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여호와의 율법은 영혼을 소성케 하고 지혜롭게 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눈을 밝게 하도다...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편 19편 부분발췌).

시편 19편은 같은 시인이 썼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주제, 감정, 언어가 아주 다른 두 개의 독립된 노래로 구성되어 있다. 1-6절은 시인의 심오한 상상력에서 솟아난 웅장한 언어로 자연을 노래한다. 7-14절은 그 주제가 율법이고 그 사상과 언어는 소박한 단순성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다른 시들이 어떻게 해서 하나의 시로 결합되었을까?


단절과 비약의 의미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 시의 앞 부분에서 시인은 웅장한 언어로 자연을 노래한다고 했는데,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솜씨를 알려 주는 자연이다. 즉 창조물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는 자연이다. 이때  이 자연은 단순한 사물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어떤 것, 즉 초월의 통로인 성사(聖事, 싸크라멘뜸)가 된다. 그런데 시인은 '성사적' 자연에 대해 노래하다가 갑자기 율법을 예찬하는 것이다. "율법은 영혼을 소성케 하고, 지혜롭게 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하고, 영원까지 이르고,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언뜻 보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자연에 대한 찬미와 율법예찬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연관성이 없다. 단절과 비약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단절 또는 비약을 통해 시인이 뜻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그러한 단절과 비약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관통하는 어떤 통일된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물론 이 시는 두개의 독립된 시가 임의적으로 결합된 것이므로 예의 그 단절이나 비약 속에서 어떤 의미연관을 찾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요 무리한 비약이라 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독립된 두 개의 시를 오늘의 형태로 만든 후대의 편집자가 단순한 수집가가 아니라 일종의 신학적 성찰을 할 수 있었던 시인이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즉 편집자의 신학적 상상력 속에서 어떤 의미연관을 갖지 못하면서 서로 다른 주제를 담고 있는 시를 시인이 아무 생각없이 하나로 엮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성사적 자연에 대해 노래하다가 느닷없이 율법예찬으로 비약하는 것 사이에는 필연적인 어떤 의미연관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겉 우주와 속 우주의 통일

그 내적 필연성을 감지할 수 있는 지름길은 이 시가 우주를 '그 총체성에서(!)' 파악하려고 한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하나의 존재가 존재이기 위해서는 표면과 이면, 안과 밖, 겉과 속을 동시에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이 시는 외적 우주와 내적 우주를 동시에 파악하려고 한다는 사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외적 우주와 내적 우주를 동시에 파악함으로써 비로소 우주를 온전하게!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 시는 외적 우주, 하늘과 궁창과 낮과 밤의 세계, 그리고 삼라만상을 속속들이 비추고 있는 태양의 세계를 노래하다가 갑자기 아무런 논리적 의미연관 없이 율법예찬으로 비약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다만 외적 우주를 명상하다가 돌연 내적 우주에 대한 성찰로 돌아서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것은 논리의 모순도 단절도 비약도 아니다. 우주를 총체성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마음의 지당한 움직임이다.
  
이 시의 뒷부분이 내적 우주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율법예찬(7-11절) 바로 다음에 나오는 세 개의 간구를 통해 금방 드러난다.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소서!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12b~13a)" 이 세 개의 기도와 내적 우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내 생각에 여기서 '내적 우주'에 대한 통찰을 주는 말은 '숨은 허물'과 '고범죄'라는 말이다.
  
그러면 이 두 말이 어떤 말이길래 내적 우주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는 것일까? 이 두 말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과 관련된 죄를 통칭함으로써 인간의 내면의 세계를 한꺼번에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숨은 허물'은 무의식의 세계와 관계된 죄를, '고범죄' 즉 부러 지은 죄는 의식의 세계와 관계된 죄를 각각 나타낸다. 비록 프로이트나 융 따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간의 내면의 세계가 의식할 수 있는 영역과 그렇지 못한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통찰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이것을 프로이트는 의식과 무의식으로 명명하였고, 무의식이야말로 인간의 꿈과 사고와 행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심층심리학의 어휘를 빌어 숨은 허물과 고범죄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위의 세개의 간구를 살펴보면, 이 기도는 결국 의식과 무의식을 아우른 인간의 내면의 세계(우주)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고 보아 결코 어거지가 아닌 것이다.
  
