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니엘을 지날 때

▲[브니엘을 지날 때(창32:31)] 캔버스 위에 유화, 162X130.3, 1993

브니엘을 지날 때…. 창세기 32장 31절은 야곱이 지난 밤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여 이긴 뒤 환도뼈가 탈골된 채 맞은 새 아침의 풍경을 이렇게 시작한다.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야곱의 '지난 밤'은 두려움과 불안과 우울함으로 짙눌려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밤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나님과 대면한 그 밤이 지나고 환도뼈의 탈골로 인한 아픔조차 넉넉히 잊을 만한 주의 축복을 가슴에 품고 브니엘을 지날 그 때에, 바로 그 때에 해가 돋는다. 그 캄캄한 밤이 지나고 맞는 아침 햇살은 그만큼 더 눈부신 빛이었을 게다. 그 밤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그 아침의 환희는 무엇에 비할 바 없는 벅찬 감격이었을 게다.

신규인 화백의 유화 '브니엘을 지날 때'를 보고 있으면 어느 새 그 밤의 어둠이 휘몰아쳤다가 아침의 찬란한 햇살에 떠밀려가는 장관이 펼쳐진다. 거기 어둠의 시간을 빠져나온 야곱, 아니 세상의 수많은 야곱이 다리를 절며 그 찬란한 아침을 맞고 있다. 신 화백도 분명 그림 속의 야곱이었음에 틀림없다. 이 그림에 덧붙여 그는 고백한다.

"이 그림을 그리며 야곱의 어두운 뒷모습이 나의 모습으로 여러 번 동일시 되었다. 하나님 없이 세상밖에 모르던 나에게 찾아와 주셔서 내가 집착하던 모든 것을 깨뜨려 날려 버리시고 내 환도뼈를 꺾으시고 영의 눈을 뜨게해 준 그 은혜에 감격해 눈물도 흘렸다."


'신앙 반 야심 반'으로 떠난 전업화가의 길

▲자화상
1986년, 그러니까 서른 두 살 되던 그 해 미술교사직을 떠나 전업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화가로서의 앞길이 똑똑히 보였다. 자신감이기도 했고, 오만이기도 했다. 모든 시간을 작품활동에 쏟아서 화가로서 그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까지 서둘러 가고자 했다. 어설픈 신앙심도 한몫했다. 추상화를 접고 모두가 공감하기에 쉬운 사실화로 돌아설 때부터 신앙이란 변수가 따라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신앙 반 야심 반'이었다. 알고 보면 그 야합이 더 큰 악이었다. 야망조차 신앙으로 포장하려 했으니까. 많은 얼치기 예수쟁이들이 그러하듯 화가로 뜨기만 하면 하나님께 자신의 그림으로 영광을 돌리겠다고 기도했다.

곤두박질이 시작됐다. 공모전 낙선, 가까운 인간관계의 불화, 경제 파탄…, 뜨는 화가로 얻고자 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 둘 눈 앞에서 깨지고 나가 떨어졌다. 서른 셋, 그 푸른 젊음이 온통 시커먼 어둠으로 물들었다. 하나님은 몇 걸음 앞서 그의 걸음을 지켜보았을까? 그 어둠의 시간, 밤의 가운데에서 비로소 그 '욕망 반 신앙 반'으로 초조하게 울고 있는 자신을 만났다. 어느 교회에서 들은 설교가 단비처럼 작용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기에 시험조차 기뻐할 수 있다 했다. 또 시련이야말로 사람을 연단시켜 결국 주 앞에 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된다고 했다. 그 뒤로 성서의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알 수 없는 감동으로 몰아갔다. 그렇게 젖다보면 어느새 야심조차 희석되어 매력을 잃어갔다. 그렇게 씻기고 씻긴 몸으로 돌아본 자신은 날 것처럼 얼마나 가벼웠던지…, 자유란 곧 이런 것이라 몸으로 느끼고도 남았다.

바로 그 성경이 준 감동을 그림이란 표현방식을 빌어 세상에 드러내고 싶었다. 거기 '찬송화'라는 장르를 내걸었다. 이미 그런 표현방식들이 예술적 판단으로 보아 그리 후한 평을 얻지 못하는 현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상품성이 있어 수입을 생각하기는 더욱 난감했다. 그럼에도 그 외로운 자리에 서고 싶었던 까닭은 그 지적 화려함과 세련미로 둘러쳐진 벽 뒷쪽에서 온갖 거래들이 오가고 있음에 역겨웠고, 그럴수록 더욱 그 자리가 푸근했기 때문이다. 오의석 교수(대구효성가톨릭대)의 평처럼 "그는 기독교 미술의 역사를 보는 시각이 너무 선명해서 기독교 미술에 스며들어 있는 바벨론적 요소에 대해 정확히 지적하며 준엄한 판단을 내"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지난 기독교 미술사의 유산들이 지니고 있는 혼합적인 요소들과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결국 오늘을 사는 이웃의 신앙과 삶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 것"이 아닐까.


난 속에서 선택한 '기독교 미술'

▲[쉐마] 캔버스 위에 유화, 162X130.3, 1998

그 무렵 그는 도시를 떠나 시골로 거처를 옮겼다. 3남 1녀가 태어났고, 아이들 넷이 잠든 머리맡에서 아내와 가정예배를 드리는 기쁨도 누렸다. 제6회 대한민국기독교미술대전에서 우수상을 수상(작품 '쉐마')했고, 기독교미술이란 과목을 신학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햇살이 쨍 뜨고 '고생 끝 풍요 시작'을 알리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열렸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상을 받고 "부족한 자에게 용기를 잃지 않고 또한 교만하지도 않게 절묘한 상을 주셨다"고 말했다. 절묘한 소감이었다. 그에겐 언제나처럼 또 다른 고난이 파도처럼 쉼없이 몰려오고 거품처럼 사라져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더욱 살가운 하나님을 그의 몸 속에 쌓을 수 있었다. 그것을 놓고 은혜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1999년 제34회 기독교미술인협회전 도록에 적힌 그의 경력이 재미있다. 출신 대학과 대학원이 나오고, 곧장 "1986년 미술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기로 서원함"이란 우습기도 하고 거창하기도 한 경력(?) 한 줄이 뒤따른다. 또 몇 줄 작품활동이 나오고 현재 자신의 신분을 적기 전에 또 한 줄 특별한 문구가 들어 있다. "기독교 정신을 작품화하는 사역을 Life Vision으로 추구함." 누군가는 이런 그의 모습을 두고 "혹자는 너무 유별을 떠는 것 아니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의 용기가 좋다, 누군가 믿음은 곧 용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어쩌면 그런 조금은 낯 뜨거운 용기를 세련된 무엇으로 억눌러 왔던 것 같다. 세련된 지성이 순수한 용기를 이기는 수단은 언제나 말이거나 돈이거나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이거나 한 그런 것들이었다. 신 화백에겐 그런 것들이 없다. 그렇게도 가지려 했던 것들인데 지금도 없고, 이후에도 있을 것 같지 않다. 아마 이것을 두고 용기라 말한다면 그것도 야곱이 맞은 그 찬란한 아침 햇살의 눈부심으로 얻은 것일까?

▲[채색옷을 벗기고(창37:23)] 캔버스 위에 유화,
91X116.7, 2001


▲[닭 울 때(막14:72)] 캔버스 위에 유화,
53X130.3, 1991


▲[새벽예배], 53X65.2,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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