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의 고난보다는 종교적 탐욕(貪慾)이 없는 경건(敬虔)의 문제

필자는 욥기를 본문으로 하는 설교를 할 자신이 없다. 욥이 당한 것과 같은 고통을 당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설령 그러한 고통을 당했다 해도, 욥기를 가지고 설교한다는 것이 어렵다. 욥기는, 흔히 죄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왜 고난을 받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의인의 고통을 문제삼고 있는 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욥기의 첫 두 장에 나오는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는 의인이 당하는 고난이 주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까닭 없이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는 사탄의 말에서 보듯이, 아무런 보상(報償)도 바라지 않는 하나님 경외(敬畏)가 과연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주제가 된다. 그것을 시험해 보기 위한 필요에서 설정된 것이 바로 욥의 고난이다.

설교하기 어려운 책이라면 어디 욥기뿐이겠는가? 자고로 예언자들이 전달해야 할 메시지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때마다 그 메시지가 예언자들을 난처하게 만든 예는, 모세의 경우나 이사야의 경우나 예레미야의 경우나 요나의 경우에서, 보듯이 결코 적지 않다. 일반적으로 예언자들에게 주어진 메시지는, 백성이 들어서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파멸(破滅)의 심판(審判) 메시지였거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무모한 메시지였거나, 유대 민족의 자존심을 구기는 그러한 메시지인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욥기를 가지고 설교하기가 힘들다고 하는 것은 성격이 조금 다르다.    

욥기는 예언서가 아니다. 그러기에 메신저를 괴롭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심판의 경고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욥기의 서론 격인 산문(散文) 부분(1-2장)에서, 욥이라는 사람을 사이에 놓고 하나님과 사탄이 힘 겨루기를 하는 설전(舌戰)의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하나님의 주장보다는 사탄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는 것이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이것이야말로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시고, 오히려, 그것이 더 참된 믿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 반해, 사탄의 주장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길 때에는 어떤 보상을 바라고 섬기고, 또 보상을 받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아무런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돌이켜 보면, 설교자인 필자 자신도, 설교할 때마다, 사탄의 주장과 같이, 복(福) 받기 위한 믿음, 보답이 약속되어 있는 믿음을 전제로 한 설교를 해 왔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요 3:16) 라는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도 필자는 예수를 믿어야할 까닭으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永生)을 얻는다는 것을 믿음의 보답으로 강조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행 16:31) 라는 구절도 믿음의 보상으로 구원(救援)을 내세우고 있다.  

"자녀이신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복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한 계명은 약속이 딸려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네가 잘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한 약속입니다"(엡 6:1-3) 라는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에도 부모에게 복종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 그 보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래 사는 복을 받는다는 것을 청중에게 상기시켰다.

우리나라 교인들이 잘 알고 있는 십일조(十一條)와 관련된 구절도 보상을 전제하고 있다.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여라. 이렇게 바치는 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서, 너희가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말 3:10). 십일조를 잘 바치면 하나님께로부터 크나큰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상의 몇 가지 예만 보아도, 성서 자체 안에 믿음과 믿음의 보상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이,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라고 사탄이 한 말은 성서적으로 보아도 틀린 말이 아니다. 설교자들도 그들의 청중들에게, 믿으면 복 받고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아무런 부담 없이 설교하고 있다.


신학적 유산과 하나님 체험의 대결

장면을 바꾸어, 욥기의 시(詩) 부분(3장 이하)으로 들어가서, 욥과 그의 친구들 사이에 벌어지는 설전을 보자. 완전무결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욥의 말과, 욥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그의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의 의로움과 자신의 무죄를 하나님에게 강변하는 욥의 말보다는, 유대교의 정통신학의 입장에서, 욥의 오만(傲慢)과 위선(僞善)과 신성모독(神聖冒瀆)적 발언을 꾸짖는 욥의 친구들의 말이 더 정통보수 신앙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나무라는 말을 보면, 유대교나 기독교의 정통 보수 신앙의 주장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 설교자들이 욥기를 본문으로 삼아 설교할 때에 욥의 신앙을 제쳐두고, 엘리바스나 빌닷이나 소발이나 엘리후의 신학적 입장이나 신앙을 대변할 수야 없지 않은가!
  