아무려나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외적 우주에 대해 말하다가 갑자기 내적 우주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고, 한낱 사물에 불과한 외적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음에 비추어 존귀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의 내적 세계의 실상을 어떠한가, 하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인들에게 있어서 외적 세계를 통하여 내적 세계로 몰입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를테면 '구름이 흘러가네 / 마음 따라 흐르네' 따위.

따라서 시편 19편의 시인이 자연계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명상하다가 내면의 세계로 눈을 돌리고 그 세계의 실상에 눈을 뜨는 것 역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니, 그것은 필요하기까지 하다. 왜? 그래야만 우주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고, 실상을 제대로 알 수 있고, 우주의 총체적인 치유/구원에 대해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속 우주의 형편없음이라니!

▲ⓒ뉴스앤조이 김승범
우리는 때때로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다가 자신의 실상을 갑자기 깨닫는 때가 있다. 대개의 경우 '비교'란 우리의 삶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지만. 욕심으로 들끓게 하면서 우리를 무한경쟁으로 내모는 경우의 비교가 그렇다. 이러한 비교는 경쟁 '적대감' 증오의 수순을 밟아 결국은 파멸에 이르게 하는 비교이다. 그러나 유익한 비교도 있다.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인도하는 비교가 그런 경우다. 변변한 집 한 칸 없으면서도 굶주리는 북한 동포를 돕기 위해 그 동안 저축해 둔 돈 몽땅 턴다든지, 결혼 반지 선뜻 내놓는다든지,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숙연해 진다. 그 숙연함 속에서 우리는 삶의 태도를 진지하게 반성하는 것이다. 무한 경쟁으로 치닫게 하는 비교는 마귀의 장난이지만, 자기 성찰로 이끄는 비교는 아무리 많이 하여도 무방하다.

오늘의 시인에게 있어서 비교의 대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외적 우주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나타낸다. 사람처럼 언어가 없어도, 사람처럼 말을 하지 못해도,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하나님 지식을 전한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지만 그 소리는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은 세계 끝까지 이른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상념이 꼬리를 문다. '나는 어떤가? 언어도 말도 없는 우주가 이러한데,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그 잘난 인간 나는 어떤가?' 하찮은 피조물의 세계가 해내고 있는 거룩한 일의 어마어마한 광채에 앞이 캄캄해지면서 갑자기 자신의 실상에 시선이 미친다. 내적 우주를 볼 수 있는 눈을 뜨기 시작한다. 내적 우주, 의식과 무의식을 아우른 자신의 내면의 세계, 어쩌면 외적 우주가 광활무한한 것보다 더 무한광활한 내면의 우주를 바라보면서, 그 광활무한한 우주를 덮은 어둠과 추함의 무한광활함을 보기 시작하면서 시인은 탄식한다.
  
아아, 나의 형편없음이라니! 그것도 모르면서 뻐기며 살아온 나의 천연덕스러움이라니! 그러한 꼴불견을 보면서도 참고 계셨을 하나님의 안타까움이라니! 그래서 절규한다. '자기의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12절)' 그렇게도 몰랐구나! 그렇게도 둔했구나! 그렇게도 어리석었구나! 저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동안 나는 온갖 죄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었으니! 의식이고 무의식이고 할 것 없이 온갖 죄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으니! 바깥 우주가 낮밤으로 하나님의 지식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하고 있는 동안 내 속 우주는 고범죄와 숨은 허물이 엎치락 뒤치락하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으니! 그러면서도 말할 줄 안다고, 그러면서도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고, 이성적인 존재라고, 호모 사피엔스라고 힘주었으니! 아아, 이 민망함이라니!
  
