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은 하는 신문'
'바람이 불어도 누군가는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소위 1등 신문 <조선일보>를 홍보하는 문구들이다.

이런 문구는 올곧고 외압에 굴하지 않는 '정론직필'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과연 그렇다면 많은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들에서 <안티조선일보> 운동이 거세게 일고 있는 것은 왜일까. 더욱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등 기독교 21개 단체가 신문개혁연대라는 단체를 만들고 조선일보 회개 기도회까지 열고 있는 것일까.

충북 옥천의 '조선바보(조선일보 바로보기 시민모임,mulchong.com'은 "거짓말하는 신문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스스로를 설명한다.


'거짓말'

신문개혁기독교연대 또한 <조선일보>의 '거짓말'에 가장 초점을 맞춘다. 특히 <조선일보>의 '역사 왜곡'은 우리 시대 '바른 의식'이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하고 기득권과 편법에 의지하는 나쁜 풍조를 발생시켰다고 보고 있다.

'<조선일보>를 향한 흉기'가 되겠다는 자처하는 월간 <말> 정지환 기자는 <조선일보>가 △우리 역사에서 할 말을 했는가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았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정 기자는 '신문개혁기독교연대'가 최근 개최한 <왜 조선일보를 반대해야 하는가>라는 세미나에서 <조선일보>가 결코 기록하지 않고 있는 출생의 비밀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20년 <조선일보> 창간의 주체는 <대정실업>이라는 친일 경제인 단체다. 천황의 연호인 '다이쇼(대정)'를 이름으로 사용한 것에서 보듯 <대정실업>이 친일 단체인 것은 분명하다. 결국 <조선일보>는 태생에서 보듯 친일 신문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완용과 더불어 친일파의 양대 거두인 송병준은 무려 3년 6개월 동안 조선일보 판권을 소유했다."

친일 단체 <대정실업>이라는 자궁에서 잉태한 조선일보의 그 후 행보 역시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1931년 겨울 이봉창 열사의 일본천황 폭탄 투척 사건을 조선일보는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그해 1월 10일자 조선일보는 이 사건을 '천황폐하께옵서 조선 경성 생 이봉창으로부터 폭탄투척 사고를 당했다'는 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군은 '공비' '비적' '불량인'으로 묘사됐다.

그러나 이봉창 열사 사건을 항일투쟁으로 보도한 것은 '외신'이었다. 중국의 <국민신보>와 러시아 언론은 이 사건을 항일투쟁이라고 기록했다. 우리 언론이 아닌 이민족의 언론에 의해 민족의 진실이 기록되는 슬픔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됐다. 중국의 한 언론은 이런 보도 때문에 일본 거류민단의 습격까지 받기도 했다.

그래도 <조선일보>는 '일제시대 친일을 했다면 왜 폐간되었겠느냐'는 식의 논리로 애써 민족지임을 강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1940년 8월 11일 <조선일보> 폐간사를 보면 보다 명확한 진실이 드러난다.

당시 사주 방은모씨는 폐간사에서 "조선일보는 신문통제 국책 순응과 동아신질서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폐간한다고 밝히고 있다. 즉 강제로 폐간된 것이 아니라 일제 통치체제에 순종하기 위해 스스로 문을 닫아 건 것이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폐간의 대가로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해 약 300억 정도의 보상금을 받아 챙겼다.

또 일본이 진주만 기습 전쟁을 앞둔 전시체제 속에서 조선총독부 기관지 대한매일만 남기고 모든 언론을 통폐합하는 시점에서 이뤄진 <조선일보> 폐간을 민족지 논쟁의 빌미로 삼는 것도 사실 적합치 않다.

폐간 후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 사장은 너무나 명확하게 친일적 행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모습은 민족지 사주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인다. <조선일보> 폐간 후 시사월간지로 확대된 <월간조선> 전신 <조광>은 1944년까지 "한일합방은 조선의 행복이다"고 말할 정도의 친일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조광>은 우리 언론이라기 보다 일본의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그런데 사주 방은모씨는 스스로 "조광을 통해 조선일보의 혼과 넋을 살리겠다"고 공언했다. 그렇다면 <조광>의 행태는 곧 조선일보의 과거 행적의 연장선에 있는 셈이다.

이런 과거사에 대해 조선일보는 어떤 식으로 변명하고 있을까. 소설가 이문열씨는 조선일보 기고문에서 "나도 일제치하에서 친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제 치하에서 친일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을 것이라는 논리 전개다. 실제로 이런 논리는 많은 <조선일보> 독자들에게 먹혀들고 있다.

이씨가 말하는 '친일 개념'은 어쩔 수 없는 '생계형 친일' 같은 소극적 친일의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일보>가 어쩔 수 없어서 '친일'을 했다면 이제 와서 무턱대고 손가락질을 해댈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과연 이런 소극적 친일에 머물렀을까. 위에서 예시한 몇 가지 사례들이 생계를 위한 소극적 친일이었을까. 정지환 기자를 비롯해 안티 조선일보 단체들은 단연코 "부귀영화를 위한 적극적 친일이다"고 못 받는다.

일제시대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이 이 정도였다면 그 후 역사에서 조선일보는 과거사를 반성하고 할 말을 하는 신문, 흔들리지 않는 신문으로 위치를 고수해 왔을까.  

그러나 최근 <월간조선>이 목회자 100여명에게 반공이데올로기와 극단적인 이분법 잣대를 도입한 설문을 돌리고, 이를 기초로 기독교 보수 우익이 친북세력에 맞서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수구적 자세를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다.  

결국 <조선일보>와 한 배를 타고 있는 <월간조선>의 모습은 과거 <조광>시절의 해묵은 습성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시점을 1980년 광주민주항쟁 당시로 옮겨 보자. <조선일보>는 당시 어디에 있었는가. 모 시사주간지가 9년 연속 영향력 있는 언론인 1위로 뽑은 조선일보 주필 김대중씨는 전두환 군부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전개된 광주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민주화 투쟁에 나선 광주 시민들을 난봉꾼으로 묘사했다. 그는 철저하게 전두환 군부의 시각에서 이 민족의 아픈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1등 신문 조선일보 역시 당시 대다수 언론과 지식인들과 함께 전두환 군부의 편에서 역사를 기록하고 또 합리화했다.

그러나 오직 외신들만이 광주항쟁의 진실을 말하고 있었을 뿐이다. 80년 5월 25일 AP 통신은 "광주 시민들은 오직 민주주의란 대의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라고 쓰고 있다.
  
1931년 이봉창 열사 사건 이후 반세기가 지났지만 우리 민족은 <조선일보>와 같은 언론에서 왜곡된 역사만을 볼 수 있었고, 역사적 진실은 오직 외신을 통해서만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문개혁기독교연대 공동회장 김광수 목사는 "일그러진 역사 즉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바로 보기 위해 이제 조선일보는 극복의 대상이다"고 말하고 있다.

또 신문개혁연대 집행위원장 정진우 목사는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무엇이 바른 것인가를 제대로 파악하는 시대를 만들기 위해 현재 국민 여론에 최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신문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그 신문의 역사가 잘못되었다면 이제 시민들이 나서서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정 목사의 얘기는 곧 기독교가 왜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는지를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만일 조선일보를 바로 보지 않고 역사를 얘기한다면 우리가 일본의 교과서 왜곡을 비난할 아무런 자격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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