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음자리표의 맨 아래 줄에 덧줄을 두개 더 붙인 '도(C)'음을 피아노 건반으로 쳐 보라. 크게 쳐도 되고 작게 쳐도 된다. 친 다음에 길게 누르고 있으면 된다. 일단, 매우 당연하게, 도 음이 크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귀기울여 들어 보라. 도 음이 아닌 다른 음이 섞여있다. 아니, '묻어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옥타브 위, 혹은 두 옥타브 위의 도 음과 솔, 미, 내림시(B♭)음도 들린다.

음의 존재원리, '관계'

잘 안 들리는 분들을 위해 조금 더 쉬운 방법을 알려주겠다. 역시 위와 동일한 위치의 낮은 도 음을 왼손으로 소리나지 않게 천천히, 살며시, 지그시 누른다. 소리가 절대로 나면 안 된다. 누른 채로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 오른 손가락으로 옥타브 위의 도 음을 아주 세게, 아주 짧게, 과감하게 내리친다. 망치로 내리치듯. 그러면 도음은 빵, 하고 울렸다가 금새 사라지고 위에서 열거한 음들만 남는다. 지금 당장 시도해 보시라.

...지금 막, 시도해 보신 분들에게만 질문을 드린다. 그게 뭘까?  이 미세하고 신비스런 음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누구도 외딴섬이 아니다'

기적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미 당신 안에 일어나고 있는 기적에 눈을 뜨길 바란다. 한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만큼 놀라운 기적은 없다. 당신이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이다.

한사람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일단 부모가 있어야 한다. 그 부모의 만남, 그것부터가 기적이다. 그 부모에게서 하필이면 당신이 그 날 태어난 것도 기적이다. 당신이 지금 멀쩡히 살아서 이 글을 읽고 있는 것도 기적이다. 정말 신비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놀라운 것은 당신이 존재하기 위해 부모 말고도 무수한 다른 사람들의 역할이 필요로 했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 보라. 살아온 길목 어귀 어귀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친구들, 선생님, 사랑의 상처를 주고 떠나간 사람, 당신을 감동시킨 그 책의 저자, 당신을 울려버린 그 영화의 감독, 당신을 예배당으로 인도한 그 사람...
어느 소설가는 이를 두고 아주 예쁜 말을 만들어 냈다. '길동무.'

그렇다. 길동무들이다. 한사람이 살아있기 위해 수많은 길동무들을 필요로 한다. 그 길동무들과 얽히고 섥힌 '관계'속에서 당신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서 당신의 인격이 형성되고 가치관이 빚어지며 당신의 정서와 성품과 문화가 만들어진다. 동시에 당신 역시, 다른 사람의 길동무로 존재한다. 다른 사람의 존재를 위해 길동무로서 일정한 역할을 하며 살아왔다.

혹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분이라면 당신은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길동무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동시에 당신은 더 많은 사람들의 길동무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시인 존던은 이를 두고 이렇게 읊조린 적이 있다. "그 누구도 외딴섬이 아니다." 그렇다. 누구나 길동무이다. 기적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길동무, 그것이 인생이다. ...참 신비스런 일 아닌가?

'그 어떤 음도 외딴섬이 아니다'

내가 해보라는 대로 피아노를 쳐 본 사람들은 모두 느꼈을 것이다. 그 신비스런 음향, 이를 두고 음악용어로 '배음(Harmonics)'이라고 한다. 명사 끝에 복수가 붙었으니 '배음열'이라 해 두는 것이 좋겠다.

모든 음은 스스로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하나의 음은 여러 음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의 음을 쳤을 때 울려나오는 그 신비스런 사운드의 음열은 그 음의 배음들, 즉 길동무들이다. 그러니까 그 길동무들과 얽히고 섥혀 하나의 음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 결과가 우리의 귀에 들려오는 것이다. 배음열이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이치는 바로 이것이다.

