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전병욱 목사가 <목회와 신학> 2000년 3월호에 기고한 글 '<다보스 포럼>이 주는 교훈' 전문이다.

스위스의 조그만 휴양도시 다보스에서는 매년 1월말에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학계의 사람들이 모여서 포럼을 갖는다. 이것이 바로 올해로 30주년을 맞는 '세계 경제 포럼'(World Economic Forum) 또는 '다보스 포럼'이다. 새 천년을 맞는 2천년의 주제는 '새로운 시작과 차별화'(New Beginning : Making a Difference)로 인터넷 혁명과 유전자 혁명으로 특징짓는 21세기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번 다보스 포럼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지금 개발도상국들이 정보화되고 있다
<타임>지는 '정보기술혁명'이 가져다 주는 가장 중요한 의미로 '남북 격차의 해소'의 가능성을 들고 있다. 지금까지는 잘 사는 선진국과 못사는 개발도상국의 격차가 날로 더 심화되었다. 그런데 이 정보기술혁명이 남북의 격차를 현격하게 좁혀 줄 수 있다는 시각이다.
방글라데시의 농촌 마을에서는 휴대폰을 통해서 외부세계와 연락을 취할 수 있고, 세네갈의 수도 다카(Dakar)에서는 사이버카페(cybercafe)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도의 카나타카(karnataka)주의 방갈로(Bangaiore)시는 인도판 실리콘밸리를 형성하고 있다.
이 방갈로 시는 15개의 하이테크도시가 있으며 1,700개의 정보 기술회사가 모여 있고, 연200억 달러의 매출액을 올리는 소프트웨어를 생산하고 있다. 카나타카 주장관 크리슈나(S.M.Krishna)는 "연 67퍼센트의 성장률로 보건대, 방갈로는 세계의 10대 정보도시 중의 하나가 될 것이 확실하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첫째, 선두와 후발 사이의 정보기술력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에 있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머리 좋은 사람은 지금의 컴맹에서 최고 수준의 컴퓨터 전문가가 되는데 2년이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의 산업사회에서는 그 격차를 따라가는데 수십 년이 걸렸다. 그래서 후발주자가 좀처럼 선두주자를 따라잡는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선두와 후발 사이에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뛰기만 하면 능히 능가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정보기술력은 기존의 사회 간접 자본이 없이도 성장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산업화를 위해서는 항만, 도로, 공항 등의 사회 간접자본(infrastructure)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정보기술은 소수의 엘리트들이 기존 시설 없이 컴퓨터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외국 유수의 기술력과 경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인도의 약진(leapfrog)이 눈에 띈다.
인도는 전통적으로 빈부의 격차, 계급의 차별이 있는 나라이다. 벤츠와 우마차가 공존하는 나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이 인도의 소수의 엘리트들이 지금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것이다. 세계 소프트웨어 시장의 40퍼센트를 인도가 장악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실리콘 밸리의 30퍼센트 이상의 인재가 인도 사람이라고 한다.
이것을 교회에 적용해 보자. 정보기술사회에서는 큰 교회의 장점이 점차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상에서는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차별이 없다. 하나의 동일한 교회에 불과하다. 물론 큰 교회가 많은 물량을 들여서 더 나은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작은 교회가 누리는 강점을 가지고 접근하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격차를 줄일 수 있다.
이제 새로운 성장세대는 인터넷 세대이다. 인터넷에서 젊은이를 잡으면, 수십만 명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오는 것이다. 정보기술사회는 특히 작은 교회가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강점을 가지고 일하라
정보기술사회는 평범한 것 백 개보다는 강한 것 한 개가 더 힘을 발휘하는 사회이다. 인터넷 사회는 강한 자만 살아남는 사회라는 것이다. 즉 무한경쟁 속에 던져진 사회라는 의미이다. 이 사회에서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장점을 더 강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는 21세기가 한국인의 세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왜냐하면 시대 상황이 한국인에게 너무나도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인터넷 시대에 한국인이 강한가?
첫째, 한국인의 속도감이다. 외국 관광가이드에도 '빨리 빨리'라는 말이 들어 있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빨리 빨리'를 외친다. 그래서 남들이 10년 걸릴 고속도로를 우리는 3년이면 놓는다. 남들이 5년 걸려 지을 건물을 우리는 2년이면 짓는다. 물론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같이 종종 무너지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은 것들이 훨씬 더 많다. 우리는 이것을 성장을 위한 희생, 성장을 위한 기회비용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속도는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매우 귀중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빌게이츠가 <빌게이츠@생각의 속도>라는 책을 썼다. 한국인은 이 책을 읽을 필요도 없다. 이미 속도의 중요성을 지목하고 있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반도체 용량이 6개월마다 2배로 커진다고 한다. 이런 속도의 게임은 한국인이 최고의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가 지금 반도체 강국이 된 것이다. 시대마다 그 민족성이 빛을 발할 때가 있다. 산업사회에서는 약점이었던 것이 정보사회에서는 장점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신중보다 중요한 것이 신속이다.
기존교회가 새롭게 부상하는 교회를 따라잡지 못하는 분야가 바로 이 점이다. 우선 의사결정의 속도를 당할 수 없다. 몇 단계의 복잡한 의사결정 시스템을 통해서는 낙오되기 딱 알맞은 구조이다. 또한 교인들의 변화된 가치관을 변화시킬 도구와 설교의 변화가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많은 교회가 낙오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둘째, 좁은 땅이 강점이다. 그 이유는? 미국에 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미국의 인터넷 랜(LAN) 속도보다 한국의 랜 속도가 더 빠르다. 미국은 워낙 넓은 나라라서 전국을 랜으로 연결시키는데, 더 많은 비용이 들면서도 효율은 더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인터넷 인구가 3년만에 1,000만이 넘어섰다고 한다. 이제 2,000만 명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한다.
이렇게 급속하게 확산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땅이 좁기 때문에 대부분 다닥다닥 붙어산다. 이것이 사는 데는 답답할지 몰라도 통신망을 연결하는 데에는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아파트에 선 하나만 들어가면 수백 가구에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다. 땅덩어리가 좁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전 국토를 랜으로 도배할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최근의 인터넷 강국의 특징을 보라. 모두 국도가 작은 나라들이다. 산업사회에서는 넓은 국토가 강점이었지만, 정보사회에서는 좁은 것이 오히려 효율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항상 최후의 승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강점을 극대화한 경우이다. 없는 것을 쳐다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잘 활용하여 최대의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것이 우리의 사명일 것이다.

