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8:31-32「31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가 구세주임을 전혀 의심치 않고 인정하는 것으로서 이때가 곧 십자가의 도의 초보에 입문한 상태이며 그 영은 이때에 거듭나는 것이다.

이러한 대전제 아래 거듭난 이후부터는 주와 함께 하는 동행이 시작 될 것인데 천국에 이를 때까지 동행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동행에는 반드시 예수께서 자신의 삶에 주인의 위치에서 모든 일에 자신을 주관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신의 확실한 의사가 분명히 선행되어야 하며 따라서 동행의 내용에 있어서는 자신의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생각이신 성경말씀에 따라서 지속적인 순종을 우선으로 하는 삶의 원칙이 소전제가 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 명제를 지키는 것이 곧 온전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구세주로 믿은 유대인들에게 그 이후 부터로는 말씀에 거(居)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일차적인 믿음을 소유한 자에게 주님은 반드시 말씀에 거하는 삶을 요구하시는데 이 말씀에 순응하는 것을 이차적인 믿음이라고 편의상 이론적으로 구분해 본다. 이렇게 일차적인 믿음을 소유한 자가 이차적인 믿음의 요구에 순응하는 그 여부에 따라서 온전한 믿음의 승패가 결정되어 지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기독교에서는 일차적인 믿음만 가지고도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며 가르치는 교리는 인간 편익을 위한 탐욕적인 구원론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주님의 십자가 한편에 있던 강도가 회개하므로 이차적 믿음의 행위가 전혀 없이도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죽음 직전에서 회개하므로 구원에 이르게 된 특별한 상황이므로 미처 이차적인 믿음의 행위를 위한 삶이 주어지지 않은 자에 국한된 구원론이다. 이런 특수 상황을 모든 일반 신앙인에게까지 적용하여 이차적 믿음의 행위를 나타낼 충분한 삶의 여정이 주어진 모두에게까지 이 같은 구원론을 적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한 일차적인 믿음 이후에 말씀에 거하는 필수적인 삶의 이차 믿음 생활에 있어서 주와 나 사이에는 항상 모종의 합의를 해야 하는데, 이때 나는 일차적인 믿음의 은혜에 감격 때문에 이 합의의 결과는 항상 주 뜻대로의 삶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합의가 도출되어야 한다.

암3:3「두 사람이 합의치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그러므로 주안에서는 어떠한 일에도 율법적인 강요나 강제(compulsion)가 절대로 있을 수가 없으며 모든 일을 주님의 뜻에 의합하는 자원에 의하여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이 신약시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고유한 영역인 자유의지에는 그 어떠한 강제력을 행사하시지 않는다. 그러면 여기에 비추어 특별히 한국 기독교가 크게 각성해야 할 일은 십일조에 대한 교리이다. 구약의 율법 가운데 하나인 말라기 3장8절에서 12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돌려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신앙의 파렴치범으로 몰아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우리들의 신앙에 자유의지를 전혀 무시한 일방적인 강요이며 강제 징수인 것이다. 특별히 신약시대는 진리 안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신앙의 시대이므로 그 어떠한 것이라도 신앙의 강제성을 띤 교리와 교훈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십일조의 교리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전혀 무시하고 다시 짓밟고 더럽히는 사악한 것으로서 그리스도가 헐었던 율법을 인간이 또다시 세우는 완악하고 어리석은 행위인 것이다.

갈2:18「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불법자로 만드는 것이라」

한국에 이처럼 뿌리깊게 내린 율법적인 십일조의 강제 거출 방법으로 인하여 교회당 유지 및 교회발전을 크게 꾀하여 왔지만 이제는 결국 그것으로 인하여 각 교회의 지도자가 물질의 바알신에게 붙잡혀서 교회가 물량주의와 기복주의에 편승하여 몰락의 위기에 봉착한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고 이 문제만큼은 전 교회가 반드시 대 회개와 각성을 하고 시작되는 새천년기에는 또다시 한국기독교계에 율법적인 십일조 교리라는 엄청난 오점을 다시는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말씀에 거(dwelling living 주소)한다는 것은 현 주소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 영이 거듭나서 성령과 함께 거하니 신령한 영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신령한 영계에서는 예수그리스도가 왕이시기 때문에 그의 말씀에 절대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계에서 그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은 믿음이 아닌 불신이다. 그리고 이 말씀에 거하면 그때부터 진리를 알게 되는데 진리란 참된 이치로서 이 영계의 정치가 곧 참된 이치로 다스리는 나라임을 발견하게 될 때에 이 나라에는 강요와 강제가 전혀 없는 자발적인 나라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 나라의 정치에 스스로 순응하게 되는데 이것을 향하여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것이다. 이런 신령한 나라를 볼 수 있는 것의 첫째는 거듭나야 하며 둘째로는 거듭난 이 눈으로 성경 말씀을 보고 깨닫고 순종할 때에 현세에서도 이 나라를 보고 누리는 것이다.

고전2:13「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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