나의 지론에 아직도 의심이 가는 분들은 지금이라도 피아노를 쳐보고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그냥 감상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과학적인 논증이니 말이다. 배음열을 악보로 보기 좋게 나열하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면 흡사 음악이론수업 같은 기분이 들터이니 그만 두겠다. 대신 솔미제이션으로 나열해 보겠다.

도 -> (옥타브 위)도 -> 솔 -> (두옥타브 위)도 -> 미 ->솔 -> 내림시, 일단 여기까지는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있다. 그 다음부터는 귀로 들리지 않는다. 특수장치를 하면 들을 수 있지만. 안 들리니 나열하는 것도 생략한다.

배음열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려면 '진동'에 대한 설명이 또 필요하지만 이것도 생략한다. 내가 자주 경험해 본 바인데, 이미 여기까지만 설명을 해도 머리가 복잡한 사람이 참 많았었다. 다만, 꼭 기억해 두길 바란다. 모든 음은 혼자 따로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떤 음도 외딴섬이 아니다".

그렇다. 길동무이다. 기적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길동무.
그래서 배음열은 그토록 신비스런 음향으로 우리의 귓전를 방문하는 것이다.

음정, 음과 음의 관계

그렇게 해서 존재하게 된 음(音)은 하나의 '악(樂)'이 되기 위해 다른 음들과 이러저러한 관계를 맺는다. 이런 의미에서 음악이란 음과 음의 관계 미학이다. 좋은 관계를 형성하려는 의지, 그것이 음악의 창작원리이다.

음과 음이 서로 엮어지는 것을 '음정'이라 하는데 영어식 표현은 Interval이다. 흔히 이 말을 '거리'로 해석한다. 그러나 나는 '관계'로 해석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음과 음의 거리가 아닌 음과 음의 관계 - 이것이 음정에 대한 올바른 정의이다. 사람과 사람의 거리가 '관계'이듯이.

음과 음의 관계, 즉 음정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가감 없이 투영되어 형성된다. 살다보면 서로 이끌리는 관계가 있다. 엄마, 아빠, 애인, 맘이 맞는 친구 등등이 그렇다. 음악에서는 그것을 협화적 음정이라고 부른다. 가령, 도와 미 같은 3도나 도와 라 같은 6도 등이 그렇다. 반대로 서로 적대시되는 관계가 있다. 불협화적 음정이 그렇다. 2도나 7도는 대표적인 불협음정들이다. 적대시되는 관계에도 정도가 있다. 잠시 마찰을 빚은 정도의 사이가 있다면 철천지 원수지간도 있다. 가령 도와 레 같은 장2도와 도와 시 같은 단2도를 비교해 보라. 앞의 것이 일시적인 마찰관계 정도의 음정이라면 뒤의 것은 마치 철천지 원수지간 같은 음정이다.

어디 그 뿐이랴. 동성의 관계와 이성의 관계가 있다. 똑같은 협화음정이지만 완전4도나 5도, 솔미제이션으로 도와 파나 도와 솔 등은 두음의 관계가 동성지간의 관계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건조(?)하다. 그에 비해 3도나 6은 한층 풍성한, 화사롭고 뭔가 끈적끈적한 느낌을 주는 음정이다. 이를테면 앞의 4도나 5도 음정에 비해 꽉 찬 느낌을 주는, 완성된 관계 같은, 남과 여의 관계, 이성관계이다.

심지어는 두음의 관계가 서먹서먹한 느낌을 주는 음정도 있다. 시와 파 같은 음정들이다. 불협화적인 음정이 난무하는 곡에서는 협화적으로 들리고 협화적인 음정들이 주류를 이루는 음악에서는 불협화적으로 들린다. 스스로 독특한 성격을 갖지 못하는 애매모호한 관계, 사람사이에도 그런 관계가 얼마나 많은가?

