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서가 생활 속에서 공기처럼, 물처럼 녹아들어 가도록 해야 하는데 성서에 대한
권위를 교회 지도자들이 장악하고 일반 평신도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장벽을 치고
있는 것은 본래의 '말씀'의 취지에도 어긋난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성서는 <개역성경>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개역성경 개정판>과 <표준 새번역>은 역자들의 엄청난 수고와 노력, 그리고 그에 바친 세월의 가치에 비해 일부 소수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개역성경>의 번역에 신앙적 권위까지 부여하면서 여타 번역의 권위는 인정하고 있지 않는 현실은 재고되어야 한다. 번역본의 선택이야 읽는 사람의 자유이겠으나, 특정 번역본의 권위를 신성시하기까지 하는 것은 다른 번역본이 가진 장점과 의의를 무시하고, 그에 대한 일반 신도들의 접근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성서가 생활 속에서 공기처럼, 물처럼 녹아들어 가도록 해야 하는데 성서에 대한 권위를 교회 지도자들이 장악하고 일반 평신도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장벽을 치고 있는 것은 본래의 '말씀'의 취지에도 어긋난다.  

<개역성경 개정판>과 <표준 새번역>이 나오게 된 동기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번역상의 오류를 바로 잡고, 둘째 어문생활이 <개역성경> 번역 당시와는 많이 달라진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핵심적인 목적은 이 두 가지를 바탕으로, 성서가 일상의 삶 속에 친근하게 다가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어려운 한자어 투성이의 <개역성경>을 읽고 무슨 뜻인지 말 자체를 알 수 없다면 이것은 문제이다.

그러다 보니 성경은 잠자는데 좋은 책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판국이 아닌가? 읽기가 지루한 것이며, 그 개념을 우리말로 풀이하는 것 자체가 그만 성경공부가 되고 만다면 그것은 성서의 심오한 뜻을 캐어 들어가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한 페이지를 제대로 넘기기 어렵게 복잡한 어투로 번역된 책은 한자문화권의 영향에 있었던 기성세대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 되고 말 수 있다.

<개역성경>의 시대적 의미는 크다. 그러나 <개역성경>의 번역은 어디까지나 19세기적 어투라는 점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문(古文)이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오늘날 새롭게 자라나는 세대들에게는 성서가 외계의 문자처럼 취급받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말씀은 시대를 뛰어넘는다. 하지만 그 전달의 방식은 시대적 제약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삶이 위치하고 있는 시대적 문화적 현실과 접맥되지 않은 번역은 그래서 그 읽는 이의 마음과 영혼에 깊이 파고드는데 실패할 수 있다.

그래서 성서 번역은 시대에 맞게 계속되는 것이 옳다. 개신교의 출발을 생각해보면 이는 명확해진다. 라틴어로 된 성경만이 유일한 경전이요, 신성시되고 있던 상황에서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말씀을 그 말씀의 대상인 보통 사람들에게 돌려준 신앙적 쾌거였다. 지식인 계급만이 알아듣는 라틴어는 독일백성들에게 아무런 영적 감흥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마음에 다가가는 독일어로 성경이 쓰이고 읽히자 어떻게 되었는가? 세상이 변했던 것 아닌가?  

▲라틴어로 된 성경만이 유일한 경전이요, 신성시되고 있던 상황에서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말씀을 그 말씀의 대상인 보통 사람들에게 돌려준 신앙적 쾌거였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영국의 성서 번역사를 보아도 성서가 그 당시 언어에 밀착해서 번역되면서 영국의 기독교는 엄청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영국의 민주주의 발달은 이런 성경 번역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은 번역의 의미를 새롭게 새기게 한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번역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성서번역은 시대적 현실과 깊이 연결되어야 비로소 힘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역사의 폭발적 역량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가 그렇게 역사의 실질적인 힘을 갖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아닌가?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옵소서"는 바로 그런 기원의 요체이다.

'무교회주의자'라는 논란에 휩싸여 개신교 일부에서는 문제의 인물로 취급받고 있기는 하지만 김교신은 일찍이 성경의 새로운 번역이 갖는 중요성을 주목한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이렇게 그의 간절한 심사를 밝히고 있다. "원컨데 하루 바삐 신뢰할 만한 원의(原義)에 충실한 동시에 참으로 우리 글 다운 글로 씌어진 번역이 나오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초조한 마음 있을 뿐이다." '우리 글 다운 글로 씌어진 번역', 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제기인가?

