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왕에게 말하였다.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너 유대 땅에 있는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통치자들 가운데 가장 작지 않다. 네게서 통치자가 나올 것이니, 그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일 것이다.>" (마태복음 2장 5절-6절)

<비틀즈>의 전설적인 주역이었던 존 레논의 노래 가운데 "이메진(Imagine)"이라는 제목의 곡이 있습니다. 그 가사 가운데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번역하자면,

"한번 상상해봐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평화롭게 사는 것을.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모두들 나를 꿈만 꾸는 몽상가라고 하겠지요. 그렇지만 나만 이런 꿈을 꾸는 것은 아니랍니다. 언젠가 당신도 우리들과 같은 마음을 품기를 바래요. 그러면 세상은 모두 하나가 되어 살게 될 겁니다."

반전, 평화, 민권 이런 단어들이 질풍노도와 같이 시대를 움직였던 60년대를 거쳐, 좀 차분해진 1971년 그가 이 노래를 발표하자 세계는 그의 노래를 깊이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열광했습니다. 서로를 적대시하는 국경이 사라지고, 종교를 내세운 분쟁이 끝나며 지구촌의 생명을 모두가 함께 나누어 가지고 서로 형제 자매가 되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자유를 노래한 그의 음성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치고 좌절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으로 다가와 주었던 것입니다.

1940년에 태어나 1980년, 정신이상자의 총에 맞아 마흔이라는 짧은 인생을 마쳐야 했던 존 레논의 말 가운데 그의 평생의 신념과 가치관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All we are saying, is give peace a chance" 우리말로 하자면 이렇게 되지요. "우리가 말하려는 바는, 평화에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다." 평화에게 기회가 돌아가기도 전에, 평화의 가치를 아예 묵살해버리는 세상에 대한 일깨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화에 기회를 주자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산하가 미국의 폭격으로 묵사발이 되고 있고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맑은 하늘에 벼락같이 내린 포탄에 맞아 생죽음을 당해야 하는 현실에서 존 레논의 노래가 더욱 가슴에 맴도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아침 식사를 하다가 온 가족이 멸절을 당한 뒤 간신히 살아남은 그 집의 어머니가 울부짖는 장면을 영국과 인도 언론이 보도했습니다. 미국 언론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 어머니는 폭격기 조종사의 얼굴을 꼭 한번 보았으면 좋겠다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가 도대체 누구 길래, 무슨 권리가 있다고 이런 불행을 자신의 가족에게 안기는 것이냐고 절규했던 것입니다.

이번 전쟁이 테러에 대한 응징이라고 하는데, 정작 싸움은 아프가니스탄과 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탈레반 정권이 테러 조직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이 이렇게 계속 희생을 당해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탈레반 정권은 매우 중세적 봉건성을 지닌 문제가 많은 체제입니다. 여성들에 대한 억압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미국에게 이렇게 공격을 받아도 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가령, 미국이 지원하는 사우디 아라비아는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는 소수 특권집단이 권력을 누리는 왕정체제이고, 터키는 소수민족 쿠르드족을 무참하게 탄압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들 나라에 대해서 미국은 아무런 비난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난번 테러 사건의 주범들로 밝혀진 사람들은 대부분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의 젊은 지식인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테러 준비를 했던 곳도 미국과 독일이었다는 사실도 파악되고 있다고 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사우디 아라비아에 대해서는 일체 말이 없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한 명도 관련되지 않았는데 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미국의 공습으로 죽어가야 하는지 실로 분노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간인의 희생은 전쟁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병원과 학교, 그리고 적십자 센타까지 파괴되고 있으나 "오발"이었다는 말 한마디로 끝나고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마을 전체가 폭격으로 파괴되어 그 희생이 막심했는데, 미 국방부는 테러 조직을 지원한 마을이기에 그런 결과를 당한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정녕 그렇다고 쳐도, 그 마을의 어린아이들은 무슨 책임을 지고 죽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누가 뭐라 해도 명백한 민간인 학살입니다. 6.25 한국전쟁 당시 우리도 이런 일을 겪었기에 더욱 마음이 통절해집니다. 꼭 이런 식이 아니면 테러에 대한 대응책이 달리 없었던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테러의 주범으로 미국에 의해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을 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법정에 세워 재판을 받게 하겠다고 한 아프가니스탄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부한 미국은 그래서 평화에 돌아갈 기회를 박탈해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세계는 지금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경제는 날이 갈수록 움츠러들고 있습니다. 전쟁은 모든 것을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만이 답인가

