스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 <복음과상황>만이 짐 월리스에게 주목하면서, 그의 칼럼들을 꾸준히 번역/소개해 왔고, <현대기독교아카데미>에서 짐 월리스에 대한 강좌를 정기적으로 열어 왔을 뿐, 정작 신학교나 교회에서는 철저히 간과했다. 학계에서는 월리스에 대한 단 한편의 연구논문도 아직까지 발표되지 못한 실정이다. 하지만, 최근 미 대선에서 짐 월리스의 영향력이 크게 부각되고, 그의 책 <하나님의 정치>(God’s Politics)가 미국 서점가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드디어 한국의 출판계도 월리스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의 책들이 연속적으로 번역/출판되고 있는 현상이 이런 현실을 대변해 준다.(주-2) 짐 월리스는 인격적 신앙과 정치적 책임을 통합함으로써, 종교적 우파의 왜곡된 신앙과 세속적 좌파의 편향된 정치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런 면에서 짐 월리스의 신학과 활동을 한국에 소개하고 연구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매우 적절하며, 신학적으로도 가치 있는 작업이라고 판단된다. 본 논문은 이런 한국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짐 월리스의 한국적 적용가능성을 탐구하려는 최초의 학문적 시도이다. 이제 짐 월리스의 생애, 그의 신학적/신앙적 정체성, 그리고 그의 중심 사상들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가치를 검토하고, 그의 사상과 실천이 현재 한국 복음주의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숙고해 보고자 한다.   
 

   
 
  미국의 복음주의 좌파를 대표하는 <소저너스>의 편집자인 짐 월리스에 대한 관심이 최근 한국교회 내에서 고조되고 있는 현상은 대단히 고무적이다. (사진제공 김경미)  
 

II.  짐 월리스는 누구인가?
 
1)  짐 월리스의 생애와 사역?(주-3)

짐 월리스는 미국 복음주의 진영에서 빈곤과 전쟁 같은 심각한 사회·정치적 문제들에 대해 예언자적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대표적 지성인 중 한 명이다. 1948년, 미시간 주의 한 플리머스 형제단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경건하고 보수적인 기독 청년으로 평범하게 성장했다. 그러던 그가 미시간 주립대학교에 들어가면서, 당대의 가장 첨예한 사회적 쟁점인 흑인들의 암담한 현실과, 이에 대한 복음주의 기독교의 냉대와 무관심을 체험하며, ‘급진적 기독교’인으로 변모하였다. 특별히 1968년, 마틴 루터 킹 2세와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이란 비보를 접하면서 정의에 대한 냉철한 의식을 소유하게 되었고, 마태복음 25장을 읽으며 가난한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며, 극적인 신앙적 회심을 경험했다.

성서에 대한 갈증으로 목말라하던 그는 1970년, 시카고에 소재한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신학교에서 그는 자신과 비전을 공유하는 친구들과 함께 ‘기독교 인민연합’(People’s Christian Coalition)이란 공동체를 설립했고, 1971년에는 <포스트-아메리칸>(Post-American)지를 발행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기독교적 사회참여에 뛰어들었다. 얼마 후 이 공동체가 해체되자, 잡지 발행도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1975년에 월리스를 중심으로 워싱턴 D.C.에서 ‘소저너스 공동체’(Sojourners Fellowship)가 재건되고, 잡지도 <소저너스>란 이름으로 다시 발행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빈곤문제의 해결을 위해 ‘갱신으로의 부르심’(Call to Renewal)이란 에큐메니칼 단체를 설립하여, 이 분야의 여론 형성과 대중교육, 그리고 구체적 운동을 주도했다. 월리스는 이 공동체와 잡지, 그리고 단체를 토대로, 복음주의적 영성·공동체적 친교·기독교적 사회책임을 결합한 복음주의적 신앙/신학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월리스는 <회심>(The Call to Conversion)외에, <대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 2008), <하나님의 정치>(God’s Politics, 2005), <신앙의 능력>(Faith Works, 2000), <누가 하나님을 위해 말하는가?>(Who Speaks for God?, 1997), <정치의 영혼>(The Soul of Politics, 1995), <우리에게 부흥을 주소서>(Revive Us Again, 1983) 등의 책들을 저술했다. 뿐만 아니라, 빈번히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출연하고, 여러 주요 일간지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강의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미국의 교회와 정계에 주목할 만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성공회 목사인 조이 월리스(Joy Carroll Wallis)와 결혼하여 두 아들 루크(Luke)와 잭(Jack)을 두었으며, 워싱턴 D.C.에 소재한 소저너스 공동체에서 다른 회원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2) 복음주의 좌파로서의 짐 월리스
 