그는 자기 집에서 기르고 있던 개 한 마리가 몇칠간 없어졌다가 돌아와 그 기쁨을 표현하는 고정을 처음에는 '다시 만난 기쁨'이라고 했다가 '다시 만난'이 좀 지루한 듯 하고 '기쁨'이라는 말도 그 당시의 심정을 정확히 표현하는데 어쩐지 약한 듯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회의 환희(再會의 歡喜)'라고 고쳐 보았더니 무언가 함축성이 있고 더 확실하게 감정이 들어맞는 듯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만난' 보다 '재회'를, '기쁨'보다 '환희'를 더 함축적이라고 보면서 우월한 표현이라고 여긴 것은 자신이 받아온 한문교육의 탓이 아닌가 반성해보았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감격을 우리말로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보다 나은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 성경의 번역 수준이라는 것이 이렇게 한문에다가 토씨만 한글로 해놓은 '再會의 歡喜'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만난 기쁨'도 '재회의 환희'를 그대로 우리말로 옮겨 놓은 것이지 어디 우리 삶과 가까이 하면서 나온 표현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번역의 시대적 수준을 이렇게 갈파한다. (1)'再會의 歡喜' 시대 (2)'다시 만난 기쁨' 시대 (3)'아이 반가와라' 시대. 그렇게 우리의 삶 속에 그대로 녹아드는 그런 말로 번역되는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성경은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평이하고 순수한 우리말이다. '아이 반가와라'라는 말이 손쉽게 튀어나오는 날에라야 개역의 일이 가망 있다. 그런즉 첫째로, 복음을 이해한 믿음, 둘째로 성서 원문 및 선진 수 개 국어를 참고할 외국어 실력, 셋째 무르녹은 우리말. 이것을 한 몸에 겸할 수 없거든 형제 서로 협조하여서라도 문명권의 수준까지 성서를 개역(改譯)하여야 할 것이다."

김교신이 한문화권에서 성장한 지식인임에도 이렇게 우리말로 된 성서의 보다 충실한 번역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오늘날 교회는 이런 정도의 관심이라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볼일이다.

<개역성경>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변화를 받은 장면에서 '직가'로 간다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곧은 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을 뜻한다. 직가가 한문으로 표현(直街)되어 있다면 그래도 낫겠지만 이래 가지고서야 정말이지 훈민정음에서처럼 '나랏 말쌈이 뒹국(中國)에 달라 서로 사맞지 아니 할 새'이다.  

<개역성경>은 한문투일뿐만 아니라 매우 권위주의적 어법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교회 내부에서도 교권적 권위주의를 기르는 토대가 될 수 있다. 목사들의 축도도 그 영향을 받아 '...축원하노라'체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데 이것은 축복하는 자의 위세를 높이는 말이 된다는 점에서 겸손치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이 대신하려는 듯한 느낌을 주어 문제가 있다. 당연히 '...축원합니다.' 또는 '...축원 드립니다'로 해야 한다. 이렇게 오늘날의 현실에서 재고해 봐야 할 바가 많은 <개역성경>의 번역이 갖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중요한 작업이다.  

물론 그렇다고 <개역성경 개정판>이나 <표준 새번역>이 다 시대적 한계를 넘어 가장 훌륭한 번역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가령 <개역성경>의 시편이나 잠언 등이 가지고 있는 운율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채 번역해버린 <표준 새번역>은 반성할 점이 있을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러한 운율적 효과도 충분히 염두에 두고 번역의 새로움을 시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개역성경 개정판>이나 <표준 새번역>이 오늘날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치열한 노력을 기울인 소산이라는 점에서 귀중하게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표준 새번역>의 경우, 누군가가 그것을 읽으면 들으면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말씀이 이루진 셈이다. <표준 새번역 개정판>이 곧 출간된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로, 번역에 대한 권위주의적 편견에서 해방되어 성경을 평신도의 마음과 영혼에 되돌려 주는 일을 보다 분명하게 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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