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주/원주경찰서 경승실에 불상이 들어서는 것과 관련 기사가 나간 이후, 독자들의 의견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필자는 몇해 전, 제주시 화복동 원명선원에서 화강암으로 만든 작은 불상 750점의 머리 부분이 잘리는 사건이 일어나고(당시, 현장에서 잡힌 범인 김아무개씨는 경찰조사에서 “절을 교회로 바꾸기 위해 불상을 파괴했다”고 진술했다), 한달 뒤 북제주군 애월읍 도림사의 주불 오른쪽 손가락 4개와 좌우부처 왼쪽 손가락 1개씩이 둔기로 잘려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을 때, 또 그 후 며칠 후 경남 함양 벽송사의 요사체가 전소됐다는 기사를 접하고 ‘훼불(毁佛)사건과 신앙인의 윤리’라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이번 원주경찰서 경승실 불상과 관련해 유의미하다는 생각에 그 글을 다듬어 올린다.


스스로를 냉철하게 살펴봐야

훼불사건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이 나라에서 자칫 종교간 갈등을 유발할 소지를 안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선교 차원에서 일반인들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인식에 그릇된 영향을 줄 수 있는 개연성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스스로 이 문제를 냉철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면에서 훼불사건과는 반대로, 불교계에서 십자가를 훼손하거나 교회를 방화했다는 사건은 없는 판국에 이러한 일들이 거듭 벌어지는 것은 기독교의 윤리적 수준을 땅에 떨어뜨리고 마는 사태가 아닐 수 없다. 그 훼불사건이라는 것도 불상의 머리를 동강동강 잘라내버린 것이었으니 그러다가는 석굴암의 대불상도 남아나지 않을까 두려우며, 국보급 반가좌불상(半跏坐佛像)같은 것들도 민족의 귀중한 유산이 아니라 어떻게든 파괴해버려야 할 흉한 물건처럼 취급받지나 않을까 싶다.

이 훼불사건에서 우리는 기독교가 타종교에 대해 가지고 있는 교리적 적대감 내지는 정복주의적 공격의 뿌리깊은 면모를 주목하게 된다. 그런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적 순결성과 선교사명을 느끼려 한다면 그런 착각이 없다. 도리어 그것은 불교신자들의 분노를 사게 하고, 일반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의 어처구니없는 배타성을 만천하에 증명해줄 뿐이다. 하등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도 않는 것이고, 기독교의 배타적 오만과 침략적인 선교행위에 혐오감을 심어주게 될 근거를 제공하는 셈이다.

만일 거꾸로 불승(佛僧)들이 교회에 난입해서 십자가를 훼손한다든지 아니면 성화(聖畵)를 짓밟는다거나 성경을 찢는다든지 하면 기독교인들은 어떤 생각을 불교에 대해 가지게 될까? 그런 종교에 대해서 느끼는 반감은 그 종교의 위상에 깊은 타격을 주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오늘날과 같이 기독교가 보다 지배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는 극단화시켜 말해보자면 불교에 대한 사회적 탄압과 멸시가 팽배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종교, 특히 불교에 대해 이토록 공격적이고 정복주의적 자세를 취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토록 불교가 기독교에 대해 못할 짓을 한 것일까?

우리나라 사람치고, 산사(山寺)의 호젓한 풍경소리와 그윽한 범종(梵鍾)의 음색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이가 얼마나 될까? 숲을 가르는 바람과, 그치지 않는 풀벌레들의 합창 속으로 그 소리가 스며들면서 마음에 잦아올 때, “아, 참 좋구나” 하는 감탄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서양의 종소리가 사방에 급격하게 흩어지면서 주변을 압도하는 기세를 가졌다면, 우리네 종은 종안으로 소리를 은근히 모아들여 천천히 성숙시킨 후 조금씩 조금씩 흘려보내는 듯한 음조를 지녔다. 그것은 주위를 단숨에 장악하면서 흩어져버리는 소리가 아니라, 내면 속으로 삭히며 품어내는 신비함을 지니고 있다. 이런 범종의 소리가 은은하게 새벽공기를 진동시키는 시각에, 아직 걷히지 않은 안개를 손끝으로 잡을 듯 헤집고 바위틈에 솟아오르는 차디찬 샘물을 목에 축이면 우리는 어느새 오랜 옛날 그렇게 마음달랠길 없이 바랭이 하나 메고 터벅터벅 산사를 찾아왔던 선조(先祖)들의 맑은 숨결과 하나가 되지 않는가?

