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영적 큰 스승인 시무언(是無言) 이용도 목사(1901-33)는 그의 일기장에 '나는 그 소리를 타고 주의 품에까지 날아갈 수 있다. 오- 음악의 신비여! 나는 그 속에서 나의 하느님을 찾는다'라고 적어 놓았다. 음악은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예술 보다 우리의 영혼을 그분께로 인도하게 하는 힘이 있다.  
  
현대신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서양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내가 이 다음에 천국에 가면 제일 먼저 모짜르트의 안부를 묻고 싶다. 그 다음에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마틴 루터, 칼빈의 안부를 묻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기의 신학적 스승보다도 한 음악가의 안부를 먼저 묻고 싶다는 칼 바르트의 말은 그가 얼마나 음악을 통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왔는지를 알 수 있다. 칼 바르트가 <로마서주석>을 쓸 때에는 언제나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었다고 한다. 현대 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보고, 교회를 말씀 위에 세우는데 커다란 신학적 공헌을 남긴 칼 바르트가 모짜르트의 음악을 통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용도 목사가 하나님을 찾았던 음악은 무엇인가. 주님의 품에까지 날아갈 수 있게 했던 그 소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칼 바르트가 그의 신학적 영감을 얻었던 모짜르트의 음악과는 다르다. 이용도 목사의 전집에 담겨있는 여러 장의 사진 중에 제일 눈에 띄는 것은 하얀 바지 저고리를 입고 마루에 앉아 가야금을 타고 있는 이용도 목사의 모습이다. 이용도 목사는 또 다른 그의 일기장에서 '나는 가야금 소리를 타고 하느님의 품에 안겼노라'"고 말했다. 이용도 목사는 음악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의 전통 악기로 연주하는 우리의 선율이요 우리의 가락을 통해서 말이다.
  
이용도 목사는 가야금을 통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경험을 했고, 칼 바르트는 서양음악의 아버지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신학적 영감을 얻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있을까. 하나도 없다. 한국 사람 이용도는 한국가락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갔고, 서양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서양가락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았을 뿐이다. 주님은 이 두 음악 중에 어느 것을 버리고 정죄하지 않으신다. 다만 우리 주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문화와 얼 속에서 함께 숨쉬기를 원하실 뿐이다.


한국적 교회? 미국적 교회?

서양 선교사들은 주님을 우리에게 전하매 있어서, 복음 그 자체만을 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을 이해하는데 도구로 쓰여졌던 자신의 문화까지도 마치 복음인양 절대화하여 우리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서양 신학자 하르낙(Adolf von Harnack)은 '양파껍질론'을 말한 적이 있다. 양파는 여러 껍질로 쌓여 있는 야채이다. 양파의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면 한가운데 양파의 핵이 나오는데, 그것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시요, 그분의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기독교를 전파해 준 선교사들은 바로 복음 그 자체, 즉 우리 주님 그리스도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덮고 있는 서양의 문화라는 껍질, 서양의 역사라는 껍질, 서양의 철학이라는 껍질, 서양의 신학이라는 껍질, 서양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라는 껍질, 서양의 제국주의적이며 침략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껍질까지도 마치 그것이 복음의 핵인 양 우리에게 전하였던 것이다. 이 여러 껍질들은 서양 신앙인들이 복음을 그들 나름대로 잘 이해하고 주님의 말씀을 잘 따르기 위한 그들의 도구일 뿐이지 그것이 복음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양파의 핵, 즉 복음의 본질만을 받아 드려 한국의 역사, 한국의 문화 예술, 한국의 건축, 한국의 철학, 한국의 가치관, 한국의 강산(江山)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보다 잘 주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고, 따라서 한국의 신앙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남과 북 감리교회로 갈라졌던 한국 감리교회가 1930년에 통합하면서 선언하였던 것은 '진정한 기독교회, 진정한 감리교회, 진정한 한국적 교회이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우리는 해방을 맞이하고 6.25를 겪으면서 철저하게 서구화되어 갔다. 경제, 문화, 정치, 종교까지도 서구화되어, 사회의 변화에 따라 교회도 초기의 선언을 잊고 철저하게 서구화되어 갔던 것이다. 찬송가는 물론이요 예배의 순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교회 건축과 성직자의 예복에까지 우리는 마치 서구라는 양파껍질이 복음의 본질임으로 일점일획도 벗어나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얼마 전 미국의 한 목사가 한국교회를 방문하고 떠나면서 한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 와 보니 국토는 한국이지만 그 땅 위에 세워진 문화와 의식은 내가 사는 미국을 그대로 심어 놓으려는 것 같아 실망스럽다. 더욱 나를 실망스킨 것은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그들이 부르는 찬송가, 예배의식, 교회 건축물 등은 우리와 다를 바 없다. 나는 한국적인 교회를 보기 위해 왔지만, 또 다른 미국교회를 본 것 같아 실망했다.'


