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민속명절이 되면 한국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한두 번 난처한 입장에 처한 경험을 하였을 게다. 특히 일가(一家) 전체가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고 몇몇만 기독교 신앙을 갖은 가정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이 때만 되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차례 지낼 때 하는 제사행위를 무시할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게다. 한가위를 맞아 차제에 세시풍속의 유래를 살펴보며 한국문화와 기독교 신앙과의 갈등문제를 조금이나마 좁힐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자 한다.

1. 칠월 칠석
7월 7일은 옛날부터 칠석(七夕)이라고도 하고, 칠석절(七夕節)이라고도 한다. 지방과 가정에 따라서는 칠석제(七夕祭)를 올리거나, 절(寺)의 칠성각에 가서 불교의식에 따라 공양칠배(供養七排)하는 곳도 있고 사람도 있어 작은 명절로 친다.
  
원래 칠석날 저녁에 소년들은 견우성과 직녀성에 대한 시문(詩文)을 짓는다. 처녀들은 경우성과 직녀성에게 바느질 솜씨가 늘도록 빌었다는데, 현재는 이어져 오지 않는 것 같다.

칠석에 대한 설화가 몇 가지 있다. 하나는 칠석날 새벽에 지상에 있는 까치들이 전부 하늘의 은하성(銀河星)에 모여 저쪽의 견우(牽牛)와 이쪽의 직녀(織女)가 서로 만나 그리웠던 회포를 풀고, 정담을 나눌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오작교(烏鵲橋)이다.
  
이 오작교 위에서 견우와 직녀는 서로 만나 애틋한 정담을 나누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칠석날 저녁에 비가 내리면 둘이 만나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요, 다음 날 새벽에 비가 오면 이별의 슬픈 눈물이라고 한다.

1년에 한 번 잠깐 만났다 헤어지는 견우와 직녀, 얼마나 기다렸던 칠석날인가, 얼마나 뼈아픈 이별이었던가. 전설이지만 실감나는 이야기다.

까치들이 머리 위가 흰 것은 멀고 먼 은하성까지 가서 다리를 놓아주고 오느라 고생을 많이 한 까닭으로 하얗게 새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전설은 하늘의 황제 옆에 선남선녀(여기서는 왕녀와 왕의 시종청년)가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이 공부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으며 매일 만나서 연애만 하고 있었다. 수차 꾸짖고 주의를 주었으나 마이동풍(馬耳東風)이므로 황제는 크게 화를 내어 은하강 양쪽에 하나씩 떼어놓는 벌을 주었다. 견우와 직녀는 만나고 싶은 심정과 그리움을 못 이겨 매일같이 은하수 저편의 애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울고 지냈다. 이것을 눈치채고 바라보던 까치들이 회의를 하여 '년에 한 번 다리를 우리 몸으로 놓아 둘이서 만나게 해 주자' 결의하여 매년 칠석날 만나게 해 준다고 한다.

이것은 고대 농경사회 시대, 밭 갈고 길쌈하는 두 남녀의 지극한 사랑을 어쩔 수 없는 숙명적인 운명으로 처리한 세속적인 전설이다. 자유연애의 전성기인 현대의 청춘남녀에게는 다소 저항감이 맴도는 설화지만, 그 속에 깊이 담겨 있는 청춘남녀의 애틋한 심정은 이해할 만하다.

또 칠석날을 중심으로 옷을 말리는 풍습(폭의 : 曝衣)과 책을 말리는 풍습(쇄서 : 灑書)도 있어 지금도 그러한 일을 하고 있다. 긴 장마철 지나 습기에 찼던 책과 의복을 말리고 소독해 두는 일은 당연한 것이요, 과학적인 생활태도이다.

2. 백종일(百種日)
7월 15일은 백종일, 백중절(百中絶) 또는 망혼일(亡魂日)이라고 한다. 불가에서는 7월 중원(보름날)에 승려들이 재를 올리고 불공을 드리는 명절로 삼고 있다.

백종일은 백과가 무르익는 때라, 불가에서는 물론 일반 백성들도 이 날 달밤에 어버이의 혼령에 대해 제사를 지냈다. 선인들이 조상을 받들고 섬기는 정성을 알 수 있다.

