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7일은 이랜드 노조의 파업 300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지난해 여름 뜨거웠던 이들의 투쟁은 어느덧 언론에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랜드 사태도, 비정규직 문제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이 이랜드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글을 보내와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 지난해 7월 20일 경찰이 서울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몰점에서 농성중인 이랜드 노조원들을 끌어내 연행하고 있다. (사진제공 오마이뉴스) 
어언 300일이 지났다.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은 KTX 여승무원들과 함께 비정규 투쟁의 최전선에 있다. 800만이 넘는 비정규노동자들에게 피눈물을 흩뿌리게 하는 자본과 권력에 맞선 힘겨운 투쟁이다.

자본과 권력, 그리고 그들의 충실한 마름인 주류언론은 걸핏하면 "강성 노조 때문에 투자를 기피하고 그래서 일자리 창출이 어렵다"고 어깃장을 놓지만, 오늘 민주노총은 "이랜드 그룹과의 투쟁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민주노총 깃발을 내리겠다"던 이석행 위원장의 말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민주노총의 역량으로 이랜드 그룹이라는 단 하나의 자본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잔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자본, 그에 굴종하는 시민들

흔히 자본은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차라리 잔인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가장 잔인한 게 인간 아니던가. 

하지만 우리는 슬프게 하는 것은 그 잔인함이 아니다. 그 잔인함에 자발적으로 굴종하는 너와 나,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의 이웃인 노동자·시민들의 모습이다. 적극적인 연대까지는 언간생심 바라지도 않는다. 이랜드 불매운동에 동참해달라는 간절한 호소에도 모른 체 등 돌리는 너와 나의 이웃, 이 땅을 함께 사는 동시대인들이다. 나만 비정규직의 나락에 떨어지지만 않으면 그만이라는 점점 더 추해지는 경제동물들의 몰골이다.

보수의 시대라 하지만 그렇지 않다. 반동의 시대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반동의 시대다. 지금 이 땅의 비정규직은 우리가 반동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여실히 증명한다.

19세기 노사계약관계의 기본 형태는 비정규직이었다. 사용자와 노동자가 똑같이 시민이라는 주장, 똑같이 시민적 권리를 갖는다는 주장 아래, 고용된 노동자가 내일이라도 다른 일자리를 찾아갈 권리를 가지듯이 사용자도 항상 다른 노동자로 대체하거나 노동자를 자를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관철된 것이다.

노동자는 노예가 아니어서 일터를 떠날 권리를 가진다. 그렇다면 사용자도 똑같은 권리를 가져야 한다. 곧 노동자를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는 권리다. 이것이 "모든 시민은 평등하다"는 시민권 차원에서 관철된 노사계약 형태였다. 

그러나 자본 우위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시민은 평등하다"는 주장은 수사일 뿐 실제에 있어서 사회적 약자들인 노동자들은 구조화된 불평등 앞에서 피눈물을 흘려야했다. 상시적 고용 불안에 처했던 노동자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우리는 굳이 딕킨즈나 졸라의 19세기 소설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가령 1830년대 프랑스 리용 지역의 견직공들은 18시간(새벽 5시부터 밤 11시까지! 이게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이다) 노동을 강요당했다. 그들이 마침내 폭동을 일으켰다가 잔인하게 진압되고 죽임을 당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오늘 우리가 8시간 노동제를 누리고 있듯이, 사회적 약자들이 누리는 사회적 권리로서 정규직을 획득했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 이 땅에서 간단히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기나긴 투쟁을 통해 획득한 열매를 순식간에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오늘의 굴종이 내일 나를 향할 칼날

알아야 한다. 지금 설령 정규직이라 할지라도 반동의 칼이 언제 나에게 다가올지 알 수 없다는 점을. 오늘의 굴종이 내일 나를 향한 칼날을 가는 행위가 된다는 점을. 지금 비정규직에 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내 자식에게 피눈물 흘리게 하는 내일을 물려주게 된다는 점을. 

우리가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과 연대해야 하는 까닭은 자명하다. 우리에겐 돈도 없고 권력도 없다. 우리에겐 연대이외엔 무기가 없다. 그렇다. 연대는 나 자신을 위해, 내 자식을 위해, 우리 사회를 위해 우리가 가진 유일무이한 무기인 것이다.

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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