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비극을 심화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모색해보면 최선의 방식은 계속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선택의 가능성을 두고도 폭력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에게
불행이 된다

미국의 대 테러 전쟁이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애초부터 '출구 없는 전쟁'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맞아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상태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9월11일 일어난 뉴욕·워싱턴 D.C. 테러 사건의 배후로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한 이후, 미국은 그와 그의 조직을 방어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공격 목표로 삼아 연일 폭격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오사마 빈 라덴 조직의 궤멸이나 탈레반 정권 붕괴와 교체 등의 시나리오가 제대로 이루어질 가능성은 현재로서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한정 장기전에 돌입할 경우, 세계 경제에 미칠 파괴적인 영향은 물론이요 미국내 여론의 향방도 장담할 수 없고 이슬람권의 반발이 강해질 경우, 미국으로서는 진퇴양난의 기로에 처하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민간인 희생자들이 늘어나면서 세계 여론도 미국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을 조짐이어서, 미국의 부시 정권으로서는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폭탄 안에 작은 폭탄들이 무수히 장치되어 있는 산탄식 투하를 특징으로 하는 '집산탄'에 의한 무차별한 민간인 희생이 증가하면서 미국의 전쟁 수행 방식이 세계 여론의 비판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기까지 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태는 미국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라 불리해지고 있는 양상이 예상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부시 정권은 만만치 않은 딜레마에 처해 있다.


미국의 아프간 공격, 성공할까

▲출동한 미 항공모합

테러 사건이 발생한 후 미국은 '보복 전쟁'을 즉각 선포했고, 미국내 여론은 이에 매우 적극적으로 화답했다. 아니, 화답이라기보다 도리어 앞장서서 강력한 보복과 응징의 행동을 요구했다.  전쟁이라는 대세는 자연스럽게 결정되다시피 했다. 과거의 경우, 왜 전쟁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리를 세우는 과정이 있었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럴 필요가 아예 없는, 전쟁에 대한 여론의 공감대가 순식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부시 정권은 이러한 여론의 분위기를 십분 활용하여, 전쟁 시스템의 강화에 즉각 나서게 되었다. 일부 반전평화운동의 전쟁중지 요구와 미국 외교 정책 자성론이 있기는 했으나, 전쟁을 해야 한다는 대세에 밀려 부시 정권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저지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때 이른바 신중론이 대두되긴 했으나 그것은 전쟁은 해야 한다는 결론을 전제로, 충분한 국제적 지지 기반을 확보한 후에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과정에서 전쟁은 다만 테러 척결만이 아니라 탈레반 정권 교체와 아프가니스탄 내부에 친미 정권을 근간으로 하는 신체제를 수립한다는 정치적 목적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전략의 대강이 마련되었다. 다시 말해서, 중앙아시아에 미국의 군사적·정치적 근거지를 확보하는 전략을 추진하는 목표가 세워진 것이다. '전선의 확대와 전쟁의 장기화'라는 전략적 기본 방향이 설정된 것도 바로 이러한 목표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이번 전쟁을 통해 테러 척결과 반 테러 연합 전선이라는 목적 외에도 실제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하는 지정학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순을 밟으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전쟁의 양상은 이로써 이제 미국과 테러 조직간 싸움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을 근거로 하는 이슬람권의 반미 전선과 이를 격파하려는 미국 간의 싸움으로 성격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군사적 근거지로 지원을 확보한 파키스탄 내부에서 반미 전선이 급속하게 형성되고, 1만명 가량의 파키스탄 부족들이 아프가니스탄으로 가 미국과의 전쟁에 나서고 있다는 소식은 이번 전쟁의 성격이 어떤 변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가 되고 있다.
  