주체의식이 없는 한국교회

예수께서는 주체의식 없는 인간을 개나 돼지로 비유한 바 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바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을까 염려하라'(마 7:6).
  
하나님께서는 자아의식이 없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가장 귀한 보물을 미친 사람에게 던져 주었다면, 사람들이 나를 보고 돌았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인 주체자인 온전한 사람에게 보내신 것이지 미치광이에게 보내신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혼란은 이 주체의식이 없는 개와 돼지에게 진주를 내어 맡긴 것과 같은 사정이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부자가 되고, 또 자기 자신의 구원과 복만을 간구하는 이기적인 신앙은 바로 말씀이 제대로 우리의 얼이 되어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주체의식, 역사의식의 결여, 다시 말하면 한국이라는 나의 자각이 없는 상태에서 복음을 받아 드린 탓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복음을 받기 위해서 자리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만 읽고 교회에만 가면 믿음이 저절로 일어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곡식의 씨만 가지고는 자라나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씨는 좋은 땅에 심어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과연 한국교회는 한국에 대하여 얼마나 알려고 노력했는가. 한국교회는 지난 200년 동안 우리 후손에게 물려진 한국 기독교 문화 예술이 있는가. 한국 찬송가 하나 제대로 만들지도 못하고, 교회건축은 모두 흉물스런 건물로 세워 놓고, 교회 안팎으로 서양교회 답습하기 바쁘지 않는가? 우리 한국에는 정말로 예술적 가치가 있는 성화 한 장만이라도 남긴 것이 있는가?


참 한국인으로 오시는 그리스도

이처럼 한국 그리스도인은 한국 문화를 버리고 서구 기독교문화를 수용하데 급급하여 한국적 기독교를 거부하지만, 놀랍게도 성령께서는 보이지 않게 지난 200여 년의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한국화, 곧 토착화를 이루시고 계시다. 토착화 신학자인 김광식 교수는 토착화를 한마디로 성령의 역사라고 말한다. 그는 말하기를 '토착화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토착화는 그리스도가 한국인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사건이다"라는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하면 토착화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토착화는 곧 '복음화'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한국인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거룩한 사건, 복음화, 구원화가 곧 토착화이다. 한국 그리스도인을 한국사람이 되게 하며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 그래서 참 한국인이며 참 그리스도인 되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토착화이다. 그런데 이 토착화는 사람이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복음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2000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성육신 사건이 바로 토착화 사건이다. 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심으로, 주님은 곧 사람의 언어, 문화, 관습, 역사 속에 거하셔야 했고, 그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셔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부터 시작된 기독교회는 로마제국과 서양의 역사, 문화, 종교 속에서 토착화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서구 기독교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서구 사람들이 그렇게 하려고 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 문화 속에서 당신의 모습을 잘 드러내기 위한 성령의 역사였던 것이다.
  
한국교회 신자들은 기독교인이 되고 난 후에도 전통문화와 전통종교의 유산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아간다. 교회의 장로, 집사제도로 나타나는 질서의식은 유교의 장유유서의 영향이요, 추도예배는 제사제도를 변형한 것이다. 돌과 회갑이나 고희예배 등은 유교전통의 영향이 크다. 새벽기도, 금식기도, 산기도 더 나아가서 백일기도 등은 기독교적이라기 보다 무교적인 현상들이 기독교적으로 수용된 것이다.
  
