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를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무겁고 딱딱한 신학적 이론은 접어두고, 일선 목회자들이 흔히 생각하는 목회를 말해 보자면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목회자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인사말 중에 가장 많이 쓰는 것은 아마도 "목회, 잘 되십니까?"일 것이다. 이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교인은 많이 늘었느냐?', '교회는 많이 부흥했느냐?'는 동역자로서의 염려도 포함되어 있다.

목회는 사업?

목회자 세계에서 목회의 성공여부를 교회 크기로 평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자립 개척교회에서 건물이 있는 큰 교회로 성장한 목회는 성공한 목회로 평가받는다. 그러니 이제 목회를 막 시작하려는 사람들은, 노인만 몇몇 남아있는 농촌이나 어촌의 작은 마을은 별로 관심이 없다. 오직 사람이 많이 사는 아파트 단지나, 신도시를 목회지로 선정하여 은행 융자를 받거나 혹은 교인들의 강압적(?)인 헌금으로 땅을 사고, 교회 건물을 짓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목회라는 것도 수퍼마켓을 막 시작하려는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여기에 목회철학이나 사명보다는 '사업'철학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목회자들이나 교인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목회사업 잘 되게 해 주시고, 선교사업 잘 되게 해 주시고, 교육사업 잘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하나님은 분명 사업가의 총회장 쯤 되시는 것 같다.

교회를 사업으로 본다면, 목회 일선에 있는 사람으로서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 목회사업이 불경기이다. 정말 안 된다. 손님도 없고, 있는 손님은 다른 교회 손님들이다. 새로운 단골 손님 끌어오기가 하늘의 별 따기이다. 주변에 교회 문 닫고 목회사업을 중단한 이들이 많고, 교회와 교회끼리 서로 합쳐 한 교회라도 살려 보려는 이들도 있다. 이 불경기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몇 해 전, 한 여가수가 히트시킨 노래 중에 '립스틱 짙게 바르고'라는 노래가 있었다. 이 노래는 유행이 지나 밤무대에서나 들어 볼 노래이지만, 얼마 전 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레코드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었다. 우리 교회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는 중에, 그 거리에서 들었던 이 노래의 다음과 같은 가사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영원하지도 않더라,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립스틱 짙게 바르고..."

한국교회가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면 큰 착각일 것이다. 지금 이대로의 교회, 지금 이대로의 목회라면, 영원할 수도 없으며 영원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오늘과 내일을 사시는 영원하신 분이지만, 한국교회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나팔꽃 보다 더 짧은 영화를 누리다 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눈앞의 영화만을 쫓고 있지는 않는가? 화려함과 물질이 주는 영화 말이다. 이 땅에 있는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겉옷이 주는 화려함, 쌓여 가는 빵덩어리, 높아 가는 교회벽 그리고 기적을 행하는 예수로 획일화되어 자기 나름의 고유한 색깔을 잃어 버렸다.

부흥사들의 '성령 충만', '불신 지옥'식의 목회와 도시의 대형 교회가 모범적인 목회 모델이 되었다. 그래서 작은 교회와 그 목회자들은 하늘나라 바라보듯이 건물이 웅장하고 뜨거운(?) 믿음을 부르짖는 교회들을 좇아 전도지를 들고 거리로, 전철로 뛰어 다닌다.

교회여, 립스틱을 짙게 바르자

교회는 그 교회만의 고유한 향기와 색깔을 잃어버리고 단 하나의 색깔로 획일화되었다. 개성이 없다는 말이다. 개성이 없는 교회,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교회는 창의력과 생명력을 얻을 수 없게 되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문명을 맞이할 수 없으며, 그러면 나팔꽃보다 더 짧은 영화를 누리다가, 사람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이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백이면 백, 천이면 천의 교회가 단 한가지 색으로 칠해져 있다. 강남의 대형교회를 모델로 한 단 한가지 색깔로 말이다. 교회는 자기 나름의 고유한 색깔을 찾아 '색깔 있는 목회'를 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각각의 다양한 색깔과 다양한 향기를 뿜어낼 때만이 한국교회는 살아남을 수 있으며, 복음을 올바르게 전할 수 있다.