▲아프간 평야지대
그런데 약 한 달간의 탐색전과 준비 과정을 거친 다음 마침내 결행된 전쟁의 양상이 미국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쪽으로 기울고, 내부적으로는 탄져균 사건까지 일어나면서 전쟁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서서히 힘을 얻고 있는 추세이다. 다시 말해서 전쟁의 방식으로 미국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도리어 미국에 대한 반감만 더욱 심화시켜 나갈 뿐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전쟁의 수행 과정에서 반미 전선은 날로 확대되어 가고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 고립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 이에 덧붙여 테러의 발생은 지난 50년간 미국의 대외 정책이 결과한 폭력이라는 점에서 미국 자신의 대외 정책에 근본적인 수정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리 또한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가령 미국의 중동정책이 팔레스타인을 억압해온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일관해옴으로써 이슬람권의 반발을 오래 전부터 사왔고, 중동지역 전반에 걸쳐 왕권 체제를 비롯하여 반민주적 체제를 지원하면서 미국의 패권을 확보해오는 동안에 이슬람권 내부에서는 미국에 대한 깊은 분노와 원한이 길러져 왔다는 역사적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뿌리를 짚지 않고, 테러 자체에만 눈을 돌리게 될 경우 사태의 악화만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실로 이러한 정세 인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 그러한가 하면, 폭력의 악순환만 가져올 뿐인 보복 전쟁의 수행 과정이 재검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환경이 확보되고 보장되는 여건 아래에서만이 이번 전쟁에 대한 보다 이성적이고 불편 부당한 평가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논리 자체가 신성시되고, 그밖에는 모두 테러를 옹호하는 것으로 몰릴 수 있는 분위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슬람권과의 전쟁으로 번지나

▲이스람권의 반미시위
사실 사건 초기, 보복 전쟁의 논리에 대한 비판은 테러를 정당화하는 주장처럼 오해되었고 무고한 인명의 희생이 있다고 해도 응징은 불가피하다는 대세론을 거스르면, 이는 반미(反美)적 또는 비애국적 논지로 받아들여졌다. 미국적인 것, 애국적인 것은 모두 전쟁을 지지하는 쪽으로 방향이 잡혀졌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미국의 전쟁 정책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여지는 존재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태가 그렇게 굴러가게 되면, 전쟁이야말로 테러를 방지하고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처럼 인식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전쟁 논리가 모든 여타의 논의와 관점을 압도적으로 억압해 버리는 것이다. 이는 안보를 위해서라면 민주적 권리도 포기하는 것은 당연하며 전쟁과 관련한 정부의 선택은 모두 옳다는 식의 상황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와 같은 획일적 논리와 대세는 과거 냉전 시기의 매카시즘적 분위기를 연상하게 한다.

