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후예들'은 아름다운 영화다. 때묻지 않은 프랑스의 자연. 마리앙의 청순. 실비아의 관능. 그리고, 스타일이 살아있는 섬세한 액션.

영화의 두 주인공, 마니와 프롱삭이 그들의 몸을 움직일 때, 스크린은 순간 질감이 느껴지는 화폭으로 화한다. 그 위에서는 튕겨오르는 빗방울 하나도, 장화에 짓밟히는 풀잎 하나도 그들의 역할을 알고 있는 듯 가장 적절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움직인다. 임팩트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편집은 이렇듯 폭력을 가히 예술로 만들었다. 아름다운 폭력. 놀라운 솜씨다.

하긴, 세상에 예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없다. 사소한 것으로 치자면, 바나나도, 코카콜라 캔도, 변기도 훌륭한 오브제가 될 수 있고, 더러운 것, 그리고 폭력을 비롯한 잔인한 것도 얼마든지 '쓰임' 받을 수 있다. 그것은 순전히 창조자의 몫이고, 예술 그 자체를 인정하는 이라면 이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 그러나,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속에 어떤 속셈이 내장되어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한 가치판단의 기준을 은밀히 강요한다면, 이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이유는 예술, 그 중에서도 특히 영화는 오늘날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언론매체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영화 속의 미화된 폭력, 즉 '아름다운 폭력'은 항시 정의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다. '늑대의 후예들'에서 마니와 프롱삭이 휘두르는 폭력이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그것이 악에 맞서는 선, 혹은 정의이기 때문이다. 형편없는 영화지만, '진주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학살임에도 진주만 공습과 도쿄 공습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한쪽이 정의의 탈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악을 응징하는 폭력, 혹은 정의를 위한 폭력은 마땅하고도 아름답다는 것이 이들 영화의 은밀한 전언인 것이다. 대개 별 비판 없이 받아들여지는 이 메시지는 기실 전체가 개인을 길들이는 첫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이러한 '기초작업' 없이는 어떠한 전체도 아우슈비츠에서 일하는 충성스런 개인을, 베트콩의 씨를 말리는 용맹스런 개인을, 광주에서 총검을 휘두르는 가련한 개인을 양산해낼 수 없다. 춤추는 정의는 '준비된' 개인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사실, 알고 있었던 이들도 있겠지만, 정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공개된 소프트웨어였다. 누가 코딩했는지 사용자 인터페이스도 뛰어났다. 그렇기에 누구든 이용할 수 있었고, 누구든 뒤집어쓸 수 있었다. 히틀러,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은 그 수많은 이용자 중 하나일 뿐이다. 정의의 사도들. 그들은 하나같이 정의를 자작(自作)했고, 그 위에서 스스로 불타올랐다. 코미디다. 하지만 이에 희생당한 가련한 개인들을 생각하자니 차마 웃을 수 없는 코미디다.

지금도 코미디는 여전하다. 가령, 깡패국가를 선도하려는 미국의 정의는 바야흐로 온 지구를 활활 태우고 있다. 이스라엘의 정의, 팔레스타인의 정의 사이에서 신은 골목대장으로 전락한다. 이 틈에 끼어드는 '아름다운 폭력', '아름다운 살인', '아름다운 학살'의 예술은 그 의도와 상관없이 한낱 도구가 될 수 있다. 덕분에 몇몇 개인은 악을 응징하는 폭력, 정의를 위한 폭력은 아름답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채 정체불명의 정의를 위해 살인의 춤, 학살의 춤을 추기 때문이다. 가련하다. 20세기의 역사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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