거듭 강조하거니와, 테러에 대한 비난이 전쟁을 정당화시킬 수 없습니다. 전쟁만이 테러를 막는 유일한 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만이 가장 분명한 해답이라고 주장하면서 세상 모두가 미국의 이러한 뜻에 그대로 따르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억하심정이 복받친다 해도 인간의 일에 있어서 테러가 답이 아니듯이, 전쟁 또한 답이 될 수 없습니다. 폭력으로 인간의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그것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뿐입니다. 이 전쟁은 결코 정당한 전쟁이 아닙니다. 정의로운 전쟁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전쟁을 절대로 편드시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화력을 가지고 임한다 해도 이미 지고 있는 전쟁입니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얻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부한 나라가 가난하고 황폐한 나라의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혹 얻는 승리라면, 그것은 치욕입니다. 아니 죄입니다. 그래서 정당하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를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테러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한이 풀리는 것도 아니며, 또 다른 테러를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책도 아닙니다.


탄저균 보다 더 무서운 영적 질병에 걸려 있는 미국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가장 우선적으로 앞세우며 생명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작은 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보다 큰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해결의 방안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전쟁은 테러와는 그 규모나 범위가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의 희생도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이렇게 무고한 사람들이 지난 몇 주간에 걸쳐 날마다 아무런 항변도 해보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 아무런 아픔이나 양심의 고뇌가 없이 지낸다면 그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전쟁이 진행되어 가면 갈수록 이 나라가 오늘날, 매우 심각한 정신적 혼미와 위기에 처해 있다고 더더욱 절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갑자기 당한 일을 생각하면 애초의 분노와 복수심이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솔직히 점점 더 포악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과 권리에 대한 배려의 여지가 자꾸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암살할 수 있는 권리를 미국 정부의 공식 기구가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체의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체포되거나 추방당한 아랍계 이민자들이 현재 1천 여명이 넘습니다. 미법무부의 공식적인 발표입니다. 그래서 민권단체들이 합동으로 미국 정부에게 이들의 신상과 현재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밝히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저는 이들의 이러한 인권운동에 대해서 미국의 양심이 살아있음을 보게 됩니다. 전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과 사태 속에서 저는 미국이 오늘날 백색 가루 탄저균 보다 더 무서운 영적 질병에 걸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와 능력을 세상의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쓰기보다는, 이들을 억누르고 짓밟는데 쓰고 있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힘을 내세워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의 행세를 해왔기에 작은 자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또는 냉혹했습니다.

나사렛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큰 나라가 세상의 작은 자들에게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이사야서 43장은 흔히들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읽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린 사람의 모습을 이사야서는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소리 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니,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하나님이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큰 소리로 요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 그 깊숙한 곳에 있는 상처를 조용히 어루만져 새살이 돋게 하고 절망의 자리에 희망의 등불을 진심을 다해 켜는 사람입니다. 그 일을 감당해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갈대를 꺾고 등불을 끄려는 힘이 그를 가로막고 나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의 기력이 그런 세상의 장애와 난관으로 약해지지 않을 것이며 아, 이거 안 되는 일이로구나 하고 낙심하고 주저앉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의와 생명의 질서를 세우는 일을 위해 자신의 몸과 영혼을 모두 바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쁨이 자신에게 능력이 되는 것을 믿는 이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기도 한 것을 아는 이들의 선택입니다. 그 기쁨이 모두에게 기쁨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순종이 이로써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종은 맹목적 굴종이 아니라, 엄청난 힘을 가진 용기를 우리 안에 길러줍니다. 이사야서 본문에도 나와있다시피 다른 누가 아니라 "하나님이 붙들어 주심"을 확신하는 것에서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이 있는 사람, 나라, 시대가 진실로 평안하며 진실로 자신 있으며 진실로 큰 몫을 감당하는 은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저도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절실하게 간구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진실로 '큰 자'