중국 양대(梁代)에 편찬된 《형초세시기》를 보면, 중원날 승니(僧尼)·도사(道士)·신도(信徒)들이 이 날 분(盆)을 만들어 절에 바친다고 하였다. 이것이 신라에 전래되어 풍속화되고, 고려 때 풍속에도 우란분회(盂蘭盆會)를 베풀었다. 이것은 재를 올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중원날쯤이면 백과(百果)가 무르익는 때이다. 승려와 신도는 물론 일반 백성들이 이 날 달밤에 어버이의 혼령에 대하여 제사를 지냈다. 그래서 이 날을 망혼일(亡魂日)이라 한다. 지금도 이 풍습이 남아 있으니 우리 선인들이 조상을 받들고 섬기는 정성을 알 수 있다.

또 농촌의 머슴을 둔 가정에서는 머슴들이 농사짓기에 수고하였다하여, 돈을 주어 하루를 쉬게 하였다. 대개 머슴들은 장에 가서 술을 마시고 흥에 취하여 씨름판에 가서 한 판 논다. 어떻게 보면 머슴들의 즐거운 명절이기도 하다. 지금은 머슴제도가 없어지고 잘들 살고 있으니 다행한 일이다.

또 신라의 옛 풍속에 왕녀가 6부의 여자들을 이끌고 7월 15일 기망(旣望)때, 궁중의 넓은 뜰에 모여 길쌈을 시작하여 8월 보름날까지 계속하게 하고, 그 질과 양의 많고 적음을 따져 승패를 결정하였다. 진 편에서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이긴 편을 대접하면서 노래와 춤으로 밤을 새웠다 한다. 그것이 8월 15일 한가위이다. 그 때 불렀다는 노래가 〈회소곡(會蘇曲)〉이라 하는데 현존하지 않는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듯 근면한 생활을 지속하였다.

베를 짜는 습속은 삼국시대 초기부터라고 생각된다. 그 때에는 목화(木花)가 없어서 무명 옷감을 만들지 못하였고 삼(저마 : 苧麻)을 베어 삶아서 그 껍질을 벗겨 그것으로 길쌈을 하였다. 삼을 재배하고 베어오는 것까지는 남자들이 하고 그것을 삶아 껍질로 베짜기를 한 것은 주로 부녀자였다. 그 후 누에를 길러 명주를 짜서 고급의복과 이불 요를 만들었다.
  
베를 짜는 동안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것이 베틀노래이다. 각 지방에서 불렀던 베틀노래는 많은 자료가 남아 있다. 이 베짜기는 농한기인 7월 중원에서부터 팔월 한가위까지 지속되었고, 각 가정에서 들리는 베짜는 소리와 부녀자들이 부르는 베틀노래가 흥겹게 들렸다.

이 노래와 베짜는 소리는 태평성세의 상징적인 나타냄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갖가지 섬유물이 문명의 이기에 의하여 다량 생산되고 있으므로 편리한 세상이다.
  
3. 호미씻기
농가의 바쁜 일도 끝나 좀 한가로운 때가 되었다. 대개 7월 중순을 전후하여 호미에 묻었던 흙을 깨끗이 씻는다. 망가진 것은 대장간에 가서 잘 수리해다가 걸어 놓고 쉰다.

호미씻기날은 머슴날, 또는 초연(草宴)이라고 한다. 대개 그 마을 형편에 따라 날을 선정한다. 각 가정에서는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산과 들과 계곡을 찾아가 농악을 울리며 노래와 춤으로 하루를 흥겹게 논다.

또 그 동네에서는 농사가 가장 잘 된 집의 머슴을 뽑아 성실하게 부지런히 일을 잘 했다고 칭송해 주고, 술과 음식을 권하여 한껏 이로 격려해 준다. 그리고 나서는 삿갓을 씌우고 소 위에 태운 후, 동네를 한바퀴 돌게 한다.

그 모습이 장관이라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환성을 지르고 박수를 쳐주었다. 이 때야말로 머슴은 주인이 된 기분, 왕이 된 기분이다. 그러노라면 그 머슴의 주인은 영광이라 하여, 술과 음식을 차려 동네 사람들에게 한턱 낸다. 이 때에는 주종관계(主從關係)와 신분의 상하를 떠나서 평등한 인간관계의 정을 통하고 맺어간다.

호미씻기날은 머슴의 날이다. 이 날은 근로의 결실에 따라 농사가 잘 된 집의 머슴을 뽑아 성실하게 부지런히 일을 했다 하여 술과 음식을 권하며 한껏 격려해 주기 때문이다. 주인은 하인(머슴)을 아끼고 소중히 여겨 한식구처럼 토닥인다. 하인은 자기 일 이상의 정성과 힘을 내어 주인집 일을 돌보아 주는 풍습, 이것이 상부상조(相扶相助)의 아름다운 정경인 동시에 한국적인 미풍양속이다.

