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 할머님 중에 '상길 할머니'라고 계십니다(막내 아드님 이선우 성도님의 장남인 '상길'이의 이름을 붙여 부른답니다. 본명은 '김복순'입니다). 우리 마을 금란서원에서 황혼기를 보내셨던 故 김옥길 선생님과 한 동갑, 여든 한 생을 살아오신 연세시지만 마을에서는 아직 '호랭이 할머니'로 불릴 정도로 어느 누구에게도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음 바탕 자체가 진한 정으로 가득차 넘치는 분이시라 역시 그 누구에게라도 품은 정을 보태주는 것을 잊지 않는 분이십니다.

아내가 둘째 아기의 출산으로 친정에 가 있는 동안에 식때가 되면 어김없이 교회 문을 삐그덕 열고 고개를 빠꼼 내미시면서 다소 억센 말투로 '밥 자셨소? 않자셨으면 우리 집에 와서 한술 자시든지?'하십니다. 단 한끼도 지나치는 법이 없었답니다. "할머니, 저 혼자서도 잘 차려 먹어요"라며 극구 마다했지만 할머니는 막무가내셨고, 계속되는 저의 고집도 만만치 않자, 할머님은 동네 사람들에게 '교회양반' 끼니 거르게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셔서, 그 후로는 동네 이집 저집에서 준비한 밥상 받아 먹느라 다리품 깨나 팔아대는 행복한 나날이었답니다.

한국의 여행가인 '바람의 딸, 한비야'가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에 이어서 출간한 <바람의 딸, 한국에 서다>에서 이곳 문경새재를 지나 우리 마을 고사리에 왔을 때 바로 우리 김복순 할머님을 만난 일을 맛깔나게 적었습니다. 한비야가 할머님댁에 하루 머물고 가면서 나눈 대화는 우리 할머님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귀한 보화가 숨겨져 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글 속에서도 드러나듯이 우리 할머님들은 온갖 역경을 겪으며 살아오는 동안에도 이 세상은 저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사는 세상임을 잊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경계를 짓지 않고 더불어 사는 삶! 살맛나는 세상의 가장 큰 가치이겠지요.

계란형의 미인 할머니가 앞마당 수돗가에서 묵은 김치를 씻고 있다가 내가 인사를 하니 받는 둥 마는 둥하면서 물에 씻은 김치를 한 가닥 건네주신다.
  
"지져 먹으면 맛있겠지?"

마치 나를 잘 아시는 것처럼.

이 자그마한 할머니. 한창 때는 예쁘다는 소리 꽤나 들으셨겠다. 목소리도 크고 몸가짐도 씩씩하시다. 방에 들어가서는 더 깜짝 놀랐다. 혼자 사는 할머니가 어찌나 깔끔하신지 이불이며 옷이며 방바닥이며 부엌이 손님이 올 줄 알고 미리 대청소라도 한 것 같다.

대충 씻고 들어가 얼굴에 로션을 바르고 있으니까 할머니가 내가 떨어뜨린 머리카락을 주워 모으시며 한마디 하신다.

    "따듬기는 지랄나게 따듬으면서 시집은 왜 안가?"

    "할머니는 시집 가니까 좋으셨어요?"
  
슬쩍 물으니, 이제 바야흐로 이야기 보따리가 솔솔 풀릴 태세다.
    
    "아, 그때야 좋은지 뭔지 모르고 다 가야 하는 거니까 갔지."
  
친정 아버지가 '술밑에(술 마신 김에)' 사주단자를 받아와서 열 세 살에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을 왔단다. 너무 어린 탓에 남편이 무서워 도망다니다가 열아홉 살에 처음으로 합방해 아들 딸도 여럿 낳으셨다고. 무서워했던 남편과는 다행이 남편이 죽는 날까지 정답게 지냈지만 시집살이가 고초, 당초보다 맵고 심했다. … 친정에서도 무슨 이유인지 구박덩어리였단다. 한번은 아버지가 남긴 밥을 먹었다고 친정 어머니가 주걱으로 뒷통수를 때려서 눈알이 빠졌단다.

마침 옆에 있던 동네 아저씨가 얼른 찬물에 씻어 넣어주어 장님이 되는 것은 면했지만 영영 눈꺼풀이 제대로 떠지지 않는 '반병신'이 되었다. … 당신 아이들 뿐만 아니라 할머니가 열여덟 살 되던 해 시어머니가 낳은 시동생(현재 우리 교회에 나오시는 이종윤 할아버님이시다)이 수족이 불편한 '배냇병신'이어서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똥오줌 받아내는 수발을 하고 있으니 그 고달픔을 잠작하고도 남는다.

… 이 동네는 한국전쟁 때 격전지였는데 빨갱이들에게 물을 떠다 먹인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부상당하고 목이 말라 죽어가는 적군들이 보기 딱해서 국군측에 허락을 받아 집에서 물을 끓여다가 전쟁포로 수용소에 널브러져 있는 적군들에게 물을 먹였단다. 사방에 피가 흥건히 괴어 있어 자신도 곧 피투성이가 되었다. 무섭기는 했지만, '피가 날 잡아 먹겠는가' 생각했단다. 물 한 바가지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소원은 풀고 가시게'하는 마음이었다고.

"어느 날은 약초를 캐러 가다가 적군 도망병 둘을 만났어. 열일고여덟 살이나 되었을까. 나를 보더니 도망갈 생각도 않고, 해칠 생각도 안 하더라고. 너무나 배가 고파서 아무 힘이 없었던 거야. 나는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고 얼른 집에 가서 소금주먹밥을 만들어다 국군 몰래 주었지. '부디 몸 성히 부모님 곁으로 가시게'하니 그 인민군 저도 울고 나도 울고 했어. 그 어린 것들이 전쟁이 뭔지나 알고 나왔겠어?"

"나는 불쌍한 사람들 보면 뒤꼭지가 땡겨서 그냥 못 가요. 요즘에도 보건소나 면사무소에 갈 때마다 도와주고 돌봐줄 만한 사람이 있는가 살펴보지. 금방 죽을 것, 쌓아놓고 살면 뭐 하나? 1천 석 실은 배가 하루 식전에 가라앉을 수도 있는데. 게다가 여태껏 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목숨 살려주고, 도와준 사람들이 월매나 많겄어."


… 할머니는 비록 일자무식이라도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듯하다. 서로 돕고 도움을 받는 것. 나는 그동안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받지도 않고 사는 것이 제일 공평하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행을 다니면서 절실히 느낀다. 세상은 안 주고 안 받는, 혹은 주는 만큼만 받고 받는 만큼 주는 게 아니라 모르는 사이에 어떤 사람에게는 많이 주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많이 받는다는 것, 그렇게 돌고 돈다는 것을. …

돌아서면서 생각했다. 우리의 할머니들은 어쩌면 그리도 하나같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을까? 한 분 한 분 이야기가 그야말로 한편의 대하소설이다. 그런데 그 조그마한 쭈그렁 할머니들은 또 어찌 그리도 당당하신지. 일생을 가장 힘 없는 신분으로 사셨던 할머니들이 인생의 피안이 보이는 지금은 개선장군처럼 늠름하기만 하다. 무엇 때문일까? 그건 다름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도리를 다했다는 자부심에서 나오는 당당함이 아닐까?

임태일 / 고사리교회 담임교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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