짐 월리스의 신학적 혹은 신앙적 정체성을 규정짓는 학계의 분류는 다양하다. ‘진보적 복음주의자’(progressive evangelical), ‘자유주의적 복음주의자’(liberal evangelical), 혹은 ‘복음주의 좌파’(evangelical left), 혹은 ‘젊은 복음주의자’(Young evangelical)등이 대표적 명칭이다.(주-4) 그렇다면 짐 월리스는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는 자신의 저서들 곳곳에서 자신을 “시대를 잘못 타고난 19세기 복음주의자”라고 지칭한다. 개인적 신앙과 사회적 개혁의 통합을 지향했던 19세기의 제2차 대각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주-5) 뿐만 아니라, 자신을 ‘보수적 급진주의자’로 규정하기도 한다. ‘보수적’이란 말에 기독교 신앙의 정통적 가치를 보존하려는 그의 의지가 담겨져 있고, ‘급진주의’란 단어 속에, 타협을 불허하고, 본질을 저돌적으로 추구하며 관철시키려는 그의 단호한 기백이 서려 있다. 이처럼 ‘보수적 복음주의’혹은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에 상반되는 표현으로서, 자신을 ‘보수적 급진주의’ 혹은 ‘19세기형 복음주의’로 정의하는 월리스의 의지는 다음과 같은 그의 주장들 속에서 보다 구체적인 표현과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일차적으로, 월리스는 복음주의자로서 ‘회심’과 ‘부흥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간직하고 있다. 그가 1981년에 출판했던 책의 제목이 <회심>이었고, 2008년에 나온 신간은 <대각성 운동>이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처럼, 월리스도 복음주의의 핵심적 특징을 회심으로 이해하고 있으며,(주-6) 오늘날 교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회심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고, 하나님을 향해 단호히 돌아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주-7) 뿐만 아니라, 월리스는 사회정의를 위한 사회운동도 개인의 변화가 전제되어야 하며, 이런 변화는 부흥운동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선언한다.
 
어쩌면 우리는 일종의 새로운 신앙 “부흥”에 도달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부흥은 당파정치를 초월하여 사회정의를 위한 구체적 승리의 길로 인도하는, 진정한 해결의 문을 열 것이다. 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다름 아닌 강력한 신앙운동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이 운동은 개인적 회심과 사회적 정의를 효과적으로 결합시킬 것이다. 사회운동을 위해서 개인적 변화가 꼭 필요하며, 사회운동은 정치의 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주-8)
 
하지만 복음주의자로서 월리스의 생각과 행동은 전통적 유형의 보수적 복음주의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래서 그는 보수적 복음주의자로부터 ‘진보적’ 혹은 ‘자유주의적’이란 수식어의 비판을 자주 듣는다. 그렇다고 그를 일방적으로 자유주의자나 진보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그 이유는 월리스의 일차적 관심사가 개인윤리에 집착해서 사회윤리의 가치를 간과하는 종교적 우파의 한계와 사회윤리와 도덕적 가치의 상관관계를 적절히 이해하지 못하는 세속적 좌파의 오류를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1994년에 출판한 책, <정치의 영혼>(The Soul of Politics)의 부제를 “종교적 우파와 세속적 좌파를 넘어서”라고 붙이기도 했다. 그는 이 책 서문에서 이 양 극단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이렇게 서술했다.
 
자유주의는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진지한 운동의 토대가 되는 도덕적 가치들을 명확하게 규정하거나 드러내지 못한다. 그래서 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변화 간의 중요한 고리가 좌파에게는 결여되어 있다. 반면, 보수주의는 지금도 구조적 부정의와 사회적 억압의 실체를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빈곤, 인종차별, 그리고 성차별의 사악한 영향들을 무시하면서, 개인의 자기향상과 가족가치로의 회귀를 부르짖는 것은 그 희생자들을 두 번 죽이는 것이다.(주-9)
 
이처럼 월리스는 종교적 우파들이 강력하게 주장하는 동성애와 낙태 문제를 둘러싼 가족의 가치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동의하면서, 동시에 이런 문제들만큼, 아니 이런 문제들보다 더 중요한 성서적 명령이 빈곤·인종·성·전쟁·환경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월리스는 복음주의의 전통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기존의 종교적 우파와는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주-10) 즉, 그는 개인의 영성을 존중하면서, 사회정의에 대한 비전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꿈꾸는 이상적 그리스도인은 ‘빌리 그래함’과 ‘마틴 루터 킹 2세’를 합성한 모습이다.(주-11) 이런 면에서 그를 복음주의 좌파, 혹은 진보적 복음주의자로 명명하는 것은 적절해 보인다.(주-12)
 

   
 
  ▲ ⓒ복음과상황 자료사진  
 

3) ‘하나님의 정치’를 꿈꾸는 짐 월리스
 
월리스는 보수적 신앙과 보수적 정치의 획일적 통합을 지향하는 종교적 우파의 신정정치에 강력히 반대한다. 동시에 건강한 정치를 위하여 종교가 기여할 수 있는 고유의 영역 자체를 거부하는 세속적 좌파의 배타적 태도도 단호하게 거부한다. 이런 양 극단에 대한 월리스의 대안이 소위 ‘하나님의 정치’이다. 하나님 정치의 구현을 위해, 월리스는 다음과 같은 화두를 독자들에게 던진다.