우리의 설교가 욥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주장과 욥의 신앙을 대변하기보다는, 욥의 친구들의 신학을 대변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욥의 말은 과격한 급진 신학을 대변하고 때로 신성모독적이어서 청중을 오도할 수 있는데 반하여, 욥의 친구들의 설교는 건전한 보수 신학을 대변하고 청중을 선도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욥기에서 전통을 대변하는 욥의 친구들의 신학과, 그러한 전통 신학에 항거하는 욥의 통찰을 구별할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도 욥의 친구들의 신학과 욥의 신학이 긴장을 이루고 있으면서 우리의 선택을 촉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나...'

우리나라 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구절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교인들이 욥기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말하라면, 아마도 많은 수의 교인들은 욥기 8장 7절의 "네 시작은 미약(微弱)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昌大)하리라" 하는 구절을 뽑을 것이다. 우리나라 교인들 중에서 자영업을 하거나 방금 막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이들이 특히 이 구절을 좋아한다. 누가 만들어서 파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개업하는 교인들의 점포에 가 보면 이 구절을 목판에 새겨 걸어놓은 것이나 붓글씨로 써서 액자에 넣어 걸어 놓은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문자 그대로, 사업의 시작은 미약하지만 이제 곧 번창할 것이라고 하는 본인들의 기대와 축하객들의 축복을 함께 담을 수 있는 구절 같기 때문에 애용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 목회자들이 잘 알다시피, 이 구절은 욥기에 등장하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도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욥이 한 말도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꾸중을 받은 욥의 친구들 중에서 수아 사람 빌닷이 한 말이다. 욥기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욥의 말과 저자 혹은 편집자의 말 외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과, 부스 사람 엘리후 등, 욥의 친구들의 말도 함께 나온다. 욥기에 나오는 친구들의 장황한 연설 속에는 지혜문학의 유산인 격언(格言)과 금언(金言)과 전통적인 유대교의 건전한 보수 신앙의 표현이 그대로 들어 있다.

욥의 친구들이 아무리 경험적인 지혜를 말하고 정통 신학을 말한다 해도,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 앞에서나 욥 앞에서는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신학이다. 욥의 친구들이 늘어놓는 장황한 설교는 그것이 아무리 건전하게 보여도, 아무리 감동적인 언어와 신학으로 포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결국 욥 자신의 하나님 체험 신앙에 의해 그 가치가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될 목적으로, 여기 욥기에 진술된 것들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인들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그 말 자체가 좋아서, 그 말의 화자(話者)나 맥락을 고려함이 없이 성서의 말이라고 하여 인용하고 있다. 성서의 등장 인물들이 한 말이라고 해서 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닌데 말이다.


경외(敬畏)의 까닭

흔히, 욥기는, 의인(義人)이 받는 고난(苦難)의 문제를 제기한다고 생각한다. 왜 욥과 같은 완전무결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고난을 당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욥기를 열 때, 우리와 같은 설교자가 당면하는 도전은 바로 "욥이,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라는 사탄이 제기한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사탄이 하나님 경외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신앙인들의 이기적인 종교적 탐욕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욥기 1장 6-12절에 나오는 두 등장 인물의 대화를 재구성해 본다.

*하나님:  어디를 갔다가 오는 길이냐?

~사탄  :  땅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오는 길입니다.

*하나님: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보았느냐?
              이 세상에는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없다.


~사탄  :  욥이,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울타리로 감싸주시고,
              그가 하는 일이면 무엇에나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를 온 땅에 넘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라도 주께서 손을 드셔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치시면, 그는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할 것입니다.

*하나님:  그가 가진 것을 다 네게 맡겨 보겠다.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아라!


하나님께서는 욥이 매우 자랑스러우시다. 욥을 두고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흠이 없는 사람, 정직한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라고 극찬하신다. 사탄도 욥의 그러한 면모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탄이 지적하는 것은 욥의 그러한 하나님 경외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욥 자신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다. 욥이 "거저"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그렇게 하나님을 섬길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1:9).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믿음의 동기가, 사탄이 지적하듯이, 보상(報償)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할 때, 그렇지 않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우리 신자들의 믿음은 과연 사심 없는 믿음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복도 받지 못해도 한결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 무엇을 바라서가 아니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사람이니까, 사람으로서는 마땅히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아니,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우리의 청중들에게 그렇게 설교하는가?


