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신’의 철학
 
나는 기독교 특유의 역설과 역동성을 좋아한다. 이는 내가 회심한 주요 이유이다. 체스터턴은 그의 책 <오소독시>에서 시종일관 그것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면서, 그 유명한 ‘제정신의 철학’을 제시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신비주의적 상상력이 정신이상을 낳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이성이 정신이상을 낳는다고 보았다. 그는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광기의 표시는 ‘논리적인 완벽성과 정신적인 편협성의 결합’이라고  평했다. 논리적으로 완벽하고도 제정신이고자 한다면, 정신적으로 편협해서는 안 된다. 반면,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싶다면 논리적인 완벽성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광인의 이론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그 많은 것을 너무 적은 방법들로 설명한다.” 때문에 시인들은 미치지 않지만 체스노름꾼들은 미치고, 수학자들은 미친다. 그 다음 세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최고의 논리학자로 평가 받는 괴델은, ‘불완전성의 정리’라는 위대한 업적을 통해 당대의 수학자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뒤, 말년엔 그 자신이 미쳐버렸다. 그는 그렇게 체스터턴의 ‘제정신의 철학’을 자신의 인생을 통해 생생하게 예증해주었다.

현상에 대한 가장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설명을 찾고자 하는 모든 과학자들에게 체스터턴의 ‘제정신의 철학’이 제시하는 통찰은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복음과상황>이 4월호에서 다루었던 특집 ‘한 창조론자의 회심을 옹호하며’는 특히 그렇다. 우리는 분명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의 편견들을 깎아낼 오컴의 면도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팔과 다리를 잘라내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어서도 안 된다.
 
특집 ‘한 창조론자의 회심을 옹호하며’를 돌아보며
 
한국 창조과학회의 설립을 주도했던 양승훈 교수가 젊은지구 창조론 입장을 내려놓은 것에 대해 나 또한 적극 옹호하며 그 결단을 응원한다. 그가 글에서 밝힌 젊은지구 창조론이 가진 문제점들을 굳이 더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배덕만 교수와 박찬호 총장은 복음주의권 내에 창조―진화의 다양한 입장들이 존재하고, 이들이 단지 신학적 보수와 진보로 나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특히, 배덕만 교수가 근대 이후 주류 과학이 견지해 온 자연주의적 세계관과 그 문제점을 지적해주었다는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싶다. 박찬호 총장은 창조과학회가 시대정신에 맞섰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언급했는데, 나는 이점을 좀 더 강조하고 싶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들의 시대상황과 한계 내에서 행한 신실한 노력에 관해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배덕만 교수와 박찬호 총장은 모두 갈릴레오의 재판을 종교와 과학의 대표적인 충돌사례로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가장 유명한 세계사적 오류의 한 예에 해당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이러한 이야기는 일종의 잘못된 신화로써 과학과 종교에 대한 대중의 잘못된 역사적 편견을 부채질하기 때문에 신중해야 할 것이다. 역사 전체를 살펴볼 때 분명 과학과 종교는 대립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리고 박찬호 총장은 유신진화의 가능성을 옹호하는 예로 1997년 출간된 델 라취 교수의 책을 언급했다. 좀 덧붙이자면, 그 책의 핵심은 유신진화보다는 자연주의 과학에 대한 철학적 문제를 제기했다. 델 라취는 지금까지도 설계를 과학철학적으로 변호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고 현재 지적설계 진영에 속해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싶다.