첫째, “하나님은 공화당도 아니고 민주당도 아니다.” 이것은 특정한 정치적 이념과 신학을 동일시해 온, 공화당과 민주당의 ‘잘못된 신학’(bad theology)을 비판하는 것이다. 특별히 종교적 우파의 경우, 자신들의 입장을 공화당의 이념과 무비판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미국 정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대신,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부정적 기능을 해 왔다. 따라서 월리스는 “종교의 최대 공헌은 이념적으로 예측가능하거나 당파적 충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좌파와 우파 모두를 비판할 수 있는 도덕적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주-13)  

둘째, “인격적 신앙과 정치적 희망을 결합하라.” 월리스는 일차적으로 종교적 우파의 사유화된 신앙, 즉 신앙의 사회적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 신앙을 사적 영역의 문제로 한정하는 경향을 비판한다. 동시에 도덕적 가치와 정치 간의 운명적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정치를 상업주의와 물질주의로 오염시킨 세속적 정치가들도 맹렬히 공격한다. 이처럼 왜곡된 미국 정치판의 비관적 현실 앞에서 월리스는 신앙과 정치를 창조적으로 결합하는, 즉 신앙과 정치에 대한 진보적이고 예언적인 비전을 제창한다. 이권다툼과 정치투쟁에 집착하여 방향감을 상실한 미국 정치에 복음주의자들의 개인적 신앙에 근거한 도덕적 가치를 예언자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정치적 혼돈 속에 질서와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 월리스의 생각이다.(주-14)

셋째, “하나님이 우리 편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어야 한다.” 이 말은 남북전쟁 당시에 아브라함 링컨이 한 말이다. 그러나 월리스는 이 링컨의 말을 끊임없이 인용하면서, 자신들의 특정한 정치이념을 신성시하려는 종교적 우파와 부시 정권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월리스는 현재 미국의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들이 “자신들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끌에는 지나치게 집착한다”고 비판한다. 이런 아전인수 격의 태도가 모든 관계를 ‘아군과 적군’ 혹은 ‘나와 그것’의 흑백논리적 혹은 비인격적 관계로 변질시키고, 여기에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는 독선적 신앙이 가세할 때, 그것은 파괴적 신정정치를 초래할 수 있다고 월리스는 경고한다. 이런 면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정치는 링컨의 충고대로,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우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도록 단호하게 선택하는 것이다.(주-15)

끝으로, “바람의 방향을 바꾸어라.” 월리스는 여론의 향방을 쫓아다니는 정치가들의 습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정치가들은 여론을 형성하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유권자들의 표심을 사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변신을 감행하는 카멜레온 족속이다. 그 동안의 많은 신자들이 직접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정치판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기 신앙의 왜곡과 정치의 혼탁만을 가중시켰을 뿐이다. 이런 상황을 목도하면서, 월리스는 신자들이 직접 정치판을 주도하겠다고 현장에 뛰어드는 대신, 유권자들의 여론을 형성하고 움직임으로써, 전문적 정치가들이 그 여론의 향방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월리스는 마틴 루터 킹을 구체적 예로 제시한다. 그는 직접 정치에 뛰어들지 않았지만, 흑인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국가적 합의를 이끌어 냄으로써, 백악관의 주인들이 결국 국민의 뜻에 복종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결국, 월리스는 신앙인들이 정치적 중립과 도덕적 우월성을 무기로, 미국 정계의 흐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주-16)   
 

   
 
  ▲ ⓒ복음과상황 자료사진  
 

III. 짐 월리스의 중심 사상
 
1) 빈곤문제
 
빈곤문제는 월리스가 개인적으로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이다. 그가 진보적 학생운동권에서 복음주의자로 회심하게 된 배경에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종말의 심판기사가 있었다.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가 곧 예수님에 대한 배려라는 사실을 그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워싱턴 D.C.의 빈민촌에서 ‘소저너스’ 공동체를 시작한 것도 가난한 자들을 섬기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이런 그의 개인적 관심은 빈곤에 대한 성서적 강조와 빈곤으로 인한 비참한 현실을 그가 직접 목격하면서 체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심화되었다. 먼저 월리스는 성경에서 빈곤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며, 신앙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책임인지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가난한 자들과 부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에 관한 수천 개의 절들을 발견했다. 우리는 그것이 구약성경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주제였음을 깨달았다.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우상숭배에 대한 것이고, 또한 양자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6절 당 1절이 가난한 자들이나 돈(복음서는 그것을 맘몬으로 부른다)에 관한 것이다. 공관복음에서는 10절 당 한 절이,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7절 당 한절이 그런 주제에 관한 것이다.(주-17) 
 
빈곤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은 빈곤에 의해 초래된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더욱 심화되고 현실감을 띠게 되었다.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처참한 빈곤의 현실에 대한 월리스의 글은 이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을 대변한다.
 
다음의 통계는 우리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미국의 아동들 6명당 한 명 꼴로 빈곤에 처해 있고(미국에서 1천 3백만 명!), 빈곤 한계선 아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수는 무려 3천 6백만 명(이 숫자는 캘리포니아를 포함하여, 미국의 어느 주에 사는 사람들의 수보다 많은 것이다)이고, 4백만의 가정들이 식사를 거를 정도로 굶주리고 있으며(이 숫자보다 세배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가족에게 제대로 음식을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 4천 5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의료보험 없이 살고 있고, 그 중에는 8백 4십만 명의 어린이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1천 4백만 가정들이 주택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으며, 노숙자들의 수는 급증하고 있다. 특별히 도시에 살고 있는 가족들이 그런 고통을 극심하게 겪고 있다.(주-18)
  