기독교 신앙이 그런 소리의 흡인력을 영혼의 가락으로 삼아, 묵상의 훈련을 해왔다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사뭇 다른 품격으로 세상사에 다가갔을지도 모른다. 기독교 신앙인이 이런 것들을 느낀다고 해서 그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단정한다면 그것은 실로 무지(無知)와 엄청난 율법주의적 편견이 아닐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종류의 종교적 욕구에 대한 각 종교의 진지한 노력을 깊이 연구해볼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일단 나와 다른 종교이면 열등하게 보고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여기면 그것은 우선 ‘정신적 폭력’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정신적 폭력은 도가 지나치면 반드시 물리적 폭력의 형태로 나타나서 사태를 더욱 헝클어뜨리고 마는 것이다.

인류사회의 근대헌법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는 어느 특정종교가 일방적으로 지배종교가 되어서 다른 믿음을 탄압하지 말라는 요구이다. 이 헌법정신은 단지 개념적 창안이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어떤 비극적 사태가 일어나고 희생자들이 양산되는가를 겪은 역사의 교훈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서양의 종교개혁과정에서 일어났던 무지한 폭력과 탄압, 그리고 추방의 역사는 모두 이 종교의 자유를 향한 힘겨운 여정이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 자유가 무너질 때 인간은 순식간에 근거도 없는 논리에 의해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을 겪어볼 대로 겪어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의 뿌리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자신의 종교가 다른 종교의 심판자가 되는 유혹을 거부하도록 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가 붕괴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어떤 특정 종교와 신념이 다른 종교와 신념에 대한 절대적 판단기준을 소유하고 있다고 윽박지르면서 자기논리를 관철시키려 할 때이다. 그것은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율법주의와 다름이 아니다. 율법주의는 인간의 사고를 경직되게 하고, 선악의 판단은 그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준에 절대적으로 맞추는 무리를 범하게 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정신적 생기는 멸절 되고 만다. 예수님께서 직면하신 예루살렘의 영적 상태는 바로 그러한 현실이었고, 그것이 가난한 백성들의 활력을 빼앗아 가는 것임을 주목하신 것이다.


“칼로 선 자 칼로 망한다”

만일 불교가 사회적 부패와 부정의를 조장하거나 인류의 양심을 마비시키고 있다든지 또는 사회적 증오와 갈등을 부추기는 교리를 내세우고 있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가 된다. 종교의 궁극적 목표와는 배치되는 가르침으로 인간사회의 길을 어긋나게 하고 있으며, 그로써 인간의 가치를 평가절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같은 종교안에서도 마찬가지의 문제이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부패와 부정과 탐욕을 채우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종교의 자유가 아니라 종교의 모독이다. 그러나 설혹 그렇다해도 그런 경우에 훼불사건과 같은 폭력을 동원하는 것은 여전히 옳지 않다.  

베드로가 사로잡히시는 예수님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칼을 뽑아 들자 예수께서는 이를 칭찬하시지 않으셨다. 도리어 “칼로 선 자 칼로 망한다”고 꾸짖으셨다. 스승을 보호하겠다고 그래도 생각해서 칼을 뽑아든 베드로가 무척이나 민망하고 경황이 없었을 것이다. 훼불사건의 관련자는 이런 베드로와 거리가 멀지 않다. 본인들은 예수님을 지키는 이른바 십자군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여겨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욕보이는 일이고 스스로가 망하는 첩경이다. 훼불사건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그들의 분격의 화살을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쏘아댈 터이니 그 책임을 어떻게 지려는가?

기독교, 그 가운데서도 특히 개신교의 일부 열광주의자들이 그런 일을 벌이는 까닭은 우선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다. 기독교 신앙은 사랑을 나누고, 그 사랑으로 서로를 품어 안으면서 인간사의 흐름이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닮아 가는 과정이 되게 하는 능력이 아닌가? 그런 사랑을 한껏 품은 사람이 누군가 정성스럽게 만들었을 불상의 머리를 동강낼 마음을 일으키겠는가? 설혹 그의 신앙관으로 볼 때 불상의 형상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라 해도 왜 그런지 불교를 믿는 상대에게 차근차근 자신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견해를 온유하고 겸손하게 풀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자신의 신앙적 삶과는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 선교의 폭을 넓혀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독선에 빠져서 상대의 공간을 인정하지 않고 정복의 대상으로만 취급하면 ‘사랑의 종교’가 그만 ‘배척의 종교’로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 배척으로 기독교는 이해심의 폭이 여타 종교보다 못하다는 세간의 평을 받게 되었고, 그로써 충분히 품어낼 수 있는 사람들조차 품어내지 못한 채 적대세력으로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 낚는 어부’의 모습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 하셨는데, 인간의 깊숙한 영혼에 다가갈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아직 채 성숙하지 못한 자기주장에 과도히 집착해서 상대의 종교적 자유의 공간을 침해하고 그로써 자신의 선교적 사명을 다했다고 여기는 것은 선교의 본령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선교의 본령은 폭력적으로 상대를 정복하거나 압도하든지 또는 굴복시키는데 있지 않고, 따뜻하고 너그러운 감동감화의 영력으로 인간의 마음에 스며드는 것이다. 그런 능력이 없는 이들이 저지르는 일이 바로 저 불상훼손사건과 같은 것이 아닐 수 없다.  


