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교회들은 최근 교회개혁이라는 어려운 과제 앞에 서 있다. 이 과제는 교회 밖에서 누군가가 풀어줄 수 있는 과제가 아니고, 스스로 풀어가야 한다. 그러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는 문제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당 건축은 교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좋은 비판 자료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건축은 그 시대 그 사회를 반영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교회당 건축의 모습도 그 시대 그 교회의 모습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우리 교회들의 모습은 우리 교회들이 그 동안 지어서 사용해온 교회당 건물의 모습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우리 교회들은 그 동안 교회당을 크고 웅장한 모습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경쟁적으로 더 높이 더 크게 짓기를 원했던 우리들의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는 물론, 다른 교회들에 대해서도 자만심과 우월감과 독선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의 실증적인 표현일 것이다. 다른 교회보다 우리 교회가 더 크고 더 많은 교인들이 모인다는 것을, 마치 우리 교회에는 더 큰 구원이 있고 천국에 더 가깝고, 그래서 더 많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이를 교회당 건축을 통해 표현한 것이 아닐는지? 어쩌면 우리들의 교회가 가진 부와 세를 세상에 내보이고 싶어했는지도 모르겠다.

육중하고 폐쇄적이며 권위적인 우리들의 많은 교회당은 세상에 대해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집이라는 점에서는 성공했을른지 모르나,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섬겨야 하는 우리 교회의 사명을 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 교회들은 교회당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어했다. 현관 홀이나 대예배실에 값이 비싸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재료를 사용하였다. 강단 위 천장에는 샨데리아를 늘어뜨리고, 강단 위에는 화려한 꽃 장식과 값이 제법 나가 보이는 고급 원목을 사용하여 포도송이와 희랍과 로마시대의 기둥장식을 덧붙인 설교단과 제단, 그리고 사회단 등 강단의 넓이가 모자라 더 올려놓지 못할 만큼 배열하기도 하였다.

개신교의 예배당처럼 홀 형식의 공간이 악기를 제대로 울려주지 못하는 것도 모르고 엄청난 비용을 투자하여 파이프 오르간을 강단 벽에, 그것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장식하는 일도 유행하였다. 이는 어쩌면 교회당은 성전이며 강단은 성단으로 하나님이 이곳에만 계심을 강조함으로써 교인들을 교회 안에 붙잡아 놓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성전에 나아와서 제단에 엎드려 기도해야만 응답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많은 교인들이 교회당 안에서도 특별히 예배당을 장식하는 일에, 그것도 강단의 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지정하여 특별헌금을 하는 일은 교회마다 흔한 일이었다. 새로운 교회당 건축시 어느 권사나 장로가 또는 돈 많은 집사가 그 예배당 건축공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샨데리어나 강대상 또는 고급 그랜드 피아노를 헌물하는 경우 설계를 담당한 건축가는 물론 담임목사도 난감해 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우리의 수많은 교회들은 그 동안 소위 고딕식 교회당을 건축해 왔고, 심지어는 고대 희랍과 로마 신전의 건축양식도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도 고딕 흉내를 낸 교회당들이 도처에 건축되고 있다. 이것은 중세 고딕성당의 아름다움을 동경해서 일까 아니면 오직 자신들의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던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광을 동경해서 일까?

최고의 권세와 부를 누리던 중세 교회의 대부분의 성직자들, 그들은 교회의 예배까지도 그들만의 것으로 독점했고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미명하에 자신들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았는가?

많은 우리들의 교회당에서 우리는 내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면서 밖의 치장에만 열심인 교회들을 흔히 본다. 심지어는 잘 보이는 교회당 앞부분에는 값비싼 돌로 치장하고 조금 덜 보이는 옆이나 뒷부분은 값싼 재료를 붙인다. 공사비를 아끼는 마음이야 이해되지만 아름다움은 값비싼 돌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여러 가지의 재료를 혼합한 건축은 그 교회의 이미지를 혼란케 할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사회의 이중성이며 또한 교회의 이중성이기도하다. 우리는 겉으로 번지르르하게 꾸미면서 내면의 충실을 기해오지 못한 사회 속에서 살아왔고, 교회 또한 하나님의 참 사역에 충실하지 못하고 형식에만 매달려 왔다.

주일마다 형식적으로 참여하는 예배로부터, 시간만 때우는 교회학교 교육들, 얼마 되지 않는 돈을 쪼개 선교사 파송 숫자를 늘이는데 급급한 선교정책들, 일년에 몇 번 행사처럼 치루는 양로원과 고아원 방문으로 이루어지는 사회봉사들은 형식은 갖추었으나 별로 내용이 없는 즉, 진정한 교회의 사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군대 막사 같은 교회의 식당이나, 마당은 물론 예배 후에 잠시 머무를 곳도 없이 닫혀진 방들로만 채워진 교회당은 별 볼 일없는 교인들은 예배만 드리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뜻이고,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 공동체이며 교회의 본질이 성도의 교제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함이 아닐까?

주택들이 밀집된 동네 한가운데에 거대하게 서 있는 교회당들이 인접한 주택들에게 형태적 위화감을 줌은 물론 소음과 일조권과 교통혼잡으로 피해를 주면서 법적으로 아무 하자 없다고 주장함은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의 사명을 망각하고 구원받은 우리들만 하나님께 잘 보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오만과 독선이 아닐런지?

교회당 건설 현장에서 교회의 중직을 맡은 장로들이 세상에서 이권을 놓고 하듯 서로 다투고, 시공자를 향해 일방적이고 권위적인 태도를 취하고, 일꾼들을 향해 부당한 시비를 한다면, 이것은 아직은 신자가 아닌 많은 일꾼들이 교회로 오는 길을 막는 일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교회당 건축을 하지 않는 편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옳은 일이 아니겠는가?

요즈음 교회당 건축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일이 음향이나 영상설비, 인테리어 등으로 거금을 투자하는 일들인데 이러한 일이 너무 쉽게 결정된다. 어느 교회 가보니까, 무슨 스피커와 마이크를 썼더라, 무슨 영상기기를 썼는데 참 좋더라 하면서 공사비는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면서 수천, 수억원씩 쉽게 투자하는 것을 보면서, 신자가 아닌 시공자들은 교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헌금을 귀하고 가치 있게 사용하는데 우리 교회들이 보다 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교회당 건축에는 우리 교회의 모습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반영된다. 따라서 교회당 건축 자체나 그 과정이 훌륭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교회들이 개혁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최근 새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고자 하는 교회들의 건축에 대한 생각들이 크게 변하고 있는 모습에서, 필자는 우리 교회들이 엄청나게 변해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실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그 변화가 교회의 본질적인 변화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 그것은 단지 프로그램의 변화이며, 형식의 변화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필자의 기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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