교회가 칠해야할 립스틱은 그 교회가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찾아야 한다. 100년 전 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 혹은 근본주의자들이 물려준 유산으로 색깔을 찾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지금 서 있는 자리, 곧 그 지역사회를 통해 립스틱 색깔을 찾아야 한다. 또한 교회가 몸답고 있는 민족의 요청에 응답하기 위한 립스틱 색깔을, 또 새로운 문명을 개척하기 위한 립스틱 색깔을 찾을 수도 있다.

그 지역에서 요청하는 것이 교육, 청소년, 노인, 노동, 환경 문제라면 거기에 맞는 립스틱 색깔을 찾아야 하고, 민족의 시대적 사명인 통일로 립스틱 색깔을 정할 수도 있다. 정보, 통신, 문화, 자연 생태계 문제 등으로 립스틱 색깔을 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참고로 우리 교회는 문화, 생명, 자연생태계 문제로 고유한 자기 색깔을 찾아 립스틱을 바르고 목회를 하고 있다. 감리교의 성실교회는 전통문화를 통한 예배, 교육을 모색함으로 립스틱 색깔을 찾아가고 있다. 그리고 충북 음성의 농민교회와 평창의 산돌교회, 홍천의 동면교회 등은 농민, 땅, 농사법 등으로 립스틱 색깔을 찾아 목회를 하고 있다.

자기 색깔이 있는 교회, 개성이 있는 교회만이 새로운 문명을 열 수 있으며, 그 시대에 바르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다. 자기 색깔과 자기만의 고유한 개성은 그 안에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담고 있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문화와 역사를 열 수 있는 창조력과 생명력을 샘물처럼 뿜어낼 수 있다.

모든 교회가 하나의 색깔로 칠해져 있지 않다고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어느 교회는 빨간색 립스틱을 바르고, 또 어느 교회는 분홍색 립스틱을, 또 어느 교회는 자주색 립스틱을 바르고 우리 주님을 증거하며, 우리 시대와 역사 속에 살려내자는 것이다.

보수의 색깔로만 혹은 진보의 색깔로만 칠하려 하지 말자. 진보, 보수, 중도 등의 이념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서 있는 자리로부터 구체적인 색깔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술가'이시다

교회가 자기 나름의 고유한 색깔을 찾아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목회를 한다면, 이제 더 이상 목회는 사업이 아니다. 목회는 예술이 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이다. 그때부터 예수는 빵을 구걸하는 추한 예수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살아있는 소리, 바람, 햇볕, 꽃과 나무를 찾는 아름다운 예수가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인간이 하는 어떤 일로 설명하라면, 나는 '하나님은 예술가이시다'라고 말하고 싶다.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분명 예술가이시다. 하늘과 땅을 말씀으로 지으시고, 밤하늘의 별과 달, 동산의 아름다운 꽃과 나무, 새와 다람쥐를 만드신 분, 사람을 손수 흙으로 빚으신 하느님은 당신이 만드신 것을 보고 '참으로 아름답도다!'고 감탄하신 예술가이시다.

예술가이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처음 창조하실 때에도, 사람을 만드실 때에도, 꽃과 새를 만드실 때에도 언제나 당신의 생명의 영을, 당신의 혼을 불어넣으시고 만드셨다.

"한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창 1:1-2).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창 2:7).

당신이 불어넣으신 '기운'과 '입김', '생기'는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신 것이고, 우리는 그것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과 혼 없이 그저 아이들의 장난감 만들 듯이 이 세상을 만들고, 사람을 만드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다. 당신의 영을 불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시는 분이시다. 예술가는 자기의 몸과 영혼을 온전히 받쳐 살아있는 그 무엇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예술가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창조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 신앙인이란 이 세상을 살리고,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참여하는 참 예술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혼을 부르는 거룩한 행위이며,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나, 기도를 할 때,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참다운 신앙인의 행위란 새로움을 찾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혼을 이 세상에 불어넣어 거룩한 행위로서의 예술행위를 끊임없이 실행하는 것이다. 조각가가 자기의 혼을 불어넣어 작품을 만들 듯이, 도자기공이 자기의 정신을 혼신의 힘을 다 해 그 도자기에 불어넣으며 살아있는 생명체를 만들 듯이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그의 정신을, 자기의 몸과 영혼을 온전히 바쳐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목회는 예술이다

21세기 한국교회 목회 모델은 무엇인가? 예술가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목회, 즉 예술 목회이다. 우리 나름의 아름다움과 새로움을 추구하는 목회, 하늘 아버지의 영과 그리스도의 혼을 부르는 목회, 한국 문화와 가락과 춤이 예배마당에서 신명을 되찾는 목회.