우상파괴에 대한 근본개념의 오류

이러한 기독교 신앙인들의 태도는 어쩌면 우상파괴에 대한 근본개념의 오류에서 오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를 밝히 정리하는 것은 우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는 일이다.

하나님은 나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절대적 존재로 놓지 말고, 또 우상을 새겨 섬기지 말라고 하셨다. 이때 ‘나 이외에’라는 것은 하나님이 표상하는 일체의 것과 아닌 것의 대립과 갈등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음을 뜻한다. 사랑과 돈, 정의와 권력이 만일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면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그 어떤 것도 절대적 존재로 삼지 않는 이는 아무리 돈이 좋고, 아무리 권력이 탐해진다해도 사랑과 정의를 선택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의로우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충성된 믿음은 세상의 그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근본적인 힘이다. 이것을 그렇게 새겨듣지 못하고 종교로서의 기독교 외에는 다른 일체의 것을 부인하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게 주장하면서, 기독교 자체를 하나님의 지위에 올려놓고 그 안에서 온갖 못된 짓을 하는 경우가 어디 하나 둘인가? 종교지도자들이 바로 이러한 절대론에 기대어 자신의 자리를 절대화하는 일도 또한 보기 드믄 일이던가?

이 같은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 다음의 우상론은 필연적으로 병든 신학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 함은 하나님이 지향하고 계신 가치이외의 것을 손으로 새겨 그것을 섬김의 대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앞의 말씀과 뒤의 말씀, 십계명의 첫 두계명은 같은 동전의 앞뒤이다.  

우상이 어디 손으로 새긴 일체의 것이 우상인가? 아니다. 성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섬기는 것으로 삼을 때 우상이 된다고 하는 점을 일깨우고 있다. 성전이 우상이 되어 화려한 성전건축으로 가난한 백성들을 병들게 하면, 이때의 우상은 무엇인지 말할 것도 없다. 예수님께서 하신 성전정화는 그 우상을 깬 사건이었다. 골로새서 3장 5절의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는 말씀은 우리가 인간의 내적 욕망을 추구하며 그것을 절대시하는 행위에 대해 질타하고 있다.

나아가 신도수가 우상이 되며, 당회장의 위상이 우상이 되고 권력이 우상이 될 수 있다. 학력이 우상이 되고 지위가 우상이 되며 명예가 우상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는가? 이 모두는 하나님의 길을 배반하는 첩경이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 아닌 것이 꽉 자리잡고 있어서 그것을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해도 된다고 여기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다.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이런 우상숭배의 시기는 반드시 인간의 희생을 가져왔고 믿음의 부패를 가져왔다. 경제발전이 우상이 되자 인간의 권리를 존중하는 일은 뒷전이 되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는데, 그런 성서의 가르침은 돈의 힘에 굴복하도록 되어 버렸다면 이 역시 우상숭배의 결과이다. 그런 시대와 사회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의는 저버림 당하고 그로써 인간의 깊은 슬픔과 고뇌만이 강이 되어 흐를 뿐이다. 사람이 사람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보다 돈이 더 대접받는, 돈이라는 우상이 최고의 주인행세를 하는 거꾸로 된 세상이 존재한다.  


진짜 우상의 목을 베는 길

그러고 보면, 다른 종교에서 우상을 찾을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자신의 신앙체계 속에서 우상이면서 우상 아닌 척 하고 버젓이 버티고 있는 것들부터 찾아내서 사라지게 해야 한다. 그런 진짜 우상의 목을 베는 것이 우리가 할 도리가 아닐까?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꽉 채워서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하고 있는 것들을 내보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겉모습은 신앙인이라면서, 정작 주님만이 머무를 마음의 처소가 헛된 우상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손으로 만든 조상(彫像)들을 아무리 많이 허문다한들 그것이 진정한 우상격파의 작업이 될 수 없다.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공동체 내부에 이미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무수한 우상들을 찾아내서 그것이 하나님 대신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이끌고 굴러가게 하는 일을 저지하지 못하면, 우리는 우상 섬기는 자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마음을 품지 못할 때 우리는 만사를 무소유 속에서 너그럽고 빈 마음으로 대하는 탐욕 없는 이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훼불사건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불상의 머리를 잘라내는데 불과했지만, 우리의 우상 섬기기는 그리스도를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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