각 신자는 이러한 삶을 모순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형식상으로는 무당과 절과 제사를 거부했으나 그 내용은 기독교적으로 변형되고 수용되었다. 이것은 죄책으로서의 전통문화와 전통종교가 한국신자 개인의 영적 교회적 삶 속에서 의로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한국교회에 있어서 복음의 토착화가 전통문화와 전통종교의 칭의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광식 교수는 한국 개신교를 유불선 문화와 종교 위에 토착화된 제의 교회라고 말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의 받은 교회로서의 제4의 교회는 기독교적인 동시에 유불선적이다. 여기서 유불선 문화와 종교는 죄스러운 것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한국인들에게 새롭게 밝혀 주기 위하여, 서양의 문화 종교 전통만을 고집하지 않으시고, 한국의 고유한 문화 종교 전통을 버리지 않으시고, 정죄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곧 이 땅에 그리스도인에게 참 그리스도인은 참 한국인일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는 어떤 찬송들인가

한국 찬송가집은 1892년 감리교 선교사였던 존슨(George H. Jones)목사와 이화학당 교사였던 로드와일러(Louis G. Rothweiler)양이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펴낸 <찬미가>를 시작으로, 각 교단별 찬송가 작업을 거쳐 1949년 감.장.성 세 교단이 하나된 찬송가의 사용을 목적으로 <합동찬송가>를 발간하였다. 1967년에 '한국찬송가위원회'가 구성되어 <개편찬송가>가 탄생되었는데, 이 찬송가에는 한국 음악가들이 창작한 찬송가들이 27곡이나 포함되었지만 각 교단의 다른 이해 때문에 사용이 중단된 이후 1983년 12월에 <통일찬송가>의 출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서 부르고 있는 통일찬송가에 대하여 우리가락연구가 이천진 목사는 다음과 같이 분석해 놓았다.
  
세계 교회 연합회 추천곡이 75편, 미국 침례교회에서 찬송교육을 위해 추천한 곡이 55편, 독일찬송이 20편, 종교개혁 이전의 라틴찬송과 희랍 찬송이 14편, 미국의 복음성가는 무려 269편이나 되지만 한국찬송가는 17편에 불과하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79장 <피난처 있으니>는 영국 국가이고, 77장 <전능의 하나님>은 제정 러시아 국가 곡에 의역한 것이다. 245장 <시온성과 같은 교회>는 독일국가이다. 이 찬송가를 유럽의 다른 나라에 가서 부르면 큰일난다고 한다. 왜냐하면 나치가 독일 주변 국가를 점령할 때 부른 독일국가이기 때문에 그 노래만 들어도 악몽 같은 세계대전이 생각나서 그런다고 한다.
  
특히 388장 <마귀들과 싸울지라>는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불렀던 전투찬송가이다. 그래서 찬송가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가급적 이 찬송을 부르지 못하게 한다. 338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는 영국 오페라 작곡가 월리엄 쉴드(W. Shield)가 작곡한 민요이다. 그밖에 영국 민요는 545장 <하늘가는 밝은 길이>, 78장, 149장 173장 등이다. 미국 민요는 28장, 405장, 229장, 190장 등이며, 프랑스 민요는 125장, 160장, 520장 등이다. 그리고 캐롤송은 109장 110장 111장, 112장, 등 총 12편이다. 그밖에 독일 민요(14, 57, 309), 흑인 영가(136, 420, 518), 네덜란드 민요(32, 39, 517), 스페인 민요(29장), 아일란드 민요(533장), 웨일즈 민요(515장)등이 있다.

이들 찬송들은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는 노래였지만 콘트라팍투어(Kontrafaktur) 방식으로 찬송가가 된 노래들이다. 콘투라팍투어라는 말은 흔히 우리말로 '노가바'라는 말이다. 기존에 있는 노래에다 가사만 바꾸어 부르는 것들이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는 이렇게 외국의 국가, 민요, 영가, 대중가요 등의 가락에 찬송시를 붙여 만들 것들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러한 비기독교적인 가락에다 찬송시를 붙여 만든 찬송가들이 문제가 있다 없다를 떠나서 비기독교적인 음악조차도 하느님을 찬양하는 도구로 만들 줄 알았던 서양 사람들의 지혜와 열린 마음을 우리의 전통음악에도 적용시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왜 우리는 외국의 민요로 찬송가를 만들어 부르면서 우리 민요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왜 우리는 외국의 악기와 장단으로 찬송가를 부르면서 우리의 악기와 장단으로 찬송가를 만들어 부르기를 주저하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한국찬송가는 어느 나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찬양하는 찬송가인지를 의심하게 한다. 불러서 은혜로우면 된다고 하지만,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가 어떤 것들인지 알고도 은혜롭게 부를 수 있겠는가? 우리는 매일 예배시간에 남의 나라 국가를 부르고 있으며, 싸움터에 나가서 사람을 죽이도록 독려하는 전투가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민요는 천시하여 교회 안에서 정죄하면서 여러 외국의 민요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찬송인양 은혜에 차서 부른다. 이것은 얼마나 모순인가. 그리고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우리 가락, 우리 신앙고백
  
서양 찬송가의 가사와 가락에는 복음이외에 그 나라의 문화와 정신과 강요가 스며있다. 찬송가 가사가 아무리 은혜로워도 가락이 주는 정서적 영향은 크다. 우리가 매일 주일 예배 시에 습관처럼 부르는 찬송가 박자에 따라 우리의 의식과 성격이 바뀐다.
  
