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봄날은 간다 포스터
봄날은 간다

"넌 나 사랑하니?"
"----------"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면, 누구나 한번 쯤 연인과의 사랑을 꿈꾸며 쓸쓸히 거리를 걷곤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남녀의 만남, 이별, 재회를 그린 영화 "봄날은 간다"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내 머리에 오랫동안 각인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고 온 후 버스 안에서 한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은수(이영애 역), 상우(유지태 역)의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남녀간의 온전한 사랑이 존재하는가?'에 깊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이 생각은 결국 '남녀의 온전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버렸다.

빡센 고등하교 생활을 마치고, 자유 넘치는 캠퍼스 생활을 하게 되면, 대학 새내기들의 지상과제는 연예다.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멋진 연애 생활을 꿈꾸며, 자신에 맞는 짝을 찾아 헤매고 다닌다. 각종 팅은 다해보면서, 연인을 찾고, 미친 듯이 사랑하고 별일 아닌 일로 헤어지고 만나는 것을 반복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함부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그 사랑 때문이라면, "뭐듯이 할 수 있다"는 자기 논리를 펼친다. "사랑하니깐..."의 대답은 그들의 방종과 무절제한 태도, 이기적인 욕망까지도 쉽게 합리화되곤 한다.

그러나,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는 그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이유에 큰 물음표를 던진다. 과연 '네가 사랑을 했느냐?' 과연 '네가 사랑이 뭔지를 아느냐?' 라고 질문하며, 남녀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상적인 일들을 절제된 영상으로 잔잔하게 펼쳐간다. 끝내는 그것에 대한 답을 주진 않지만, 상우와 은수가 결국엔 헤어짐을 통해서, 우리네 세상사에서 온전한 사랑이 펼쳐지기라 참으로 힘든다는 것을 암시적으로만 보여준다.

이는 허진호 감독도 앞서 필자가 던진 "사랑"이라는 화두에 명확한 답을 알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놀라울 정도 관객의 동의를 이끌어내고 있다. 뭐라고 쉽게 얘기하진 않지만, 그 속에 존재하는 정서가 많은 사람에게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은수가 상우의 순수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상우가 끝까지 은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 상우가 마지막에는 은수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등 그 속에 존재하는 사랑의 행태가 관객의 호응을 불러 일으켜 "봄날은 간다"가 명확한 내용이 없음에도 많은 이야기거리를 계속 만들어 내고 있다. .

1. 영화를 얘기하며....

▲은수와 상우가 만났다

필자가 지금부터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것도 허진호 감독과 같은 의도선상에 있다. 비록 내가 기독인의 입장에서 "우리는 이렇게 영화를 봐야한다고, 영화란 이런 것이다!"라고 명확하게 얘기할 순 없지만, 나의 목적 또한 이 글을 통해서 많은 그리스도인의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영화에 대한 많은 이야기거리를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크리스천들이 영화에 대해 얘기할 때, 불러일으킬 수 있는 논쟁의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 논쟁의 답은 너무나 미궁이라, 우리는 고민 자체를 시도하지 않을려고 한다. 그저 똑같이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방법으로 수동적으로 즐길 뿐이다- 이것은 영화를 포함한 모든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기독인은 상당히 방어적이다-. 리고 기독인은 영화가 점점 더 인본주의의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방관만 할 뿐이다. 결국엔 지금은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상황에 놓여 버렸다. 음악은 CCM이라는 나름대로의 대안이라도 있지만, 영화는 그런 기초 자체가 없다. '어떻게 영화를 봐야 하는지?', '어떻게 기독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답변은 커녕, 관심조차 없다. 결국 "21세기는 문화의 전쟁시대"다 뭐다 하면서, "문화사역"이라는 창세기 1장 26절의 "A great mission"이 강조되지만, 실제적인 변화의 소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필자는 그 기초를 세우고자, 지금의 글쓰기를 시작한다. 나라도, 뭐 잘난 것도 없지만, 같이 영화를 얘기하고 고민하고 기도한다면, 영화는 만들 순 없어도, 영화를 얘기하고 성경적으로 답할 수 있는 지성을 충분히 확장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것이 수수방관으로만 일삼는 크리스천들에게 문화에 관한 새로운 자극제가 되었으면 한다.


2. 영화란?

▲대숲의 소리를 듣고 있는 두 사람.

영화를 많이 보면서, 영화를 얘기하라면 쉽게 얘기하지 못한다. 그것은 영화 자체가 가진 복합적인 성격 때문이다. 영화는 모든 예술의 형태 -문학, 음악, 미술, 연극 등-가 다 들어가 있다. 이런 복합성 때문에 영화는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는다. 게다가 유사 매체인 TV와는 다르게 예술적 위상을 높이 평가받기 때문에 영화는 담론의 대상이 되고, 시대상을 조명할 수 있는 CONTEXT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화를 얘기할 때, TV와 동일한 "재미있어, 지루해" 또는 "배우가 멋있다"는 식의 감상적인 말하기를 지양해야 한다. 적어도 우리가 "세상문화를 정복하자"고 외치는 크리스천 지성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영화를 통해 현재 우리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문화를 뽑아내고 그것을 다시 성경적으로 재조명해야하는 시도가 있어야 겠다.