<창조와 진화에 대한 세 가지 견해>를 읽고 가진 대담은 흥미로웠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박희주 교수가 번역한 이 책은 내용도 번역도 좋으므로 꼭 읽어볼만하다. 한 가지 문제는, 출판된 시기와 기획 구도로 인해 지적설계에 관한 내용을 제대로 포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담의 구조가 젊은지구 창조론과 유신진화론으로 형성된 듯해서 참 아쉽다. 주로 창세기 해석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진화론에 열려 있었던 신학자들은 단순히 유신진화 편에서 해석되는 등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눈에 띄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장대익 교수를 주제로 양희송 실장이 쓴 글은 감회가 새롭다. 어렴풋하지만 대학시절 읽었던 대학원생 장대익의 도전적인 글들을 아직까지 기억한다. 그렇게 공감했던 그의 글을 이제는 공감할 수 없다는 게 아쉽다. 양희송 실장은 글 후반부에 기독교권이 당면하고 있는 절박한 질문 세 가지를 제시했다. 나 또한 그 중요성에 공감하며, 그의 질문 중 창조―진화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세 번째 문제에 관해, 이 글에서 다루어보고자 한다.

창조-진화와 관련한 적절한 대답 혹은 대답들은 무엇인가?
 
논의를 더 전개하기 전에, 먼저 밝혀야겠다. 나는 기원문제에 관한 포괄적 이론으로서의 지적설계이론에 공감하고 그 탐구방향을 적극 지지하는 지적설계론자이다. 창세기 해석상의 문제에 관해서는 오랜지구 창조론과 유신진화론의 중간 즈음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는 성서에 대한 유신진화론자들의 접근에 상당부분은 공감하지만, 유신진화론자로는 분류될 수 없을텐데, 그 이유는 앞으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방법론적 자연주의’와 ‘다윈주의’에 대한 분명한 입장 차이 때문이다. 지적설계이론은 창세기라는 텍스트를 다루지 않는다. 따라서 창세기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 젊은지구 창조론 또는 오랜지구 창조론과는 그 층위가 다르며, 이 둘 모두와 그 이상을 포괄하는 유신론적 과학이 가능한 포괄적 틀을 제공해 준다. 실제로, 지적설계 진영은 창세기 해석에 대해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 이들, 타종교인들, 그리고 비종교인들까지도 망라하고 있다.

양희송 실장은 창조―진화와 관련한 기독교 내 논의가 더욱 다양해지고 열려있기를 요청한다. 그의 말처럼, 창조과학은 미국적 현상이며, 유럽은 상대적으로 유연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을 전혀 수용하지 않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들은 모두 정도가 다를 뿐이지 모두 진화론을 수용한다. 지난 세기 창조―진화 논쟁을 주도한 창조론의 스펙트럼은 주로 창세기에 관한 해석학적 태도로 나뉘어졌다. 문제는, 이러한 과도한 신학적 구도를 끌고 나가면서, 각 창조론 진영들이 다윈주의자들과 각자 자기 진영의 신학적 틀 내에서 논쟁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는 창세기가 과학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 과도하게 인정한 나머지, 창세기가 과학적 텍스트가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 간과했다. 나는 이러한 구도로는 앞으로도 결코 기독교가 일치된 견해로 ‘창조―진화와 관련한 적절한 대답’을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윈주의가 주류 과학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금, 창세기 해석을 중심으로 했던 우리의 일차적인 물음은 분명 달라져야 한다. ‘진화론에서 우리가 수용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최소한 거부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물음은 기독교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물음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다. ‘창세기의 근본 핵심은 무엇인가?’

1996년 ‘순전한 창조’(Mere Creation)라는 이름의 학회에 필립 존슨을 중심으로 한 무리의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름을 따온 이 학회를 통해, 지적설계운동은 과학을 지배해 온 자연주의 철학에 반기를 들며 그 운동을 본격화시켰다. ‘자연주의’란 자연을 자기충족적으로 보고 초자연적 요인의 존재가능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철학적 세계관을 일컬으며, 이것은 곧바로 존재론적 유물론으로 연결된다. ‘순전한 창조’에 모인 이들은, 우리가 창조에서 발견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이 자연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설계의 경험적 탐지 가능성을 주창하며, 이를 연구하는 지적설계 연구프로그램을 기획하기에 이른다. 이들을 한 곳으로 모은 이 정신은 다름 아닌 ‘다양성 속의 일치’였다.

