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님의 시 ‘새똥’을 읽었다. 네 개의 문장으로 된 짧은 시이지만,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빗대볼 수 있었다. 비종교적 언어로 종교적 삶의 본질을 꿰뚫는 솜씨가 놀랍다. 종교적 언어가 타락하여 경박스러워질 때는 일상의 언어로 종교적 삶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신선할 수 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새로울 수 있다.

어느 봄날
울다가 잠에서 깨어나
홀연히 새들의 발자국을 뒤따라갔다
발자국은 바람 부는 골목을 지나
나뭇가지를 지나
지붕도 없는 둥지 안으로 이어졌다
나는 둥지 속에 새새끼처럼 몸을 틀고 들어앉아
해질 무렵
어미새가 돌아와 벌레를 먹여주면
한껏 입을 벌려 받아먹곤 했다
그리하여 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난 뒤
나는 사람이 먹는 쌀밥을 먹고도
새똥을 누었다

(정호승,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중 ‘새똥’ 전문)


‘새’는 하늘이다. 자유다. 노래다. 따라서 초월이요, 하나님의 은총이다. 일상의 도처에 ‘새들의 발자국’이 있다. 도처에 하나님의 자취가 있다, 은총의 흔적이 있다, 초월의 암호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지 못하지만 볼 줄 아는 사람은 본다. 볼 줄 아는 사람이 누구인가.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잠자고 있다. 잠자면서 ‘울’고 있다. 볼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답답해서 그런다. 암담해서 그런다. 이런 사람들에게 세월은 늘 겨울이다. 겨울은 춥다. 추우니까 움츠러든다. 움츠러드니까 몸은 뻣뻣해지고, 모든 감각은 마비되고, 땀구멍은 닫히고, 세포의 움직임은 둔해진다. 점점 무뎌지고, 무감각해지고, 딱딱해진다. 불감에 이른다. 이렇게 되면 느낄 줄 모른다. 아무리 슬픈 사람이 옆에 있어도 같이 아파할 줄 모른다.

봄이 와야 한다. 봄이 와 모든 것이 녹고, 풀어지고, 깨어나야 한다. 언 마음도 녹아야 하고, 무뎌진 가슴도 풀어져야 하고, 잠든 감수성도 깨어나야 한다. 몸은 울음이 그치는 때이다. 아니, 깨어난 감각으로 하여 울음에 대한 경험이 새로워지는 때다. 삶의 풍파에 시달리다 지친 사람의 진저리나는 울음이 아니라, 새 계절을 기뻐하는 새울음을 듣는 때이다. 이때의 울음은 슬픔의 탄식이 아니라, 기쁨의 노래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새들의 발자국을 뒤따라’ 가는 사람들

삶의 여정 어느 길목에서 봄이 와 잠든 감수성이 깨어나고, 새들의 은총과 자유의 기쁨을 멀리서나마 듣게 된 사람의 운명은 갑자기 바뀐다. 자신을 울게 했던 모든 것들을 부질없다 뒤로하고, 아득히 들리는 새들의 울음을 따라, 휘청거리던 다리를 곧추세우며 ‘홀연히’ ‘새들의 발자국을 뒤따라’ 간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느 봄날’ ‘울다가 잠에서 깨어나’ 일상의 도처에 널려 있는 ‘새들의 발자국을 뒤따라’ 가는 사람들이다.

‘새들의 발자국을 뒤따라’ 가는 일, 즉 일상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초월의 암호를 푼다거나, 은총의 흔적을 보게 된다거나, 하나님의 자취를 발견하는 일이란, 항상 막다른 ‘골목체험’을 동반한다. 일상사의 덧없음, 성취와 업적에 대한 꺼질 줄 모르는 욕망의 부질없음을 깨닫는 것과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골목체험’은 바탕이 꺼지는 체험이요, 토대가 무너지는 체험이다. 절망의 심연으로 가라앉는 체험이요, 깊이 모를 늪에 빠져드는 체험이다. 삶을 유지시켜주던 모든 보장을 상실하는 체험이요, 기를 쓰고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지는 체험이요, 비바람을 막아주던 ‘안전 또는 안정’이라는 이름의 ‘지붕’이 벗겨지는 체험이다. 직장을 잃은 사람이 그렇고, 가출한 아이들이 그렇고,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이 그렇고, 사랑에 실패한 사람이 그렇다. ‘골목체험’의 가공할만한 위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소위 성공한 사람들에게도 해일처럼 밀려온다. 허무라는 이름으로.

그렇다. ‘새들의 발자국을 뒤따라’ 가는 사람들이 마침내 이르게 되는 둥지는 ‘지붕도 없는’ 둥지이다. 다르게 말하면 ‘하늘이 지붕인’ 둥지이다. 일상사의 덧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초월의 암호를 풀기 시작한 사람들, 온갖 성취와 업적에 대한 욕망의 부질없음 속에서 은총의 흔적을 갈구하기 시작한 사람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취를 목마르게 찾기 시작한 사람들은 지붕이 있는 둥지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한다. 지붕이 있는 둥지의 모든 안전장치와 보호장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잠깐 동안만 망각하게 하는 임시방편임을 알기 때문이다. 영원하고 본질적이며 궁극적인 무엇을 찾아 땅과의 음험한 거래를 중단하고, 하늘과의 소통을 시작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새들의 발자국을 뒤따라’ 나선 사람에게는 ‘지붕이 있는’ 둥지는 감옥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람 부는 골목을 지나 나뭇가지를 지나 지붕도 없는 둥지 안으로’ 나아가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늘의 신탁을 ‘한껏 입을 벌려 받아먹는’ 사람들

감수성을 회복하면서 ‘새들의 발자국을 뒤따라’ 나선 사람이라고 해서 바람만 먹고 사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제공하는 안전장치와 보호장치를 떼어 내고 ‘지붕도 없는 둥지’에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를 튼 사람이라고 해서 이슬만 먹고 사는 것은 아니다. 하늘과의 소통을 시작한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안 먹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먹이가 있다.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벌레’처럼 징그러운 것이지만, 땅의 성찬에만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소스라칠 정도로 낯선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꿀송이보다 달고, 정금보다 귀한 하늘의 양식이 있다. 너무 맛있고, 너무 소중하여 ‘한 껏 입을 벌려 받아먹곤’ 하는 음식이 있다.

