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 17호
개봉역과 시흥시 매화동을 오가는 39번 버스. 몇 년 전부터 이 버스를 이용하는 승객들 가운데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이방인'들이 자주 눈에 띠었다. 평일에는 저녁 시간에 자주 만날 수 있지만 주일이면 하루 종일 39번 버스의 주고객이 된다. 무슬림 특유의 복장을 한 이들도 있고, 힌두교도의 복장을 입은 이들도 볼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은 우리나라 젊은이들과 다름없는 복장이다. 이들은 두 명씩 세 명씩 함께 버스에 오른다. 가끔 그들이 대화를 주고받을 때면 버스 안은 어느새 이국적 분위기 가득한 낯선 공간이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끼리 어울려 다닐 뿐 한국인들과 함께 있는 광경은 찾기 어렵다. 여성들 중에는 그들과 함께 같은 자리에 앉는 걸 꺼리는 표정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여전히 '이방인'으로 우리 곁에 살고 있다.

언젠가부터 그 다름, 아니 그런 분리됨이 어색했다. 다름은 인정할 일이지 분리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분리가 차별이 되고 때론 폭력으로 인간의 존엄을 짓밟지 않는가. 그 다름을 극복하는 힘을 사랑이라 하고, 그렇게 맺어진 관계를 이웃이라 할 때 주님은 저 유명한 강도 만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어, 우리가 직접 사랑으로 이웃이 될 것을 강조하신 셈이다. 그럼으로써 이웃은 같은 민족이나, 같은 지역의 거주민이나, 같은 종교나 언어를 쓰는 그들만의 리그가 아님을 분명히 하셨다.

외국인노동자들이 이 땅에 처음 들어온 시작을 1990년대 초로 볼 때 벌써 10년이 지난 세월을 그들과 살아온 셈이다. 1990-2000, 그 10년간 그들은 '불법체류자'로 '산업기술연수생'으로 인권의 사각을 걸어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 아슬아슬한 행보엔 변화가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그들은 이웃으로 우리 곁에 있지 않고,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아 있다. 10년이란 세월은 그래서 외국인노동자들에게 새로운 게토를 만들도록 강요해온 기간이기도 했다. 지금 그들은 세계 어느 이주노동자들보다 열악한 환경을 '어쩔 수 없이'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9월 15일 토요일 오후, 아직 뙤약볕이 내리쬐는 시각 시흥시 과림동에 내렸다. 마을 골목은 아직 인적이 뜸했다. 마을이라지만 사람들이 사는 집보다 오히려 소규모 공장들이 더 많아 보였다. 다닥다닥 붙은 낮은 공장건물들 내부에 많게는 10명 남짓 적게는 2, 3명씩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마을 입구 가게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면서 가게 주인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주인은 옆집으로 들어가선 한 청년을 불러냈다. 주인은 그에게 "한국 사장들 아주 못됐다고 이야기 해" 하며 어깨를 툭 쳤다. 이미 '이방인'들의 편이 되어버린 모습이었다. 청년은 인상이 강해 보였다. 신분을 밝히고 잠깐 이야기 나눌 수 있는지 묻자 대번에 샤워 중이었다며 거절했다. 불신의 표정이 역력했다. 파키스탄에서 온 그는 이곳에서 파키스탄 출신 노동자들을 상대로 파키스탄 물품을 파는 가게를 운영한다. 이날 저녁에 서울에서 파키스탄 식당을 경영하는 형과 만나야 한다며 그는 자리를 피했다.

오후 5시를 넘기자 공장에서 돌아온 이 낯선 '이방인'들이 가게 앞을 오갔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매우 활기찬 얼굴의 그들은 오히려 인터뷰에 적극적이었다. 서로 이름을 말하고 나이를 말했다. 음료수를 사려하자 "형님(나이가 좀 위인 기자에게 그는 형님이라 불렀다, 아마 몇 마디 모르는 한국말로 보였다)이 사면 안 된다"며 자기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한국에선 형이 아우를 위해 사는 것이 옳다"며 옥신각신하다 주인의 도움으로 겨우 음료수 값을 지불했다. 시골 청년의 순수를 닮아 느낌이 좋았다.