이런 면에서 필자는 개인적으로 영화 "거짓말"과 같이 소재적인 측면에서 반성경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를 보고 안보고"의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감독이 그런 내용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을 분별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성경적으로 답변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지는 능력, 이것이 우리에게 더욱더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영화를 비롯한 예술 매체를 대할 때 이분법적으로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되는" 식의 얘기를 많이 한다.

영화 작품이 하나가 완성되려면 우리 나라에서는 최소 10억이 들고 외국은 수백억을 호가한다. 보통사람들이 절대 만질 수 없는 돈이 영화에 투자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들이 투영된다. 제작에서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사고가 종합되어진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은 "무조건 안된다"고 얘기하기 이전에, "왜 이 시기는 이런 영화가 나올 수밖에 없는가?" "왜 저 감독은 저런 영화만 만들 수밖에 없는가?" "왜 저 영화가 흥행이 될 수밖에 없는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왜 저 사람은 이렇게 영화를 만들어야만 했는가?" "왜 감독은 주인공에게 저런 결말을 줄 수 없었는가?" 등 영화를 통해, 감상으로만 보이지 않던 수많은 것들을 질문하고 답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3. 봄날은 간다.

▲은수와 상우는 연인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를 가지고 이 얘기를 실제적으로 적용해보자. 영화 "봄날은 간다"를 단순한 멜로 영화로 생각하고 들어가면, 관객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당혹스럽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영상만 좀 수려했지,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란, 흥미를 끌만한 아무런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냥 덤덤하고 무척이나 사실적이다. 은수와 상우가 사랑을 맺는 기술 자체가 특별한 로맨스도 없고, 누구 말따라 "빨리 만나고, 빨리 자고, 빨리 헤어진다." 그리고 그 뿐이다. 오죽하면, 신문광고에서 이 영화를 "연인과는 절대 보지 말라고" 얘기했겠는가? 뭔가 결과가 찜찜하니깐 광고조차에서도 그렇게 얘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과연 "허진호"라는 사람은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평상 다른 로맨스보다는 찜찜한 평가를 받을 거라는 것을 몰랐을까? 그것은 분명하게 "아니다"이다. 분명 그러한 생각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감독의 입장에서 감안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감독은 그러한 반응을 통해서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이 바로, 의식있는 크리스천의 영화보기다. 단순히 자신이 기대했던 오락적 재미가 없다고 해서, 영화를 마구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작은 문제 제기를 통해서, 영화보기를 서서히 확장시켜나가 보자. "왜 제목이 봄날은 간다라고 했는지?", ."왜 주인공들의 직업이 '소리'에 관계된 일을 하는지?", "영화 속에서 소리를 모으는 작업이 어떻게 영화의 주제에 상관이 있는지" "왜 쓸데 없이 할머니의 얘기가 나와야 하는지" "은수와 상우의 사랑을 감독은 어떤 정서로 그려내고 있는지?" "영화 마지막 재회에 실패한 상우가 대밭 소리를 들으면서 미소 짓는 이유가 무엇인지?" 등 영화 전반에 흐르는 의문들을 나름대로 찾아보고 답을 해나가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자연스레 감독의 의도가 보이기 시작한다. 감독이 과연 이 영화를 만든 근본 생각이 무엇인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 감을 잡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그 때부터 우리는 감독이 그렇게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으로 타당한가를 살필 수 있다.

▲혼자된 상우는 보리밭 소리를 채득하며 사랑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행복하다.

"봄날은 간다"에서 허진호 감독은 우리네 사랑이 참 부질없는 거라고 얘기한다. 왜냐하면, 우리네 사랑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뜨거울 때 한창 뜨겁지만, 그런 폭풍이 지난 고요 속에서는 서로간의 오해와 이기적인 욕망이 존재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남녀간이 존재하는 온전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그려내지는 못하고 있다. 그냥 우리는 영화 속의 만남 이별 상처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만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감독의 이런 견해는 성경적으로 볼 때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성경 속에서 말하는 사랑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일시적인 감정에만 쉽게 몰입하는 관계를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감독과 일치하는 견해다. 그러나, 감독이 남녀간의 온전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에 견해는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사랑을 알게 되고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화 "봄날은 간다"를 보고 감독이 해결할 수 없는 참다운 사랑의 기술을 알릴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의 가치가 인본주의적인 가치보다 더 오묘하고 깊다는 것을 알릴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영화에 대해서 좀더 진지하게 접근하면, 우리 기독인들이 예전에 범한, 이원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지성적으로 말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영화에서 얘기하지 못한 예술적 해결을 우리 스스로 답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우리가 기독지성으로써 올바른 영화관을 정립하게 되고, 밀려오는 세상의 가치에 대한 분별력을 가지게 된다.

다음 시간에는 "영화는 예술이다"라는 명제를 가지고 좀 더 실제적인 영화 읽기에 들어가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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