빈곤문제에 대한 이런 성서적·현실적 인식에 근거해서, 월리스는 미국의 정치를 맹렬하게 비판한다. 빈곤이 범람하고 있을 때, 정치가들은 빈곤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을 찾는 대신, 자신들의 선거활동을 위해 빈곤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월리스는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의 권력 투쟁의 제단 위에서 미국인들이 이념적 희생제물이 되었다”고 통탄한다.(주-19) 그러면서 월리스는 보수주의자들을 향해, 그들이 빈곤의 원인을 가정의 붕괴로 파악하는 것은 빈곤의 여러 이유들 중 하나를 전체와 동일시키는 근시안적 태도라고 비판하고, 이 문제를 보다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그리고 신학적인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월리스는 빈곤퇴치의 가장 궁극적인 방법은 가난한 사람들이 직업을 갖도록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기업과 은행, 정부, 그리고 신앙단체들이 체계적으로 협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정부의 사회복지제도가 단순히 가난한 자들을 금전적으로 돕는 일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미국에서 빈곤의 정도를 축소시키는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신앙단체들도 단지 빈자들을 위한 개별적 봉사뿐만 아니라 공공정책의 개선을 위한 여론형성에 관여해야 한다고 그는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 부자들 중심으로 제정되어 있는 세금혜택규정, 즉 부익부빈익빈 구조를 고착시키는 왜곡된 세금정책을 제도적으로 개선해서,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정책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또한 월리스는 빈자들에 대한 사회적 국가적 책임을 약화시키는 주된 원인 중 하나가 지나친 군사비와 전쟁비용이라고 지적하면서, 이처럼 도덕적으로 정당성이 약한 재정구조를 개선해서, 사회복지를 위한 예산을 증액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끝으로 월리스는 빈곤문제를 단지 경제나 정치문제로 한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이 문제를 신학적 문제로 파악함으로써, 이 문제를 보다 심오하고 근원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주-20) 경제논리와 정치투쟁의 희생물인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경제와 정치보다 높은 가치와 의미의 영역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복음주의자 월리스의 기본적 확신인 것이다. 
 
2) 인종문제
 
‘플리머스 형제단’이라는 보수적 복음주의 출신인 짐 월리스가 사회개혁운동가로 전향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그가 사춘기를 지나는 동안, 미국의 인종차별 문화를 목격하게 된 것이다. 자기보다 명석한 흑인 친구가 글을 쓸 줄 모른다는 사실에 월리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백인인 자신의 부모는 자식들에게 길가에서 어려움에 처할 때 경찰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가르쳤으나, 그가 만난 흑인 친구의 어머니는 흑인 아들에게 길을 가다 경찰을 만나거든 몸을 숨기라고 교육했다. 이런 모순된 현실을 몸으로 겪으면서, 월리스는 흑인들의 친구가 되었고, 그들을 위한 투사가 되었다. 그가 가난한 흑인들이 밀집해 있는 워싱턴 D.C. 14번가에서 ‘소저너스’ 공동체를 시작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가 빈곤문제에 눈을 뜨게 된 것도 역시 미국 흑인들의 비참한 삶을 통해서였다. 따라서 월리스의 빈곤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은 미국의 구조적인 인종차별 문화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월리스는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 15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1960년대의 민권운동을 통해 인종차별을 극복하는 다양한 법들이 제정되었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은 미국사회의 뿌리 깊은 사회적 문제로 남아 있다고 믿는다. 그는 일차적으로 인종문제를 “미국의 원죄”(America’s Original Sin)로 규정한다. 그는 “미국이 타 인종에 대한 종족말살과 또 다른 인종의 노예화에 근거해서 건설된 백인사회”라고 정의한다.(주-21) 미국사회의 이 같은 태생적 한계는 이후 미국사회의 가장 심각한 내적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해 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백인들은 문제해결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거절해 왔다. 그나마 그 동안 성취된 최소한의 발전도 흑인들의 영웅적 투쟁의 산물이었다. 이에 대해 월리스는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적고 있다.
 
미국의 원죄는 우리나라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미국에서 노예제도와 그 이후에 발생한 흑인에 대한 차별은 대단히 심각한 불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국가적 회개와 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 엄청난 죄에 대해 “사과하는 것”도 대단히 심각한 논쟁을 불러 왔을 뿐이다.(주-22)    
 
결국, 이렇게 좀처럼 개선되지 않은 인종차별의 현실은 대다수 흑인들의 삶을 처참한 비극 속으로 추락시켰다. 월리스는 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순진한 흑인 청년들이 미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인종차별 전통의 희생양이 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상세히 보고하고 있다. 흑인들이 거주하는 빈민지역에서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생계를 위해 마약거래에 손을 대고,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비극적 사연들을 월리스는 비통한 심정으로 기록한다. 뿐만 아니라, 주택재개발업자들과 시당국의 결탁 속에 가난한 흑인들이 주거지를 박탈당하고, 도시의 유목민 혹은 노숙자로 전락하는 현실 앞에서 월리스는 고통스럽게 절규한다.(주-23)   

이처럼 인종문제에 대한 월리스의 비판적 문제인식은 문제해결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 온 공화당과 민주당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인종차별로 인해 미국 사회가 분열되고, 미국인들의 영혼이 해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양 당은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대신, 이 분열을 당연시하거나 혹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적극적으로 이용해 왔다고 월리스는 비판한다.
 