하여, 한 인간의 삶, 한 나라의 영혼, 한 시대의 정신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는 기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삶이, 그 나라가, 그 시대가 어떻게든 애를 쓰면서 사람을 살리려 들고, 저버려진 자가 없게 하며 사랑과 평화의 마음을 나누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인간사의 비극은 그만큼 사라지고 절망의 자리가 희망을 일으켜 세우는 현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를 내세우고, 대접받기만을 원하며 누리려고만 드는 사람은 자신이 정작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해야 할 일을 알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이 자신에게 해주지 않는 것만 불만으로 삼고, 힘이 생기면 상대를 함부로 짓밟기 일쑤이며 쉽게 오만해집니다. 작은 것을 멸시하며 큰 것을 숭상합니다. 사람의 진심을 알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의 편견과 단정을 확신하는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이 겪는 고통에 대해 진정으로 아파하지 않으며, 결정적으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니 만사가 힘으로 해결하려는 습성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기면 자신이 크다는 것이 입증될 줄로 압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가 진실로 <큰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마태복음 본문은 본래 미가서 5장을 인용한 대목입니다. 베들레헴이 비록 유대 땅에서 작은 고을이지만, 그 고을의 작음이 이제 그곳에서부터 역사 하실 하나님의 뜻이 작은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큰 나라의 기틀이 거기에서 시작함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그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일 것이다." 진정 큰 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먹이는 자"입니다. 그것이 백성들에게 평화가 됩니다. 마태복음 본문의 원본이 된 미가서는 "그는 그 백성들의 평화가 될 것이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거대한 통치 아래 놓여 있던 한 변방의 작은 땅 갈릴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사렛 예수의 삶이 결코 작지 아니한 것은 그의 삶 속에 인간의 생명을 먹이고 기르는 하늘의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힘이 있는가 없는가가 그의 존재가 진정 하나님 나라에서 큰 가, 작은 가를 결정합니다. 세상의 큰 자들이라고 위용을 부리는 이들은 백성들이 먹을 것을 가로채 자신의 배를 불리는데 온통 신경을 쏟는다면, 나사렛 예수는 자신의 삶 그 자체를 생명의 떡으로 내놓았던 것입니다. 그가 사람에게 다가가는 모습의 따뜻함, 그의 손길이 닿을 때 이루어지는 사랑의 감격, 그가 전하는 말씀이 사람들의 영혼에 하늘을 보게 하는 충격, 자신의 목숨을 온통 걸고 하늘의 생명이 우리들에게 주어지기를 간구한 희생,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힘이 되었고, 격려가 되었으며 생명의 출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지럽고 힘겨운 세상살이에서 희망의 근거를 발견할 수 없었던 이들의 가슴과 영혼에 뿌듯한 감사와 평안을 안겨다 주었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큰 나라, 곧 하나님 나라의 출발과 원천은 바로 이런 것에 있습니다. 그런 나라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의 삶은 그래서 그의 키와 그의 사회적 지위와 그의 명망이 어떠한가에 구애받지 않고 넓고 높고 광활합니다. 그 안에는 세상에서 허기지고 지친 생명이 들어설 자리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라도 더 많이 생겨나는 것이 하나님이 정작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만 가득 찬 작은 나라가 아무리 모여봐야 그것은 큰 나라가 되지 못합니다. 자기만 아는 소국의 분쟁으로 하루도 평화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미국이 진정 큰 나라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빕니다. 자기만 아는 작고 쫀쫀한 나라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 이 세상의 뭇 생명들을 먹이고 담아내는 하나님 나라의 크기와 높이로 변화되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속히 중지하고, 새로운 생명의 방식을 찾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진정으로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 아닙니까?


우리는 관객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이라는 나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들 자신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비록 이 세상에서 작은 민족이요, 작은 나라 출신의 백성들이지만 그 안에 큰 나라의 꿈을 기틀로 세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나사렛 예수의 영광을 찬양하고 그의 능력에 대한 증언을 듣고 돌아가는 관객을 만들어 내는 자리가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되는,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공이 되는, 그래서 그 자신의 삶 속에 세상의 생명에게 먹일 것이 있는 큰 나라가 들어서는 그런 일을 감당하려는 결단과 각오, 그리고 보람을 선택하고 체험하려는 자리입니다. 속히 유아기에서 벗어나 자라나야 합니다.

스승 예수께서 다 해주시겠지 하고 손 놓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사렛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믿음 없는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누가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남이 해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것입니다.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만 도우실 뿐이며, 정작 그 변화를 감당하고 체험해야 할 자는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큰 나라의 존재로 변화하는 것이, 예수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축복과 능력이 우리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큰 나라, 그 나라의 주역, 주체세력이 되라는 것, 그 큰 나라의 주도권을 쥐고 세상을 감당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비하면 자기 하나는 작다고 주눅들지 말고, 그 마음과 영혼에 그 엄청나게 커다란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은사와 축복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지니고 이 세상에 진정한 생명과 평화를 나누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길러주시며 생각지도 못했던 기쁨과 감격을 체험하도록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혼미한 시대에 우리들 모두의 마음에 이 하늘의 나라가 임하여 세상의 소문과 세상의 소란과 세상의 분쟁에 휘말리지 아니하고, 올곧게 세상의 희망과 축복의 원천이 되는 기쁨 누리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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