나는 기독교, 최소한 복음주의권이라면 복음주의의 연합정신에 부합하는 이 프로그램이 진화론과 관련한 문제에 있어서 최소한의 일관된 주장으로 채택할 수 있는 그나마 가능성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지적설계는 신학이 아니며, 최소화된 형태의 반자연주의적 설계 연구프로그램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것은 창조―진화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으며, 창세기 해석 문제로 나뉘어져 있는 기독교계가 이 문제에 관해 핵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드는 유용하고도 포괄적인 틀을 제공한다.

따라서 나는 양희송 실장의 대답에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싶다. 우리는 창세기의 세부적인 해석문제를 가지고 논쟁해서는 결코 ‘창조―진화에 대한 적절한 대답’에 함께 도달할 수 없다. 바로 지적설계가 ‘창조―진화에 대한 적절한 대답’에 대한 최소한의 핵심을 모아줄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다양한 ‘적절한 대답들’을 담아낼 수 있는 포괄적인 틀을 제공해 줄 것이다.
 
지적설계와 유신진화론 사이의 쟁점
 
지난 특집에서 많은 이들이 유신진화론을 언급하였다. 양희송 실장은, 존 스토트를 비롯한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일종의 ‘유신진화론’을 받아들인다고 했는데, 이는 ‘창조와 진화에 대한 세 가지 견해’에 관한 대담에서 언급된 신학자들과 마찬가지 맥락이다. ‘창조를 인정하지만, 창조 이후의 진화 가능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분류에 관해, 좀 더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C.S. 루이스마저도 유신진화론자로 분류하곤 하는데, 이것은 분명 사실과 다르다. 지적설계는 하나님의 창조과정이 진화의 과정을 포괄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반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당부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편이다. 따라서 이러한 열린 견해를 피력했던 신학자들과 신앙의 전통들이 소위 창조-진화 문제를 어떤 관점에서 탐구했으며 이 논쟁의 다양한 스펙트럼 상에 어디에 와 있는지에 관해 좀 더 면밀히 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신진화론자들은 대체로, 자연주의 자체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신다윈주의 종합설의 주류 이론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과학은 자연주의적인 방식으로만 연구되어야 한다는 ‘방법론적 자연주의’마저도 수용한다. 따라서, 지적인 원인 즉, ‘설계’의 경험적 탐지 가능성을 주장하는 지적설계론자들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다. 이들은 창조―진화 논쟁에서 무신론적 진화론자들을 대신해 적극적인 다윈주의의 옹호자로 나선다. 대표적으로, 하워드 반 틸, 존 호트 등이 이에 해당한다. 반면에, 창조과학자들은 대체로 지적설계의 이러한 방향에 공감하므로, 범지적설계 진영에 포괄된다고 볼 수 있겠다. 지적설계와 유신진화의 입장을 가르는 대표적인 차이점들 중에 하나인 이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전통적으로 창조론자들에게 제기되어온 ‘빈틈의 하나님(God of gaps)’의 문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유신진화론자들이 택한 입장이다. 이들은 창조과학과 지적설계와 같이 자연주의적 설명을 넘어서는 ‘특별 창조’를 주장하는 입장들이 하나님을 빈틈에서만 활동하는 분으로 제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사적으로 이러한 빈틈들은 메워져 왔으므로, 이 전략은 앞으로도 필패하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빈틈이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전혀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옹호한다. 그들에게 자연계는 내재적으로 ‘확고’하며 그 능력은 ‘충만’하다.