오늘날 공화당원들은 인종분열의 전략을 통해 선거에서 승리한다. 하지만 존슨과 케네디의 당인 민주당은 오랫동안 흑인 유권자들의 표를 당연시 해왔다. 그래서 오늘날 미국의 흑인들에게는 정치적 선택권이 거의 없다. 한 정당은 백인 노동계급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로 흑인들을 이용하고, 다른 당은 그들의 불만을 시정하기 위한 어떤 구체적 제안을 내놓지 않은 채, 그들의 지원만을 요구한다.(주-24)  
 
이처럼 복잡하고 난해한 미국의 인종문제는 최근에 미국의 유색인종들이 다양해지고, 또 그들 간에 이권다툼이 벌어지면서 더욱 복잡해지고 심각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제 미국에서 소수인종의 주류는 흑인이 아니라, 히스패닉 계열이며, 아시아인의 수도 급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흑인들과 히스패닉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오랫동안 흑인들이 독점해 왔던 정부의 다양한 혜택들이 최근에는 히스패닉들에게 돌아가면서, 이들을 향한 흑인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 뒤늦게 이들의 경쟁 속에 뛰어든 아시아 이민자들이 이들에 의해 더 혹독한 차별과 박해를 받고 있다. LA 폭동 당시 한국인들이 흑인들에 의해 공격을 당했던 것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여기에 중산층으로 신분이 상승한 소수의 흑인들과 여전히 가난한 다수의 흑인들 사이에도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월리스는 이런 복잡하고 난해한 인종차별 혹은 인종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문제를 신학적 차원에서 이해하면서, 동시에 이 문제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강조한다. 기본적으로 미국의 인종차별 문화를 ‘미국의 원죄’로 규정한 것 자체가 이 문제를 신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려는 그의 근본적 의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인종차별은 복음과 그리스도의 화해사역의 핵심을 부정한다. 그것은 서로 분리된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교회의 목적을 부정한다.” 동시에 그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교회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교회의 각성에서 기원한다. 왜냐하면 현재 이 문제는 철저하게 영적이기 때문이다.”(주-26) 하지만 교회가 이 일에 관여해야 하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이에 대해 월리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영적 가치’의 문제에 관해서, 아마도 소수인종과 백인공동체 모두에 속한 종교 공동체들이 궁극적으로 인종의 정의와 화해를 성취하는 데 주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이 회중들이 아직도 대부분의 공동체 내에, 특히 가난한 공동체 내에 가장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제도들이며, 한 사회가 가장 절박하게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는 가치들을 자연스럽게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주-27)  
 
결론적으로, 월리스는 인종문제의 궁극적 해결은 백인과 흑인 당사자들이 정직하게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서로 간의 화해를 위해 양자가 용기 있게 결단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 문제해결의 열쇠는 백인들의 손에 쥐어져 있지만, 흑인들 또한 그들만의 고유한 책임과 역할을 인식해야 한다. 양자가 만나서 정직하게 현실을 대면하고,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것, 그것이 진정한 화해를 위한 중요한 첫 걸음이라고 월리스는 제안한다.(주-28)
 
3) 전쟁과 평화의 문제
 
1960년대에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월리스는 꾸준히 평화운동에 관여해 왔다. 2001년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리스트에 의해 허물어지고, 이어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향한 미국의 보복전쟁이 시작되자, 월리스는 전쟁과 평화 문제에 더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월리스는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신학적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성서적·신학적 차원에서 접근하며, 신앙공동체가 이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주-29) 

먼저, 월리스는 전쟁과 평화에 대한 기존의 기독교적 입장을 “평화주의, 정당전쟁, 그리고 십자군”으로 구분하고, 기독교의 정신에 입각한 입장을 평화주의와 정당전쟁으로 제한한다. 그러면서, 평화주의와 정당전쟁론 사이의 선택 대신, 양자를 넘어서는 제4의 길로, ‘정당한 평화정착’(just peacemaking)을 제시한다. 그는 이 제4의 길이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하며, 동시에 평화주의와 정당전쟁론의 장점과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들이 평화를 추구하고 세상의 폭력을 제한하며 억제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하거나 동의해야만 한다. 평화주의 전통이든 혹은 정당전쟁 전통이든, 전쟁에 대해 기독교가 반대한다는 분명한 전제가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통치를 고대한다. 그곳에서는 평화와 정의가 우세하며,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 것처럼 살도록 부름을 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꿈꾸고, 미래의 약속 안에서 현재를 살아간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강제적으로 이 땅에 끌려오지 않는다. 오히려 십자가를 통해 도래한다. 전사인 왕이 아니라 고통 받는 종을 통해 도래하는 것이다.(주-30)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이런 원론적 이해를 배경으로, 월리스는 테러문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거론한다. 월리스는 테러문제 해결의 첫걸음이 테러문제에 대한 냉철하고 현실적인 인식이라고 주장하면서, 테러를 악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빈 라덴을 정의와 평화의 투사로 간주하려는 일각의 움직임에 대해 냉혹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테러문제를 해결하는 과도한 폭력적 대응에 대해서도 똑같이 문제를 제기한다. 테러리스트를 무력으로 응징하려는 것은 문제를 본질적, 거시적 차원에서 다루지 못하는, 일종의 대증요법에 불과하다는 것이 월리스의 판단이다. 테러를 예방하는 근본적 해법은 테러를 생존 및 저항의 수단으로 선택하도록 만든 근원적 원인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증상만 공격하지 말고, 테러리즘의 근본적 원인들을 공격하라. 빈곤이 테러리즘의 원인은 아니다. 하지만 빈곤과 절망은 테러리즘을 양산하는 주된 미끼들이다. 우리는 테러리즘이라는 모기가 서식하고 있는 부정의의 습지를 제거해야 한다. 정말로 정의가 평화에 이르는 최고의 길이다. 공동의 안전이 없다면 정녕 안전은 없는 것이다.(주-31)
 