빌닷과 소발의 설교

오히려 우리는, 욥에게 한 말 때문에 하나님께 꾸중을 받은 빌닷이나 소발처럼 설교하지 않는가?

"네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전능하신 분께 자비를 구하면, 또 네가 정말 깨끗하고 정직하기만 하면, 주께서는 너를 살리시려고 떨치고 일어나셔서, 네 경건한 가정을 회복시켜주실 것이다. 처음에는 보잘것없겠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다" (8:5-6).

이것은 빌닷의 설교이다. 죽을병에서 살아나는 길, 지리멸렬(支離滅裂)된 가정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그분에게 자비를 구하고 깨끗하게 살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다. 이렇게 살면, 그 보상으로 건강과 가정을 회복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빌닷의 설교가 틀렸는가?

소발도 욥에게 설교한다.

"네가 마음을 바르게 먹고, 네 팔을 그분 쪽으로 들고 기도하며, 악에서 손을 떼고, 네 집안에 불의가 깃들지 못하게 하면, 너도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얼굴을 들 수 있다. 네 마음이 편안해져서, 두려움이 없어질 것이다. 괴로운 일을 다 잊게 되고, 그것을 마치 지나간 일처럼 회상하게 될 것이다. 네 생활이 한낮보다 더 환해지고, 그 어둠은 아침같이 밝아질 것이다. 이제 네게 희망이 생기고, 너는 확신마저 가지게 될 것이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걱정할 것이 없어서, 안심하고 자리에 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네가 누워서 쉬어도 너를 깨워서 놀라게 할 사람이 없고, 많은 사람이 네게 잘 보이려 할 것이다"(11:13-19).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쉬지 않고, 악에서 손을 떼고, 집안에서 불의를 몰아내는 것 등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구체적 표현이다. 이렇게 살면, 그 보상으로 부끄러움이 없는 삶, 공포와 불안과 고통이 없는 마음의 평화, 생활의 안정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늘 외치는 설교와 너무나도 닮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오늘의 설교자들은 욥의 친구들과 같다는 말인가?


'가죽은 가죽으로'

지속적이고 변함 없는 욥의 하나님 경외가 욥이 받은 온갖 복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 사탄은 욥이 받은 모든 복을 다 박탈당하게 한다. 양 칠천 마리, 낙타 삼천 마리, 겨릿소 오백 쌍, 암나귀 오백 마리 등 온갖 재산을 박탈당하게 한다. 일곱 아들과 세 딸도 다 재난을 만나 죽게 한다. 혼자 남은 욥은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오,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1:21)


감격적인 말이다. 욥의 신앙의 일면이 확연하게 보이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산, 하나님께서 다시 가져가시니, 하나님을 찬양할 뿐이라고 한다. 원망이 없다. 여기 이 말을 가사로 삼아 어느 작곡가가 작곡을 해 주면, 이것은 대단히 경건한 찬송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욥기 2장 2-6절에 나오는 하나님과 사탄의 두 번째 면담에서 오고간 대화 내용을 재구성해 본다.

*하나님:   어디를 갔다가 오는 길이냐?

~사탄  :   땅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오는 길입니다.

*하나님: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보았느냐?
               이 세상에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 없다.
               네가  나를 부추겨서, 공연히 그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지 않느냐?


~사탄  :   가죽은 가죽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키는 일이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립니다.
               이제라도 주께서 손을 들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시면,
               그는 당장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   그렇다면, 그를 너에게 맡겨 보겠다.
               그러나 그의 생명만은 건드리지 말아라!