‘지붕도 없는 둥지’의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진리의 벌레를 먹여줄 ‘어미새’를 기다리는 ‘새들의 발자국을 뒤따라’ 나선 사람들에게 복이 있을진저! 그대들의 그 기다림이 마침내 거짓과 허위의 세대를 끝장낼 것이니, 기다리고 기다리라. 마침내 한 사제가 나타나 그대들에게 하늘의 신탁을 전해줄 때까지.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 문명의 ‘해질 무렵’, 로고스적 문명의 황혼 또는 이성적 과학기술문명의 저물녘, 그러나 새로운 문명의 동틀녘, 영성의 시대의 여명! 새로운 영성적 문명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는 진리를 말해줄 참사제가 그립다. 문명의 ‘해질 무렵’ ‘지붕도 없는 둥지’에서 떨고 있는 초라한 이들에게 돌아와 벌레를 먹여줄 ‘어미새’가 그립다. 그런 어미새 한 번 만나면 ‘한껏 입을 벌려 받아먹’으련만. 그리스도인이란 진리의 사제가 전하는 하늘의 신탁을 ‘한껏 입을 벌려 받아먹는’ 사람들이다.


아아, 변비의 시대의 슬픈 코미디!

(잠시 문맥을 벗어난 똥에 대한 묵상.) 먹으면 누기 마련이다. 들어가면 나오기 마련이다. 받으면 주기 마련이다. 채우면 비우기 마련이다. 먹기만 하고 누지를 않는 사람들이 있다. 들이기만 하고 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받기만 하고 나누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채우기만 하고 비우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답답함이 얼마나 클까. 진절머리나는 그 콱 막힘 또는 닫힘, 폐쇄 또는 봉쇄! 천박한 자본주의자들의 고질병. 욕심사나운 교회성장론자들의 꼴불견. 누어야 할 때 누지 못하는 그 막힘의 답답함을 훈장처럼 여기고 있으니, 아아, 변비의 시대의 슬픈 코미디!

먹는다고 해서 바로 누는 것은 아니다. 먹은 것을 소화시키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야 한다. 얼마간의 시간이란 먹은 것이 해체되면서 다른 장기(臟器)들에게 양분을 제공해 주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이렇게 얼마간의 시간 - 이 시간은 해체의 시간이다. - 이 지나면서 신진대사가 잘 이루어져야 인체는 활력을 얻는 것이고, 그런 해체와 나눔의 시간이 지나서야 탐스런 똥이 나온다. 우리가 그 황금빛에서 어떤 위용마저 느끼게 되는 까닭은 그것이 뭔가를 다 이룬 뒤의 뿌듯한 자부심의 색깔이기 때문이다.

요즘 너무 많은 사람들이 빠른 결과를 원한다. 애들을 키울 때도 돈만 들이면 남보다 빨리 되는 줄 착각한다. 아니다. 모든 생명에는 충분히 숙성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숙성의 과정은 반드시 해체와 나눔의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이 ‘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는’ 과정이다. 이러한 생명의 이치를 모르는 몰상식한 부모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안겨져 있는 우리 시대의 불쌍한 아이들, 이것 저것 배우러 다니느라 햇빛 한 번 제대로 쬐어 보지 못한 아이들, 들이나 산에서 뛰어놀지 못해 초췌해진 몰골의 병약한 아이들, 그 병든 것들을 예쁘다고 껴안고 입맞추고 부벼대고들 있으니, 아아, 설사의 시대의 창백한 변태미!

(본디 문맥으로 돌아와) 일상사의 덧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초월의 암호를 풀기 시작한 사람이라고 해서 머리가 둘인 사람은 아니다. 오로지 하늘을 지붕으로 삼는 모험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간이 둘인 사람은 아니다. 하늘과의 소통을 시작한 사람이라고 해서 귀가 세 개라거나 입이 둘인 사람은 아니다. 문명의 ‘해질 무렵’을 버텨나갈 하늘의 신탁을 전해 줄 진리의 사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해서 심장이 둘인 사람은 아니다.

그들은 별종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 같은 사람이다. 똑같은 물질적, 신체적, 세상적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쌀밥을 먹는’ 사람들이다. 똑같은 정치적 상황, 똑같은 실존적 위험, 똑같은 위기, 똑같은 문화적 분위기를 호흡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단 한가지, 그들은 ‘쌀밥을 먹고도 새똥을 누’는 사람들이라는 것!

‘새똥’은 초월의 암호를 푼 사람의 속시원함이다. 은총의 흔적을 본 사람의 기쁨이다. 하나님의 자취를 발견한 사람의 황홀함이다. 그 속시원함, 기쁨, 황홀함이 시대의 아픔과 어울려 빚어낸 향기로운 열매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사람이 먹는 쌀밥을 먹고도 새똥을 누’는 사람이다.

이민재 / 은명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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