이런 방식으로 테러를 이해하면서, 월리스는 이라크전쟁에 대해 미국 정부, 특히 부시 대통령을 맹렬히 비판한다. 월리스가 부시 정부를 비판하는 이유는 먼저, 미국 정부가 이라크전쟁에 대해 정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시 정부는 대량살상무기를 이유로 이라크를 침략했지만, 정작 대량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을 바꾸며 전쟁을 고집하고 있다. 둘째, 공개석상에서 자신을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소개하는 부시 대통령이 미국을 선으로, 그리고 이라크를 악으로 규정하는 그릇된 신학에 근거해서, 성경과 상관없는 제국주의적 전쟁을 성전으로 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미국 정부를 향해, 월리스는 “예수님이 언제 전쟁을 찬성했는가?”라고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셋째, 미국 정부가 UN과 여러 동맹국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정치적, 도덕적 정당성도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시 정부는 일방적이고 독선적으로 전쟁을 치르며, 종교 지도자들, 특히 기독교 지도자들의 충심 어린 충고나 조언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넷째, 부당한 전쟁을 통해, 특정 기업들에게 세금감면 등의 특혜를 베풀고 소외계층을 위한 정부지원은 대폭 삭감하며, 군사비와 전쟁수행비는 과도하게 지출함으로써, 다른 분야의 예산이 축소되거나 고갈되고 있기 때문이다.(주-32)   
 
IV. 글을 마치며: 짐 월리스와 한국교회
 
이상에서 신앙의 사유화를 주도하는 종교적 우파에 대한 강력한 견제세력으로, 동시에 정교분리의 편견 속에서 종교를 공적 영역에서 배제해 온 세속적 좌파에 대한 중요한 교정세력으로 부상한 짐 월리스의 삶과 생각, 그리고 활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21세기에 한국에서 왜 복음주의자들은 짐 월리스에게 주목해야 하는지, 짐 월리스의 한국적 적용가능성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먼저,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짐 월리스의 독특한 생각과 활동을 통해, 복음주의의 사회참여가 기존의 종교적 우파의 전유물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복음주의는 근본주의 혹은 보수주의와 동의어로 혼용되어왔다. 그 결과, 복음주의는 교리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및 정치 문제에 대해서도 일방적으로 보수적 입장을 고수해 왔다. 특별히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시련을 거치면서 한국기독교는, 특별히 복음주의 계열의 교회들은 한국사회의 가장 강력한 보수 세력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견고히 해왔다. 정치적으로는 철저한 반공세력으로, 경제적으로는 자유시장 경제에 대한 철저한 지지 세력으로, 그리고 외교 및 군사적 측면에서는 강력한 친미세력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왔다. 특별히, 미국에서 부시정권의 등장과 이를 지지하는 종교적 우파의 발흥과 보조를 맞추어 한국의 보수적 기독교, 즉 복음주의 교회들은 극우적 정치이념을 수호하고, 진보세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견제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런 보수적 기독교의 행보는 지난 대선에서 ‘장로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고, 미국의 종교적 우파의 선례를 속에서 자신의 역사적·신학적 정당성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런 맥락에서 짐 월리스는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에게 ‘복음주의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줄 수 있다. 즉,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신학적/신앙적 보수주의가 반드시 정치적 보수주의로 환원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도록 월리스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시대를 잘못 태어난 19세기의 복음주의자”라고 정의했다. 19세기에 제2차 대각성을 주도했던 찰스 피니는 복음전도자요 부흥사였지만 당대의 가장 민감한 사회문제였던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20세기 초반의 대표적 근본주의자였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미국의 진보적 정치를 주도했던 민주당 상원의원이었다. 또한 18세기 영국의 노예제도폐지를 성취했던 저명한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는 존 웨슬리의 영향을 깊이 받은 복음주의자였다. 이런 역사적 흐름의 연장선에 짐 월리스가 존재하는 것이다. 복음주의적 신앙고백은 그 어떤 유형의 기독교보다 적극적으로 사회개혁에 참여할 수 있으며, 사회적 정의와 변혁의 주체세력으로 활동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한국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주의적 신앙과 진보적 정치활동을 창조적으로 결합한 짐 월리스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둘째,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정치적 중립성과 도덕적 우월성’을 추구하는 짐 월리스를 통해, 특정이념이나 정당을 지지하며, 자신들이 직접 정치적 싸움판에 뛰어드는 오류를 극복해야 한다. 최근에 한국의 보수적 기독교는 우파 정권과 자신들의 운명을 동일시하며, 특정 이념의 맹목적 지지 세력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교회가 다양한 이유와 명분하에 분열된 국론을 통합하고, 이 과정에서 민족의 깊은 상처들을 어루만지고 치유하기보다, 특정이념 혹은 특정 정치세력의 조직원으로 기능함으로써 국가적 분열을 주도하고 심화시키고 있다. 이처럼 한국보수기독교의 우파적 정치세력화 현상은 국민들의 지지와 성원을 얻기보다 오히려 한국기독교의 위상을 실추시키며, 선교 현장의 심각한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기독사랑실천당’의 참패는 이런 현실을 대변해 주는 대목이다.