우리는 서양의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남을 고려치 않는 전진적이고 전투적인 신앙이 무의식적으로 형성됨을 보게 된다. 우리는 전도하러 갈 때도 행진곡을 부르며 전투에 나가는 용사가 된다. 그리고 이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앞만 보는 개인주의적 신앙관과 소위 로버트 슐러식의 적극적 신앙관 등이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가락에 의해서 형성되어 왔다. 이런 찬송가 가락이 주는 의식의 영향은 서양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맞을지 모르지만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왜곡된 신앙을 형성하게 한다.
  
우리 음악의 근본 원리는 '호흡'을 통한 가락으로 신명을 얻어서 천지인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가락은 사람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자연의 기운과 하늘의 울림을, 부르는 사람의 몸을 통한 호흡으로 나오는 것으로, 그것으로 하여 신명(神明), 즉 하sk님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 가락은 단순히 악보에 의지하지 않고, 또 악기에 의존하지 않으며, 부르는 사람을 중심에 놓지 않는다. 악기와 부르는 사람, 악보가 하나로 어울려져 새로운 기운을 창조해 내는 힘이 있다. 이 새로운 창조가 바로 종교적인 힘이요, 오늘 우리 그리스도교회가 회복해야할 요소이다.
  
우리 가락의 원리는 몸과 마음을 일원론적으로 보며 그것이 유기체적으로 하나가 되어 자연과도 하나가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할 때 신과의 합일의 경지인 신명이 나는 것이다. 우리 가락은 노래 부르는 사람 혼자 내버려두지 않고, 듣는 사람이나 자연이 하나가 되어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한다. 장구 가락을 보더라도 음양이 있어 이것이 서로 조화를 통해 막힌 것을 뚫고 끊어진 것을 이어주어, 하나님, 사람, 자연이 하나로 어울러지는 신명의 세계, 즉 새하늘과 새땅으로 나아가게 한다.
  
어디 찬송가의 가락만 그러하겠는가. 노랫말은 더욱 문제가 많다. 찬송가 가사는 성경에 근거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믿는 자들의 신앙 고백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는 17세기 말경의 경건주의 운동, 19세기에 형성되는 근본주의 신학에 근거한 찬송가 가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그대로 수용함으로 해서 역사적으로 우리의 삶과 현실과 동떨어져 있고 시간적으로 거리가 먼 서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을 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이 생동감 있게 변하지 않고, 실천적인 구원의 삶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어찌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낮고 천한 세상에 오시어 나눔, 섬김, 사귐의 삶을 살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지금도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계시는 성령님을 어찌 단선적이고, 비좁은 서양의 근본주의 신학 안에만 가둘 수 있겠는가.
  
우리가 지금 부르는 찬송가는 그리스도 예수의 세상을 향한 의로운 역사와 자연과 우주 만물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은총과, 그리고 민족의 역사 속에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자의 삶이 결여된 일방적인 찬송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우리는 한국 그리스도인들로서 한국 땅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명이 무엇이며, 그 사명을 지켜 나가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찌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성도의 결단과 삶이 담겨 있는 찬송가가 단 한편도 없다는 것에 울분을 토할 수밖에 없다.
  
교회는 나라를 빼앗긴 조선 말에 들어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의 독립과 구원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민족분단이라는 아픔을 겪고 있지만, 우리 찬송가는 민족의 통일과 구원을 위한 찬송은 한 절도 없이 여전히 외국 민요 가락에 맞추어 우리 자신의 구원과 축복을 받기만을 간절히 부르짖고 있다.
  