음악은 이렇듯 사람 사는 이치를 쏘옥 빼 닮았다. 마치 거울을 마주보듯이 음악은 사람이 살아가는 원리를 반영한다. 아름답고 선한 관계가 있는가 하면 부딪히고 싸움 박질 하는 관계도 있다. 음정뿐만 아니라 배음열도 마찬가지이다. 배음은 그 바탕음과 잘 어울리는 길동무도 묻어 있지만 불협화적인 길동무도 포함되어 있다. 미운정, 고운정 쌓으며 살아가는 사람의 세상사와 정말, 똑같다.  

다시 한번 권한다. 혹시 나의 지론에 의심이 가는 분들은 위에서 열거한 음정들을 피아노로 쳐 보라. 따로 따로 펼쳐서 치지 말고 두음을 동시에 쳐 보라. 그리고 열거한 음정들을 서로 비교해  보라. 틀림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아니면 무릎을 탁, 하고 치게 되거나.

관계가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다. 외톨이가 되는 것이다. 관계가 단절되면 그 마음 안에 반항과 파괴의 심장 박동수가 늘어난다. 이기심과 냉소주의가 판을 치게 된다. 한마디로 삐딱해지는 것이다. 그러다가도 관계가 회복되면 다시 그 마음 한복판에 선한 가치가 눈을 뜨게 된다.

관계, 그것은 사람의 본질적 속성이다. 사람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니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관계를 맺지 않는 것, 그것은 곧 죽음이다. 사람이 관계를 빚어내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다.

음악도 그렇다. 음과 음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음이니까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이미 배음에서 확인한 것처럼, 그 음 하나만으로도 무수한 '관계'의 울림이 묻어 나오듯이 모든 음은 관계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음악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라. 우리는 음을 듣는 것이 아니다. 소리 그 자체의 진동을 듣고 측정하는 것이 아니다. 음과 음의 어우러진 결과를 듣는다. 이미 '관계'로 존재하고 그렇기에 '관계'하며 활동할 수밖에 없는 음악, 그 관계의 울림을 듣는 것이다. 힘들 때, 외로울 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혹은 즐거운 일이 있을 때, 누군가에게 소리치며 자랑하고픈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음과 음이 자신의 본질적인 '관계'의 흐름에 따라 어우러진 음악, 그 아름다운 음악을 선택해 듣고 싶어하는 것이다.

음악을 듣고 싶어하는 이유, 그것은 '관계'에 대한 갈증 때문이다. 사람과 음악도 이렇듯 '관계'한다. 끊임없이. 어쩌면 음악만큼 오랜 길동무는 또 없을지도 모른다.

관계의 주인은 누구인가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길동무들이 당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하나의 음이 존재하기 위해 수많은 음들의 관계가 묻어있듯이. 그 음은 다시 다른 음들을 위한 길동무로 신비스러운 울림을 형성한다.

당신이 다른 벗들의 길동무로 살아왔듯이. 어쩌면 이것은 '값없이 받은 은혜'이다. 엄마와 아빠와 친구와 선생님과 사랑하는 연인... 이 모든 길동무들과 더불어 존재하게 된 당신, 이것은 아무 값없이, 공짜로 받은 은혜이다. 어찌 할 것인가?

하나의 음이 다른 음과 어우러지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 묻어있는 그 배음열의 관계에 충실해야 한다. 그 배음열의 질서에 맞게 다른 음과 관계해야 한다. 사람도 그렇다. 자신이 값없이 받은 그 은혜에 힘입어 수많은 벗들의 길동무로 관계하며 살아야 한다.

왜? 그 관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그 관계 한복판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래서 인간도 음악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의 사는 꼴을 쏘옥 빼 닮은 이 음악의 관계미학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류형선/한양대 작곡과를 나와 우리 정서에 맞는 민중가요, 우리가락 찬송 등을 보급하는 일에 힘쓰고 있으며, 노래모임 '새하늘과 새땅'을 책임 맡아 일했다. 최근에는 한국종합예술학교 국악작곡과에 입학하여 한국음악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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