이런 상황에서 짐 월리스는 또 한번 우리에게 중요한 경종을 울려준다. 그는 “하나님이 공화당도 아니고 민주당도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그는 특정 정당의 후원세력으로 현실정치에 직접 뛰어들었던 종교적 우파의 지도자들, 특히 제리 폴웰 및 팻 로벗슨과 현실정치와는 거리를 두면서도 미국 정치의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던 마틴 루터 킹 2세를 끊임없이 비교한다. 그러면서 교회가 특정 이념이나 정당의 하수인 역할을 하기보다, 그런 것들로부터 자신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양당 혹은 다양한 세속적 정치이념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세력으로 기능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특정 이념의 눈으로 성경을 읽고, 자신들의 세속적 정치이념을 뒤틀린 신학적 해석으로 정당화하는 지독한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에 대한 정직한 독서를 바탕으로 세속적 정치이념을 예언자적 시각에서 비판하고, 세속적, 이기적 정권다툼에 함몰되어 있는 정치인들에게 보다 높은 도덕과 정치적 이상을 제시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종교인들이 직접 정권을 쟁취하려는 타락한 형태의 신정정치를 꿈꾸는 대신, 월리스처럼 정치적 중립성과 도덕적 우월성을 근거로, 정치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정치가 보다 성숙되고 온전한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짐 월리스를 읽어야 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끝으로, 한국 복음주의자들은 특정한 소수의 윤리적 이슈들에 집착하는 대신, 일관되고 폭넓은 기독교의 윤리적 책임을 주창하는 짐 월리스를 통해,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를 통합한 보다 거시적이고 통전적인 윤리관을 확립해야 한다. 그 동안 한국의 보수적 기독교는 반공, 자유민주주의, 친자본주의, 친미 등의 이념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왔다. 그러면서 통일과 평화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거나, 부정적 입장을 견지해 왔다. 비록 최근에 보수 기독교가 통일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으나, 이 문제에 있어서도 특정한 종교적 교리나 정치이념에 근거해서 접근함으로써 건강하고 합리적인 문제해결보다는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되고 있다. 또한 문화적, 사회적 차원에서는 제사 및 전통문화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일방적으로 고수해 왔고, 남녀평등, 양심적 병역거부, 그리고 동성애자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문제에 있어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를 고집해 왔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심도 있는 고민과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전통적 사고와 주장을 맹목적으로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개인윤리 면에서 음주와 흡연을 반대하고, 세속적 오락과 약물사용을 금지하고 있으나, 이런 문제들 배후에 존재하는 천민자본주의와 상업주의의 위협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런 문화적 흐름에 편승하여 자기세력 확장에 몰두하고 있다. 또한 암암리에 이런 타락한 문화를 구조화, 제도화시킴으로써, 이를 통해 사적 이득을 극대화하는 정치 및 경제세력들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의 기능을 전혀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낙태와 동성애 문제에 집착하는 종교적 우파를 향해, 빈곤·성차별·인종차별·전쟁과 테러리즘·환경문제 같은 거시적 문제도 교회가 담당해야 할 성서적·신학적 문제라고 주장하는 짐 월리스의 주장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월리스의 관점에서 볼 때, 기존의 종교적 우파는 종교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고, 개인윤리와 사회윤리 사이에 엄격한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신학의 범위를 축소하고, 교회의 역할을 제한하는 오류를 범해 왔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월리스는 ‘하나님의 정치’를 제안하면서, “우파와 좌파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윤리에 집착함으로써,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외면 혹은 왜곡해 온 종교적 우파의 오류를 극복하고, 또한 사회윤리에 과도히 편향됨으로써 개인윤리의 가치와 필요성을 과소평가했던 세속적 좌파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양자를 창조적으로 통합/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대안적 활동의 가능성을 자신의 저술활동과 강연, 그리고 구체적 행동을 통해 입증해 왔다. 그를 복음주의 좌파로 분류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간과하거나 편향되고 왜곡된 형태로 실행하고 있는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짐 월리스의 담대하고 일관된 사상과 행동에서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주-1) 한국 보수 기독교의 정치화 현상에 대해서는 김지방, <정치교회> (서울: 교양인, 2007)와 강인철,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서울: 중심, 2007)를 참조하시오.