‘빈틈의 하나님’문제는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빈틈’이란 무엇인가? 반 틸을 포함한 유신진화론자들은 이것이 마치 역사의 인과관계의 고리에 띄엄띄엄 존재하면서, 신이 애써 메워야만 하는 빈틈인 것처럼 묘사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제한한다는 말을 덧붙인다. 하지만 이 입장은 탐구자의 관점이 개입된 명백한 오해이다. ‘빈틈’이란 제대로 말하면 ‘하나님의 빈틈’이 아니라, ‘자연주의의 빈틈’이다. 이것은 그 어떤 자유로운 원인 제공자가 자연계에 남길 수 있는 일종의 흔적이다. 여기서 ‘남길 수 있는’에 주목하라. 이것은 수많은 가능성을 포괄한다. 하나님은 개입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개입하면서 빈틈을 남길 수 있지만, 또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하나님이 흔적을 남겼지만 우리가 탐지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빈틈의 존재가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개입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단지 경험적 가능성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지적 존재는 자연계에 이러한 빈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진짜 문제는 빈틈의 ‘존재’가 아니라, 그 빈틈을 탐구하는 ‘방식’이 문제다. 하지만 그들은 방식을 따지기도 전에 빈틈을 무작정 메우려고 애쓴다.

호트는 빈틈없는 자연계를 신학적으로 변호하기 위해, 창조계에 부여한 온전한 자율성에서 하나님의 자기 비우심 즉, 케노시스를 발견해야 한다는 논지를 펼친다. 지난 특집에서도 이에 대한 공감을 표시한 분들이 있는데, 창조과학자들의 창세기 해석의 경직성에 비추어 보자면, 이것은 창의적인 해석이다. 나는 이 해석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들의 이런 유연함만은 정말 마음에 든다. 창조과학자들이 이런 능력을 반이라도 닮았더라면, ‘우리는 하나님이 자연계에 남기신 ‘빈’ 틈에서 하나님의 자기 ‘비우심’, 즉 케노시스를 본다’는 정도의 대응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신진화론자들은 안타깝게도, 이렇게 확고하지 못한 자연계에서 하나님의 자기 제한을 유비해내는 능력까지는 갖지 못한 것 같다.

또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기 제한 또는 자기 비움’을 ‘자율성’의 견지에서 바라보는 것이 신학적으로 타당한 것이냐 하는 것이다. 빌립보서에 나타나는 케노시스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가 되신 예수를 강조한다. 즉, 자신의 속성과 능력을 제한하고 이 세상에 약자로서 '개입'하신 예수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율성’에 핵심적 강조를 두는 호트의 해석이 진정 신학적으로 타당한 것인지를 의심스럽게 만든다.

유신진화론자들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수용해야 비로소 자연주의적 과학을 자연주의 철학에게 넘겨주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충정을 의심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자연주의를 반대하면서도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고수하는 모순된 입장은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대단한 오판이다. 만일,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생명체와 우주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성공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고, 다른 유신론적 과학의 길은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역사가 그렇게 진행된다면, 그것은 사실상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찍이 필립 존슨이 예리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사태에 가장 그럴 듯한 해석은 바로, ‘유신론은 틀렸고, 자연주의가 옳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불감증
 
유신진화론자인 존 호트는 그의 책 <다윈 안의 신>에서, 지적설계를 향한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유물론과 유신론은 경쟁하지 말고, 모두가 과학에서 물러서자는 것이다. 그리고 설계의 개념은 아꼈다가 “설명의 더 깊은 차원에서 적합한 은유로 사용하자”고 말한다. 아주 솔깃한 말이다. 물론 찬찬히 따져보면 결국,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기원론과 같은 역사적 과학(historical science)의 문제에 있어서 유물론과 유신론이 다 물러서는 것이,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수용으로 연결될 수 있는가? 최소한 과학을 방법론적 자연주의에게 넘겨주려면, 자연적 현상이 명백한 문제들에만 과학적 설명을 제한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것은 당연히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도, 그리고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그렇다면, 공정한 대안은 최소한 이런 문제에 관한 한 경쟁을 허용하는 것이다. 역사적 과학 탐구를 모조리 자연주의 방법론에 넘겨주고, 우리는 한가로이 신학적인 은유만을 읊어야 한다니. 호트는 지적설계의 약점을 “형이상학적 조급증”이라고 평가했건만, 이 안일한 전략은 도리어 호트의 형이상학적 불감증을 잘 드러내 준다.