그래서 시인은 부르짖는다.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소서,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래야 내가 정직하여져서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오, 주여,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나의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또 하나의 비약

고범죄든 마음에 숨은 죄든, 죄가 자신을 주장치 못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다가 갑자기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4절)' 하는 시인의 부르짖음 속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비약을 발견한다. 고범죄와 숨은 허물로부터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으로의 비약, 아니 단절! 왜 그랬을까?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께 받아들여지는 것과 숨은 고범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입의 말'은 우리의 의식과 관계된 것이요, '마음의 생각'은 무의식과 관계된 것이라는 암시를 우리가 무시하지 않는다면, '고범죄'와 '입의 말', 그리고 '숨은 허물'과 '마음의 생각' 사이에는 치밀한 논리적 통일성이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열납하실만한 말과 생각을 하는 것 만큼 우리를 죄의 지배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우리의 말을 정화시키고 우리의 생각을 깨끗히 하는 것 만큼 우리를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을 통제하는 만큼 우리의 못된 행실을 통제할 수 있는 길이 또 있을까? 우리의 입(의식)뿐만아니라 우리의 마음(무의식)을 투명하게 하는 것 만큼 우리의 내적 우주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게 하는 일이 또 있을까?
  
시인의 생각을 정리하자. 시인은 자연계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하나님의 솜씨를 나타내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마음의 하늘도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마음의 궁창도 하나님의 솜씨를 증거하기를 바란다. 즉 외적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 만큼 자신의 내적 세계도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내적 우주와 외적 우주가 하나로 어우러져 찬양하는 그 심오한 일체감 속에 머물기를 바란다.
  
어떻게 하면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 시인이 발견한 것이 바로 '입의 말 과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께 받아들여진다는 것이야 말로 마음에 숨은 죄와 고범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않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의식 뿐 아니라 무의식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게 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때 비로소 이 시인의 마음의 하늘, 곧 시인의 내적 우주는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수 있는 것이고,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는 외적 우주와 함께 시인은 '충만한 일체감' 속에 머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이 송이꿀보다 더 단 이유

이제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 있다.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될 수 있는 경지, 바로 그곳에서 우리가, 외적 우주와 내적 우주의 '충만한 일체감'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는 것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시인의 해답이 바로 율법(?)이다. 사족 하나 달자면, 율법을 '오직 믿음'과 '율법의 행위'를 대조시키면서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바울의 용법으로 읽어서는 안된다. 율법과 동의어로 쓰인 '증거, 교훈, 계명, 도'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삶의 진리를 말한다. 즉 진리만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을 주께 열납되는 경지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진리만이 우리를 마음에 숨은 죄와 고범죄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고, 진리가 우리를 주장할 때, 죄는 더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고, 그리고 바로 이때, 외적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듯, 우리의 마음의 하늘도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바깥 궁창이 하나님의 일을 증거하듯 우리의 마음의 궁창도 하나님의 일을 증거할 것이라고. '충만한 일체감'은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하여, 진리를 말하고 묵상해야 한다. 진리가 의식에서 맴돌 뿐 아니라, 마음 속까지 스며들어야 한다. 세포 하나 하나에까지 침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야 하고, 지혜로워져야 하고, 마음은 기쁨으로 넘쳐야 하고, 눈은 밝아 선악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고, 우리는 영원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진리(율법)를 예찬할 수 밖에! 그 율법의 진리를 정금보다 더 사모할 밖에! 송이꿀보다 더 달게 여길 밖에!

가을이다. 그 동안 우리의 입과 마음에 침입한 불순한 것들을 씻어내자. 고범죄와 마음에 숨은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자. 그러기 위하여 진리를 묵상하자. 진리가 내속에 스며들게 하자. 그럼으로써 내 속 우주의 질서를 회복하자. 내적인 질서를 회복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게 하고, 마음의 궁창이 하나님의 솜씨를 나타내게 하자. 안쪽 하늘과 바깥쪽 하늘이 한 데 뒤엉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저 '충만한 일체감' 속에 머무는 삶을 살도록 하자.
  
시편 19편이 담고 있는 외적 우주와 내적 우주의 저 총체적인 어우러짐, 그 충만한 일체감, 웅장함, 장엄함, 광활함, 심오함 등을 나의 짧은 언어로는  더 이상 담아내지 못하겠다. 이제까지 설명하기 위해 동원한 모든 어설픈 어휘들, 짧은 사상들 다 잊어버리자. 깊은 명상 속에서 시인과 함께 그저 이렇게 기도하자. "내 하나님이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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