    
사탄은 생각한다. 아직 욥에게는 자신의 생명이 남아 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탄이 말한 "가죽은 가죽으로 대신할 수 있다"(2:4)는 히브리어의 독특한 표현은 다른 곳에서 사용된 예도 없고 그 뜻을 추적해 볼 어떤 실마리도 없어서 난해한 표현으로 알려져 있지만, 바로 다음 문맥에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이 독자의 본문 이해를 방해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것에 가장 큰 비중을 두기 때문에 그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한다는 것이다.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의 생명을 박탈하는 것으로서는 욥이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하는 데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이제라도 하나님이 욥의 "뼈와 살"을 치시면 그가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을 사탄에게 맡겨 그의 "뼈와 살"을 쳐보라고 허락하신다. 그래서 사탄은 욥을 쳐서,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에까지 악성 종기(腫氣)가 나서 고생하게 하였다.

그래서 욥은 "잿더미"에 앉아서, 옹기 조각을 가지고 자기 몸을 긁는 신세가 되었다(2:7-8). 욥의 온 몸에 악성 종기가 났다는 것은 욥이 육체적으로 당하는 고통을 말하고, 그가 "잿더미"에 앉았다는 것은 그의 병이 그를 공동체로부터 격리시켰다는 것을 뜻한다. 욥의 비참한 처지와 처절(凄切)한 버림받음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표현이다.


남편의 고난에 동참하는 아내

고난의 현장에 욥의 아내가 등장한다. 처참(悽慘)한 신세가 된 남편을 보고서,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信實)함을 지킬 겁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2:9)


하고 한탄한다. 욥의 아내는, 욥이 그처럼 저주받는 나락(奈落)으로 굴러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이나 삶의 태도가 이전과 다름없이 일관성을 보이는 것이 못마땅했는지도 모른다.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보다 더 먼저 나온 그리스어 칠십인역에는 다음과 같은 본문이 더 첨가되어 있다.

[욥의 병이 오래 계속되었다. 한 번은 욥의 아내가 남편에게 말하였다.

"언제까지 참고만 계실 겁니까?
당신은, 구원해주실 것을 바라며 좀더 기다려 보자 하지만,
여보, 이제 이 세상 사람들은 이상 당신을 기억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자식들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해산의 고통도, 애써서 기른 수고도 다 헛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보, 당신은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속에서 몰락해 가고 있습니다.
들판에서 밤을 지새우기 하 세월입니까?
그 동안 나는 그 지긋지긋한 일거리를 찾아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떠돌아 다녔습니다.
애써 일거리를 얻어 놓고도, 너무나 괴롭고 억울해서,
잠시라도 쉬기 위해, 빨리 해지기만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여보, 하나님을 향해 무어라고 항의나 하고서, 죽어버리십시오."


욥은 그러한 아내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까지도 어리석은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2:10)
]

욥이 자기 아내에게 보여준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변함 없는 믿음과 신실(信實)은 욥의 하나님 경외(敬畏)가 어떤 보상을 전제로 하지 않은 순수한 신앙임을 입증한다. 그러나 욥의 아내는 남편의 고통을 보다 못해 차라리 죽기를 빌었던 것이다. 마소라 본문에 나오는 욥의 아내의 말만 들으면, 욥의 아내는 하나님과 남편을 저주하는 아주 못된 여인처럼 보인다. 복을 받는다는 보상이 전제되지 아니한 믿음은 없다는 사탄의 지론을 지지하는 여인처럼 보인다. 저주받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 찬양은 있을 수가 없다는 사탄의 기대를 확인시키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칠십인역에 나오는 그 여인의 말은 독자들의 동정을 유발시킨다. 자기 남편의 불행은 곧 아내 자신의 불행이기도 하다. 자의든 타의든 호구지책으로 이 집 저 집 전전하며 노동을 파는 욥의 아내는 지금 남편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다. 남편과 연대하여 이 고통을 감수하고 있기 때문에 그 여인은 사탄의 지론을 수행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는 않다.

욥의 아내는 남편을 향해 자기들을 이토록 불행하게 만든 하나님께 무슨 말이든 항의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남편 욥은 이 모든 어려운 일을 당하고서도, "말로 죄를 짓지 않았다"(2:10)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제 욥과 그의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곧 보게 되겠지만,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욥의 절규와 하나님을 향한 욥의 울부짖음과 탄원은, 단순한 항의를 넘어서서, 욥의 하나님 체험의 심오한 경지를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민영진 / 대한성서공회 부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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