(주-2) 짐 월리스의 베스트셀러 God’s Politics가 청림출판사에 의해 <하나님의 정치>란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짐 월리스의 초기 대표작인 The Call to Conversion이 IVP에 의해 <회심>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며, 짐 월리스의 최신작 The Great Awakening에 대한 판권을 살림출판사가 확보하고, 현재 출판을 준비 중이다. 가히, ‘월리스 신드롬’이라고 할 만하다.
(주-3) 짐 월리스의 생애와 사역에 대해서는 Jim Wallis, Revive Us Again: A Sojourner’s Story (Nashville: Abingdon Press, 1983); Randall Balmer, “Jim Wallis,” in Twentieth-Century Shapers of American Popular Religion. Ed. Charles H. Lippy (New York: Greenwood Press, 1989): 431~36; 양희송, “미국 정치가 주목하는 복음주의자, <소저너스>의 짐 월리스”, <복음과상황> (2007년 2월호) 등을 참고하시오.
(주-4) John C. Green, “Seeking a Place: Evangelical Protestants and Public Engagement in the Twentieth Century,” in Toward An Evangelical Public Policy. Ed. Ronald J. Sider and Diane Knippers (Grand Rapids, MI.: Baker Books, 2005), 30. 또한 http://en.wikipedia.org/wiki/Evangelical_left를 참조하시오
(주-5) 짐 월리스가 자신의 모델로 설정하고 있는 19세기 복음주의에 대한 탁월한 연구서로는 도널드 데이튼, <다시 보는 복음주의 유산> 배덕만 역 (서울: 요단출판사, 2003)이 있다.
(주-6) 복음주의 역사가인 베빙톤은 복음주의의 특징을 “회심주의, 행동주의, 십자가주의” 등으로 규정한다.
(주-7) 회심의 현대적 의미와 필요성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오늘날 교회는 회심을 강조하지만, 그 회심의 목적을 망각한 사람들과 기독교의 사회적 행동을 강조하지만 회심의 필요성을 망각한 사람들 사이에 분열되어 있다. 오늘날 회심자들은 역사에 대한 눈을 떠야 하며, 오늘날의 활동가들은 그들의 영혼이 회심하도록 해야 한다.” Jim Wallis, The Call to Conversion: Why Faith Is Always Personal but Never Private (San Francisco: Harper San Francisco, 1981), 9.
(주-8) Jim Wallis, The Great Awakening: Reviving Faith & Politics in a Post-Religious Right America (New York: HarperOne, 2008), 13. 대표적인 종교 우파 제리 폴웰은 월리스를 “히틀러와 같은 존재”라고 비난했다.
(주-9) Jim Wallis, The Soul of Politics: Beyond “Religious Right” and “Secular Left.” (San Diego: A Harvest Book, 1994), xiv.
(주-10) 미국 종교적 우파에 대해서, 배덕만 <미국 기독교 우파의 정치활동> (서울: 넷북스, 2007)을 참조하시오. 반면 종교적 우파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판서로는 Randall Balmer가 있다.
(주-11) Jim Wallis, The Great Awakening, 308.
(주-12) 2006년에 스위스 다보스에서 개최된 세계경제포럼에 참석한 후, 월리스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세계 불평등, 희망은 없는가?’ 부문의 연설에서 성경의 예언자들은 불평등이 (오늘날처럼) 사회적 문제가 되었을 때에 주저 없이 바로 일어났음을 설파했다. 그리고 ‘미국 정치에서의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또 다른 부문에 참석하여 연설했는데, 나의 연설을 들은 많은 유럽인들이 기독교 우파만이 미국의 유일한 기독교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짐 월리스, ‘다보스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 <복음과상황> (2007년 9월호)을 참조하시오.
(주-13) Jim Wallis, God’s Politics, xxiii.
(주-14) Ibid., 35. 심지어 월리스는 “하나님을 사적인 영역으로 제한하는 것은 20세기 미국 복음주의의 가장 심각한 이단이다”라고 선언했다.
(주-15) Jim Wallis, ‘새로 발표한 복음주의 성명서’, <복음과상황> (2008년 8월호)
(주-16) Jim Wallis, God’s Politics, 5 / 박지호, ‘정치와 종교가 제대로 입 맞추려면’, <복음과상황>(2007년 11월호)을 참조하시오.
(주-17) Jim Wallis, The Great Awakening, 212.
(주-18) Ibid., 223.
(주-19) Ibid., 224.
(주-20) 빈곤에 대한 월리스의 생각에 대해서는 God’s Politics, 209~40, The Call to Conversion, 35~78; The Soul of Politics, 59~85를 참조하시오.
(주-21) Jim Wallis, God’s Politics, 308.
(주-22) Ibid.
(주-23) 미국 흑인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사실적 묘사는 Jim Wallis, The Soul of Politics, 87~113에 상세히 논의되고 있다.
(주-24) Jim Wallis, God’s Politics, 314.
(주-25) Jim Wallis, God’s Politics, 314.
(주-26) Ibid.
(주-27) Jim Wallis, God’s Politics, 318
(주-28)  Ibid 320.
(주-29) Jim Wallis, The Call to Conversion, 86.
(주-30) Ibid.
(주-31) Jim Wallis, God’s Politics, 106.
(주-32) 전쟁과 평화에 대한 월리스의 입장은, Jim Wallis, God’s Politics, 87~208; The Call to Conversion, 79~110을 참조하시오.

배덕만 교수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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