칠석날 견우와 직녀가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애틋한 심정과 행동, 말 못하는 까치들의 결사적 희생적인 다리 놓음, 하늘의 황제의 노여움과 견우 직녀에 대한 벌 등, 이것은 우리 인간사회의 현실 생활을 반영한 실감 있는 전설이다.

부녀자들의 베짜기와 베틀노래의 흥겨움, 그 부지런하고 섬세한 근로의 결실, 머슴들의 호미씻기의 휴가와 위로 격려, 대접받음의 흐뭇한 점은 우리 인간만이 가지는 가치 있는 습속이요 생활이다. 이 속에 우리 선인들의 얼과 말과 깊은 정이 스며 있다.

이러한 아름다운 그리고 흥겨운 정경이 천년 만년 가고 지고했으면 한다. 또한 이러한 문화와 함께 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런 아름다운 우리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여 더 감칠맛 나며 그리하여 모든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거부반응을 주지 않는 한국의 기독교 문화로 성장해 가길 바란다.

4.
이제 다가오는 시대는 문화 문명을 존중히 여기는 시대가 온다. 고등문화와 미개문화라는 문화차별의 시대가 사라지고 자문화를 존중하는 문화 문명의 개성화 시대가 열린다. 문명충돌을 말한 새뮤얼 헌팅턴에 의하면 문화와 종교는 문명의 한 속개념이다. 이는 문명의 충돌은 문화의 충돌과 종교의 충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문명의 충돌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자문명문화 존중의 시대에 부응하여 한국인들도 또한 한국문화를 지금보다 더욱 아끼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미 한국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아끼기 위하여 문화공보부에서 특별한 행정적 관심을 갖고 있으며 많은 민간단체들이 협력하며 참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역마다 전통문화재를 관리하기 위하여 특별기구를 설치하였으며 전통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들에게 국가에서 특별한 예우를 하고 있는 것들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이러한 때에 기독교인들이 한국문화에 대하여 배타적인 감정을 갖고 바짝 긴장된 눈초리로 한국전통문화를 바라보게 된다면 이것이 기독교 복음 전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는 불을 보듯 뻔한 사실 아닌가. 이제 기독교인들은 변화하는 시대에 새로운 신학적 안목으로 한국문화와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기독교 문화는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는 각 나라에서 주체적으로 창조되고 발전되어야 한다. 각 민족에게 맞는 옷으로 갈아입은 복음만이 그 민족의 심성에 맞는 메시지를 생산해 낼 수 있다.

서양 선교사들에 의하여 한국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올 때 서양 선교사들은 그들의 시각으로 한국문화를 판단하여 한국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우상시 해 버렸다. 그리고 그들 밑에서 신앙을 배운 우리의 선배 신앙인들은 문화적인 면에서 몰주체적으로 그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다. 그 후유증이 지금까지도 남아 한국문화와 기독교 신앙은 서로가 배타적인 감정으로 화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복음만 가지고 왔으면 되는 데 복음에 서양 옷을 입혀 들여오니 그 옷이 한국인의 체형과 체질에 맞지 않아 서로 불편한 관계일 수밖에.

이제 한국은 세계 120개국 이상의 나라에 3000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한 복음 수출국 복음 강대국이 되었다. 이쯤에서 우린 문화적 몰주체적 자아를 반성하고 한국문화의 토양 속에 잘 뿌리를 내리고 성장해서 달린 개성 있고 튼실한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 이것이 없이 우린 복음 수출국이요 강대국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서양 선교사들의 심부름꾼 역할만 할 뿐이다.

또 다시 돌아온 민족공동체의 축제며 가족공동체의 만남의 장인 한가위. 올해는 연휴가 길어 더욱 좋구나. 비가 개이고 남산에 보름달이 뜨면 우리가족 우리 마을사람 모두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수월래를 부르며 신명나게 춤이나 한번 추어보자.

<강강수월래>

사랑 창창 뒷창 밖에  강강수월래

건너 초당 내다 보니  강강수월래

범나비가 앉았길래  강강수월래

그 나비를 쳐다 보니  강강수월래

이천 자 배운 글을  강강수월래

적수만강 다 잊었네  강강수월래

서당 안의 학도들아  강강수월래

서당 밖의 학도들아  강강수월래

선생 앉은 눈을 보라  강강수월래

꿩철 타는 매눈이다  강강수월래

우리 부모 오시거든  강강수월래

매애 갱개 갔다 말고  강강수월래

글에 반해 갔다 하고  강강수월래

안새 안뜰 사랑 앞에  강강수월래

얀약하다 봉사리꽃  강강수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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