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십일조 정신은 어디 가고 대체 언제부터
십일조가 '투기성 믿음'을 조장하거나 목회자들의
치부 수단이 되었나?   ⓒ뉴스앤조이 김승범
어제, 지역의 목회자 모임에 참석하였다가 저녁식사를 같이 하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기묘한 이야기를 하나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중에 그래도 나이 많으신 목사님 한 분이 십일조에 대해 말씀하시는 거였는데, 그분의 말씀을 듣자니 어쩌다가 십일조가 이렇게까지 되었나 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목사님이 담임하는 교회의 어느 집사님이 십일조를 안하다가 최근 은혜를 받더니만 9년만에 십일조를 수십 만원씩 한다는 자랑을 시작으로, 십일조는 교인들이 반드시 지키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여기까지는 뭐 그럴 수도 있는 평범한 이야기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겠다. 근데 다음이 문제였다.

목사님께서는 십일조 중에는 "미리 내는 십일조"도 있다고 하셨다. 뭐냐면, 사업이 계획대로 잘 될 줄로 '믿고', 그에 대한 십일조를 미리 내는 거란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믿고 십일조를 내는 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십일조는 하나님 것이므로 절대로 떼먹지 말도록 가르쳐야 하는데, 하다못해 고스톱을 치다가 얻은 돈도 십일조를 바쳐야 정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목회자들 자신도 십일조를 떼먹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시면서 친절하게 한가지 조언을 덧붙이셨다.

목회자들에게 옷이나 자동차 같은 선물이 들어오거든 그러한 선물에 대해서도 반드시 십일조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내느냐? 그 선물에 대한 십일조를 낼 수 있도록 선물을 주신 분에게 십일조 드릴 것까지 미리 주시도록 잘 가르치라는 말씀이셨다. 그러니까 가령, 50만원 하는 양복을 선물로 받거든 50만원에 대한 십일조 5만원을 추가해서 선물하도록 미리 가르치라는 말씀이다. 이쯤 되면, 기가 막히지 않는가? 근데 진짜 문제는 그 자리에 같이한 목회자들 대부분이 그 목사님 말씀에 수긍하는 눈치였다는 것이다.

성경의 십일조 정신은 어디 가고 대체 언제부터 십일조가 이렇게 '투기성 믿음'이나 조장하거나 목회자들의 치부 수단이 되었나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흔히 목회자들 가운데는 십일조를 강조하면서 성서의 말라기서 3장을 인용하곤 한다. 어제 그 목사님도 마찬가지였다. 그 분은 말라기서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게로 돌아오라"라고 말씀하신 다음, 곧바로 그 돌아가는 방법이 바로 십일조와 헌물을 바치는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요컨대 십일조와 헌물을 바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멀어져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일러스트 기진호
그러나 십일조를 말하는 성서의 본문이 어디 말라기 뿐이랴. 우리는 십일조를 말하는 성서의 여러 본문들 가운데 "나눔의 실현"을 강조하는 본문을 발견하게 된다. 신명기 14장 28~29절과 구약 외경전 토비트 1장 8절의 기록이 그것이다.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으로서 유다교로 개종하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는 재산의 십분의 일을 나누어주었다. 삼 년마다 나는 그 선물을 그들에게 가지고 가서 모세의 율법서에 제정된 법대로, 또 우리 할아버지 하난니엘의 어머니 드보라가 명령한 대로 그들과 함께 먹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십일조가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 만을 위해서 쓰이는 게 결코 아니라 나그네와 고아, 과부들을 위해서도 쓰여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면, 제사장 법전에는 십일조가 세금처럼 되어 있어 분깃이 없는 레위인을 위한 '십분의 일 세'로 나온다(레 27:30~33, 민18:20~24).

그러니까 신명기 법전에서는 십일조가 가진 게 없는 사회의 약자들을 위한 나눔의 '잔치'를 강조하고 있다면, 제사장 법전에는 십일조가 일종의 세금으로 성전의 봉사자들의 몫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제정일치 사회였던 이스라엘에서 십일조는 '세금'의 성격이 강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 이후의 기독교에서 십일조를 당연시하여 강조하는 게 옳으냐 옳지 않느냐는 것이다. 많은 교회들의 운영에 있어 십일조 헌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십일조 헌금은 폐지하는 것 보다 유지하는 게 아직은 현실성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본래 취지와 정신을 잘 살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십일조가 단순히 교회 유지와 목회자들을 위해서만 쓰일 게 아니라,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도 쓰여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며칠 후면 우리 민족의 대명절인 한가위다. 고향과 친척들을 찾아 귀성길에 오르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명절일수록 고향을 찾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가정이 해체되어 누구하나 찾아오지 않는 불우한 이웃들의 설움은 그 어느 때 보다 더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교회마다 십일조 가운데 일부를 이들과 함께 나누는 잔치에 사용한다면 어떨까? 이렇게 할 때에야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서릿발 같은 질책을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마23:23)

참고한 책 : 공동번역 성서, 민영진, 『한반도에서 읽는 구약성서, 삼민사 ,조찬선, 『기독교 죄악사 상권』, 평단문학사

정병진 전도사 / 솔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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