나라는 갈라지고, 하나님의 백성은 헐벗어 있는데, 우리는 안락한 교회 의자에 앉아 나 자신의 축복과 서양 신앙인들의 고백을 앵무새처럼 찬송할 것인가, 아니면 강도 만난 민족과 강도 만난 사람을 돌봐주는 선한 이웃이 되고자 결단하는 청지기의 찬송가를 부를 것인가. 전자의 찬송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며 후자의 찬송만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의 찬송가가 너무 개인주의적 신앙만을 담고 그리스도인의 의롭고 구원적인 삶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어느 사람보다도 구체적인 하느님의 역사 속에서 책임적으로 응답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예배와 찬송이 바뀌어야 우리 신앙이 살아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절대 진리이지만, 우리가 고백하여 부르는 찬송가는 시대에 따라서 역사와 문화의 토양 속에서 언제나 새롭게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역사를 말할 때, 말씀과 진리 같은 절대 개념에 사(史)자를 붙이지 않는다. 그러나 교리사(敎理史), 교회사(敎會史)와 같이 우리가 사(史)를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끊임없이 그 시대와 역사에 따라 변하여 말씀과 진리를 새롭게 해석하고 실천하도록 한다. 교리와 교회는 그 시대의 신앙인들을 구원으로 바르게 인도할 힘이 없고, 타락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변해야 한다. 교회와 교리도 변하는데, 하물며 교회 안에서 부르는 찬송가를 말씀처럼 성경처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가치로 신봉해서는 안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자기는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한 사람이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을 얻고자 함이고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얻고자 함이며,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 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기독교회는 많은 한국민족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바울 사도처럼 서구 기독교의 여러 가지 모양, 다시 말하면 복음을 쌓고 있는 양파껍질들을 벗겨내어 버려야 한다. 내가 내 모양을 버린다고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버리는 것은 아니며, 내가 내 모습을 포기한다고 해서 주님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기독교가 서구기독교의 모양을 버린다고 하느님이 한국 땅을 떠나는 것은 아니며, 한국교회가 서구교회의 찬송과 의식을 포기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한국교회를 포기하시지는 않는다.

한국교회는 바울 사도처럼 이 땅의 많은 한국백성들을 얻기 위해 서구기독교의 의 모양을 버리고 한국의 문화, 역사, 철학, 예술의 모양이 되어 한국적 기독교를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교회가 한국인의 모양을 취하는 것만이 한국 땅을 구원할 수 있으며, 이 땅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얻을 수 있으며, 이 한반도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한국 그리스도인이여, 너희들의 가락과 고백으로 나를 찬양해 다오
  
놀라운 일어났다. 미국 장로교 찬송가 346장은 한국의 민요인 아리랑(ARIRANG)이다. 이것은 우리의 모양을 서양 사람들이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더 풍성한 열매를 얻기 위해 우리의 모양을 취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다.
  
미 장로교의 이 찬송가는 우리 민요 아리랑에 골로새서 1장 15-18절까지의 말씀을 시로 지어 찬송가로 만든 곡이다. 이 찬송가를 대한성서공회에서 일하시는 민영진 박사가 번역한 것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절)주님은 하나님 형상이시오.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시라.
     부활하시어 다스리시니. 주님은 교회의 머리시라.
(2절)주님과 더불어 새로 태어나 성령님 모시고 살아가니.
     성령열매 풍성히 맺어 주님 다시 오실 때 반겨 맞으리.
(3절)주님의 지체된 우리 몸이 생명의 말씀을 먹고사니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주님이름 높이며 살렵니다.


은혜로운 성경의 말씀을 찬송시로 지어 우리 가락에 맞추어 찬송가를 만들어 부르니 부를만 하지 않는가. 외국 민요 가락에 따라 찬송을 부를 때 보다 더 흥겨움이, 신명이 일어나지 않는가. 외국 그리스도인들도 우리 가락으로 흥겨움에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우리는 왜 못하는가.

우리는 지금 외국 찬송가를 배척하자는 것만도 아니며, 또 우리 가락만을 고집하자는 것만도 아니다. 한국사람으로서 하나님께 가장 잘 찬양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한국의 흥겹고 신명난 가락에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고백되어지는 찬송가 가사를 붙여 우리가 부른다면 우리의 신앙은 더욱 풍성해지고, 우리의 삶 속에서 더 많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남의 나라 민요를 찬송가로 부르면서 우리는 왜 우리 가락, 우리 악기에 맞추어 찬송가로 부를 수 없는가. 이것을 보시고도 하나님은 뭐라 말씀하실까?
  
'한국 그리스도인이여, 이제 너희들의 가락과 삶의 고백으로 나를 찬양해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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