지적설계는 전 우주의 역사에 관해 예전에 없던 흥미진진한 ‘탐지 문제(detection problem)’를 수립함으로써 자연주의적 과학을 폭넓게 확장시켰다. 이것은 대단히 도전적이고도 흥미로운 문제다. 특히, 정보를 이론적으로 다루는 신호처리(signal processing)의 모든 분야, 특히 내가 연구하는 컴퓨터 비전(computer vision) 분야에 있어서 탐지 문제는 낯선 것이 아닌, 아주 잘 정립된 문제다. 기원론은 그 동안 이러한 정보의 문제를 도외시 했다. 어떻게 탐지 대상에 대해 정확도(precision)와 탐지율(recall)을 최대한 높일 수 있는 강력한 추론 구조를 제시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를 위한 세부적인 도구들과 방법은 무엇이고 구체적인 사례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까지 그 생성적 모델을 재구성할 수 있을까? 기존의 자연주의적 과학이 기원론 문제에 있어서도 이러한 폭넓은 연구에도 자리를 내어 준다면, 이것은 과학적 탐구를 더더욱 풍성하고 흥미진진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제정신’으로 과학을 논하기 위하여
 
창조과학자들의 선명성과 전투성은 부흥의 원인이었고, 이제 쇠퇴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래서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사람들만 없다면 다윈주의와 기독교가 그저 조화로울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자연주의가 무신론을 증명할 수 없으므로,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하나님을 보이지 않는 자연의 지배자로 자리매김하자는 류의 주장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런 구도로는 결코 이 첨단의 사회를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이는 방법론적 시장주의를 고수하고도, 우리가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방법론적 물리주의를 받아들이고, 영혼을 논하라는 말과 같다. 사실상 우리 자신의 세계관을 뒷받침할 그 어떤 명확한 경험적 근거도 실제로는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주의적 과학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제정신을 뒤흔든다. 이제 나의 친구들은, 그 때마다 탈출해서, 함께 ‘신학적 은유’의 술잔을 들자고 제안한다. 이게 웬 서글픈 샐러리맨의 비애인가! 그 친구들의 제안은 고맙지만, 나는 그러지 않으련다.

진화론을 빼고 현대과학을 논하기는 힘들다. 이제 진화론은 ‘통섭론’을 중심으로 여타 학문들을 포괄하고자 시도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도들은 분명 주목해야 할 일이다. 기독교인들도 진화론을 공부해야 하고, 그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들은 접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변해야 한다. 도킨스가 그나마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던 이전의 대중과학서들은 그런 면에서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신앙적 관점과 비판적 탐구 또한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진화론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라. 나는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그 반의 반 만큼이라도 지적설계에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하리라!

예전에 창조론자들과 논쟁했던 것 이상으로, 최근 몇 년간 온·오프라인에서 유신진화론자들과 많은 논쟁을 해왔다. 아쉽게도, 많은 부분에 있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들이, 오로지 ‘설계’라는 문제로 인해 치열한 반대자의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이 언제나 아쉽다. 또 한때 그토록 멀게 느껴졌던 수많은 창조론자들이 어떤 면에서는 나와 동역하는 처지라는 아이러니 또한 야릇하다. 이 길은 현재 보수적 기독교인들에게도 경계의 눈초리를 받지만, 진보적이고 신학적인 교양인에게는 더더욱 인기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이 모든 것이 몹시 난처하고 외롭다. 하지만 이 모든 삶의 신비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그는 기계 장치를 타고 내려오시지는 않지만, 분명 그 언제나 자유롭게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조민수 (서울대 지적설계연구회 회장)

필자 소개
필자 조민수 씨는 서울대학교 전기컴퓨터 공학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인공지능의 한 분과로서 시각지능을 담당하는 컴퓨터 비전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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