1950년대 미국은 소련과 중국이라는 공산국가의 존재 앞에서 이들과 대결해야 한다는 미국의 냉전 정책에 대한 비판을 모두 비 미국인적 내지는 이적 행위로 낙인찍고, 정치적·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회오리바람에 사로잡혀 '지성의 암흑 시기'를 경험한 바 있다. 지금과 그때와는 물론 강도와 양태는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부시 정권의 전쟁 정책에 대한 비판이 미국 자체에 대한 비판과 반대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베트남전쟁 때에도 이러한 상황이 벌어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발견된 것은 정부의 논리를 비판하는 것이 곧 미국을 망하게 하고 비난하는 논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도리어 베트남전쟁 반대의 목소리는 미국이 더 이상의 수렁에 빠지는 것을 막았고, 미국 사회 내부에 매우 중요한 민주적 장치를 회복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미국의 전쟁 수행은 일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 자체가 가장 위험한 논리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유럽은 다음의 네 가지를 미국에게 지원 조건으로 내걸었다. 첫째 오사마 빈 라덴이 이번 테러의 배후라는 명확하고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할 것, 둘째 공격 목표를 정확히 한정해서 민간인 희생이 일어나지 않도록 보장할 것, 셋째 유엔의 지지를 받을 것, 넷째 이슬람권의 지지를 받을 것. 그런데 이 네 가지에서 첫 번째만 유럽이 증거로 인정한다고 했을 뿐(그것도 증거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나머지 세 가지는 사실상 전혀 충족되지 못한 상태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으로 이 세 가지를 제대로 풀지 못하면 이는 모두 미국의 전쟁 수행에 있어서 중대한 장애로 작용할 것이며, 사태를 매우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등장하게 됨을 뜻한다. 즉 민간인 희생은 지금 계속 늘고 있는 추세이며 이로써 미국의 전쟁 수행은 세계적 비난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유엔은 현재 공습 중단을 요구하고 있는데, 미국은 이를 거부하고 있어 유엔에서 이 문제가 논란이 되면 미국은 국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이슬람권의 지지는커녕 반발과 저항만 심화하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가 중대사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전쟁 추진 직전,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은 중동과 중앙아시아 이슬람권을 순방하면서 지원을 확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이집트마저 등을 돌린 상태에서 미국의 전쟁은 자칫 이슬람권 전체와의 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는 불씨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들은 모두 미국에게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으며, 전쟁의 전개 양상이 미국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전선을 확대하기 전에, 전선이 확대되어 사면에서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미국은 탄저균 문제로 2중의 전선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처해 있는데,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몇 개의 전선이 동시에 형성되어 미국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대응 능력에 차질을 가져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현재 탄저균 문제로 만들어진 2중의 전선에도 쩔쩔매다시피 하는 형편에서 이슬람권의 도전, 유엔에서의 문제 제기, 인권 평화단체의 반전평화운동과 미국의 공습에 대한 비난 등이 겹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반미냐 친미냐의 문제 수준이 아니라, 미국이 과연 어떤 미래를 향해 가려 하는가의 문제로 압축된다. 즉 테러 척결을 내세운 전쟁이나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세계의 무수한 나라, 민족, 종족과 척 지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인 자신에게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미국인이라는 점이 안전을 보장하기보다는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실로 무서운 일이며, 결국 미국의 안보 자체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전쟁이 미국의 안전을 확보하기보다는 도리어 그 반대가 될 수 있다는 역설에 대하여 미국은 새로운 인식을 해야 할 필요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 답은 간단하다. 첫째, 테러의 발생에 대한 근본적·역사적 성찰이 요구된다. 테러 행위에 대한 비난과 응징으로 테러의 재발이 저지되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 있다면 당연히 이 전쟁은 옹호되어야 하고 그로써 테러의 뿌리가 뽑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테러 행위가 반 생명적인 것 못지 않게, 그런 테러 행위에 최후의 기대를 걸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긴 이들의 삶에 가해진 반 생명적 폭력의 양상에도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유력 시사지 <르 몽드 디플로마띠끄>의 편집자 이그네시오 마로네의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테러의 대상이 된 미국인들은 무고하다. 테러 행위는 응징되어야 마땅하며 반드시 인류 사회에서 사라져야 한다. 마찬가지 이치로, 지난 세월 수많은 나라의 테러분자들을 지원하여 포악한 군사 정권을 세우고, 암살·납치·학살 등의 행위에 관여해온 미국 정부는 결코 무고하지 않다. 이 문제를 제대로 풀지 않고는 테러 문제는 근본적인 해결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둘째,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을 가져오고 있는 전쟁은 즉각 중지되어야 한다. 뉴욕과 워싱턴 D.C.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목숨과 다를 바 없이 이들의 생명도 귀중한 것이다. 테러 행위에 대한 분노는 다른 것이 아니다.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짓밟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같은 원칙으로 우리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전쟁에 대해서 분노해야 옳은 것이 아닌가?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고, 미국인의 목숨은 사람 목숨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셋째, 테러에 대한 국제적 해결을 위한 새로운 방식이 고안되어야 한다. 현재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은 증거가 있다면 오사마 빈 라덴을 법정에 세울 의향이 있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물론 탈레반은 이슬람권 법정이라고 제한했지만, 이는 재판의 공정성만 보장되면 조정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오사마 빈 라덴을 그토록 잡으려 하고 죽이기까지 하려는 판에, 힘들이지 않고 국제적 재판대에 그를 세워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처벌한다면 더 이상의 무고한 희생을 막고 테러 행위에 대한 준엄한 역사적·세기적 심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범행 증거가 여전히 공개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공정한 재판의 기회를 받게 하는 것 또한 정의이다. 미국은 이런 방식을 선택하는 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미국이 바꿔야 하는 새로운 인식 세 가지

2차대전이 끝나고 연합군은 뉘렌베르그에서 세계적인 전범 재판을 시행했다. 그로써 나치즘의 죄악은 세상에 구체적으로 폭로되었고, 전쟁 범죄는 응징되었다. 오늘날 세계는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에 노력하고 있다. 미국이 자신의 군사적 행동이 심판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로 반대하고 있는 국제형사재판소야말로 테러 행위에 대한 인류적 응징 체제이다. 인간의 비극을 심화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모색해보면 최선의 방식은 계속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선택의 가능성을 두고도 폭력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에게 불행이 된다. 부디 미국이 전쟁의 수렁에 더 이상 빠져들지 말고,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가치를 최대한 존중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나라가 되기를 빈다. 그것만이 미국 자신과 세계를 위해 남겨진 유일한 길이다.

김민웅 / 뉴저지 길벗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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