목회는 사업이 아니다. 목회는 하나님의 영을, 그리스도의 혼을 부르고, 그것으로 생기를 얻어 아름답게 살도록 도와주는 예술목회, 생명목회이다. 하나님의 영이 가득한 신명난 목회, 얼굴 환히 웃고 덩더쿵 덩더쿵 예수와 더불어 춤을 출 수 있는 목회이다.

그럼, 예술목회는 어디에 뿌리를 두고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여전히 서구 기독교 문명에 기대어야 할 것인가? 서구 기독교회가 물려준 유산인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를 계승하며 할 것인가? 거기에 뿌리를 둔 오늘날 한국교회는 건강하고 생명력 있는 종교적 영성이 고갈되어가고, 교회가 해체되며, 가정이 붕괴되어 가고 있다. 한마디로 서구 기독교 문명이 몰락해 가고 있는 것이다.

예술목회는 생명목회, 영성목회, 문화목회, 작은 교회 목회, 지역선교 목회 등에 기초해 있다. 예술목회는 첫째, 생명의 신학, 생명의 목회, 생명을 보존하고 살리는 목회 위에 서 있다. 죽임의 문명에서 살림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목회인 것이다.

둘째, 예술목회는 영성 목회이다. 비인간화와 영성의 고갈로 갈증을 느끼는 오늘의 현대인에게 샘물처럼 솟아나는 그리스도의 영을 불어 넣어주는 목회이다. 예술성은 영성을 통해서, 영성은 예술성을 통해 살아난다. 그러므로 예술목회의 가장 핵심이 되는 일은 바로 영성을 회복하고 살리는 일인 것이다.

셋째, 예술목회는 문화목회이다. 물질의 시대, 자본주의 시대 이후는 문화의 시대이다. 교회는 '문화'를 매개로 목회를 통해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할 '예술성'을 극대화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의 전통문화와 기존의 문화를 통해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여 21세기 새로운 문명의 문을 교회가 열어갈 수 있다. 문화목회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예배이다. 예배는 목회예술의 꽃이다. 한국인의 심성 저 밑바닥에 있는 영성이 살아나도록 찬송가, 악기, 춤, 미술, 건축, 연극, 시, 의복 등 모든 문화행위를 동원해 '한국적 문화 예배' 모델을 만들어 내야 한다.

넷째, 예술목회는 작은 교회 목회이다. 예술목회는 대형교회, 큰 교회로는 불가능하다. 회중 상호간의 친밀한 성도 교제가 있는 작은 공동체로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대형교회는 자기의 몸과 살을 나누어 많은 작은 교회들을 만들어 예술목회의 본분을 다해야 할 것이다. 대형교회로는 21세기 한국교회의 길을 열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물량적 확장주의를 중지하고 하루 빨리 작은 교회, 영적 공동체로 회복해야 한다.

다섯째, 예술목회는 지역선교 목회이다. 복음은 그 지역의 상황과 만나질 때, 의미가 있게 된다. 강압적, 강제적 복음선교는 그 지역을 왜곡시키며, 복음 자체도 변질될 우려가 있다. 복음은 지연선교에 근거한 복음선교가 되어야 한다. 즉 노인, 청소년, 교육, 환경, 생명, 통일, 사회복지 등 그 지역의 요청에 책임적으로 응답하는 복음이어야 한다.
21세기 새로운 문명을 열 수 있는 한국 기독교회의 문화·예술목회가 더욱 활발하게 살아나길 간절히 바란다. 한국문화 속에 기독교 문화가 활짝 꽃이 피어 한국교회와 이 한반도 온누리에 그리스도의 영이, 하나님의 숨결과 생기가 가득하여 생명의 충만함을 맛보았으면 좋겠다.

영성과 예술성이 살아나는 교회, 그 길만이 21세기를 헤치고 살아남을 수 있는 교회의 길, 하나님의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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