대가를 만나라
다보스는 매우 작은 스위스의 도시이다. 눈 덮힌 산간오지인지라 교통상황도 수월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번 포럼을 위해 일주일 사이에 3만명의 저명인사들이 모이다 보니, 다보스 시내의 60개의 호텔은 이미 다 예약이 끝났고, 아파트까지 민박으로 가득 찼다고 한다. 여기서 밀린 사람들은 멀리 차를 타고 2시간 이상 떨어진 곳에서 묵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거기다가 이 포럼의 참가 비용이 무려 2만 달러에 달한다.
악조건 투성이의 이 다보스 포럼에 세계의 지도자 3만명이 아우성을 치며 몰려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포럼에 오기만 하면 '1년 내내 찾아다녀도 만날 수 없는 세계의 유명인사를 다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보스 포럼에 몰려드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진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대가를 만나야 성장이 있다는 사실이다. 한 분야의 탁월성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대가에 대한 목마름'이다. 많은 사람들이 왜 평범하게 살아가는가?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최고인 줄 알고 자만에 빠져 살아가는가? 대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가는 우리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역할을 한다. 대가는 우리에게 갈증을 불러일으킨다.

한 예로, 필자가 섬기는 교회 마당에서는 청년들이 항상 농구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잘하는 사람, 못하는 사람이 우열이 있었다. 그런데 몇 개월이 지나면서 수준이 평준화되었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도저히 그 이상의 실력이 향상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농구를 탁월하게 잘하는 청년 하나가 등장했다. 그 청년의 등장으로 인해 다시금 전체의 농구 실력에 불을 붙였다. 이 대가의 출연 이후에 그들의 실력이 다시 성장하게 되었다. 장시간의 훈련이 주는 성장은 한계가 있다. 대가를 만나야 한다. 대가가 주는 자극은 성장의 진정한 원동력이다.
'말을 시냇가로 끌고 갈 수는 있으나 물을 마시게는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마부가 말에게 소금은 줄 수 있다. 소금 먹은 말이 물을 마시지 않겠는가? 대가는 소금과 같다. 대가는 전채요리(appetizer)와 같다. 기도의 대가를 만나 보라.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전도의 대가를 만나 보라. 자신도 저렇게 전도하고 싶다는 자극이 생긴다. 설교의 대가를 만나 보라, 설교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생긴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을 보면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말씀하신다. 성도란 세상을 향해서 질문을 유발케 하는 인생, 갈증을 일으키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태도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첫째, 대가를 귀중히 여겨야 한다. 대가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은 공동체의 적이다. 대가를 죽이는 것은 민족의 장래를 죽이는 것이요, 대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미래의 상상을 부인하는 것이다. 개개인이 만나 보면 별 것 아닌 선진국의 국민을 보라! 그들의 강점이 무엇인가? 대가를 인정하는 그 '문화'이다. 비범한 사람들이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이 무엇인 줄 아는가? 대가를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 대가를 만나야 한다. 할 수만 있으면 각 분야의 대가를 만나는 데 비용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필자는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항상 대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재미있는 것은 대가와의 만남은 사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파급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목회의 가장 큰 영광은 대가 중의 대가인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된 대가가 되기를 소망한다. "주여, 대가를 만나는 축복을 주옵소서."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