▲아미르와 이사크 ⓒ뉴스앤조이 신철민

아미르(30)와 이사크(29, 글자를 보니 이사크는 이삭을 의미하는 듯했다), 둘이서 함께 작년에 한국에 들어온 청년들이다. 둘은 모두 파키스탄의 카라치에 가족을 두고 왔다. 파키스탄에선 여성들이 일을 할 수 없다. 가사노동에만 관여할 뿐이다. 또 나이가 조금만 들어도 수입이 생기는 일자리를 얻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그들은 가난한 파키스탄의 가족들에게 한국에서 벌은 돈을 보낸다. 이드은 70만원의 월급 중 50만원을 1년 간 보내왔다. 그곳에서도 아미르와 이사크 씨는 함께 있었다. 무엇보다 파키스탄에서 극소수에 불과한 기독교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아미르 씨는 할아버지가 개신교회의 목사였다고 한다. 특히 그곳에 들어와 있는 한국인 선교사들과 많은 교제를 나눴으며, 지금도 그 선교사를 파송한 한국의 교회에 출석한다. 매주일 2시간 여 떨어진 거리를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면서 갔다 온다.

월급 체불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적 없다고 했다. 알고 보니 이들의 고용주는 종업원들의 방 값까지 지불하고 월급도 제때 지급하는 '좋은 사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직 한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아미르와 이사크 씨에게 있어 한국이란 나라는 그야말로 '최고'의 나라였다. 이들과의 만남은 의외였다. 그들은 "한국에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도리어 걱정이 앞섰다. 그들의 '코리안 드림'이 언제까지 달콤하게만 남아 있을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파키스탄에서 작년에 온 하산(27) 씨와의 만남에서 우리는 '일그러진 코리안 드림'을 지켜보아야 했다. 하산 씨는 파키스탄의 대학에서 컴퓨터그래픽을 전공하고 태국과 영국 등지에서 이주노동자 생활을 했다. 자연스럽게 그곳과 한국을 비교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에게 한국이란 나라는 없는 게 참 많은 나라다. 무엇보다 한국엔 인권이 없다. 예의도 없고, 특근수당도 없으며, 인간적인 정도 없다. 그래서 그에겐 '코리안 드림'이란 포기한 지 오래다. 그저 빚을 갚기 위해 일을 하고 시간을 떼울 뿐이다.

▲부천역 앞의 외국인 노동자들 ⓒ뉴스앤조이 김승범

하산 씨는 공장에서 한국인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이 새끼"란 욕이다. 정식 작업시간인 아침 8시 30분부터 저녁 7시 30분까지를 제대로 지킨 적이 거의 없었다. 늘 30분, 1시간, 많게는 4시간을 넘겨서 마쳐도 월급은 그대로였다. 이해할 수 없어 영어에 아는 한국어를 썩어 꼬치꼬치 물어보면 한국인들은 예의 그 "이 새끼"란 욕설과 함께 싫으면 그만두라는 식이었다. 무엇보다 불법체류자라는 약점을 알고 있는 그들은 언제나 최후의 카드를 선점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신고하겠다는 식으로. 물론 그렇게 되면 고용주에게도 벌금이 나오겠지만 아예 한국에서 추방되고, 다시는 외국으로 가서 돈을 벌 수 없게 될 자신의 피해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산 씨와의 대화가 익어갈 무렵 또 다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하산 씨와 그들의 말인 우두르어로 대화를 나누더니 하산 씨가 통역을 해줬다. 러시아 계통의 한 사람은 한국 생활이 이제 2개월 째인데 첫 직장에서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쫓겨나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 했다. 또 한 사람은 한국에서는 종교생활의 자유조차 보장받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금요일에 이슬람사원에 가야 하지만 일 때문에 갈 수 없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루 다섯 차례 기도시간조차 지킬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작업시간 중 단지 10분 정도의 시간만 배려해달라고 사정해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요즘 파키스탄의 동포들을 만나면 늘 "코리안 노 굿"을 주장한다고 했다. 하산 씨는 파키스탄에서 많은 사람들이 '코리안 노 굿'을 이야기하고 있다며 자기가 생각기에 적은 한국 사람들로부터 피해를 입었지만 모든 한국인이 나쁜 사람으로 매도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하산 씨는 토요일과 주일은 대부분 PC방에서 채팅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의 채팅 상대는 주로 영국인이나 필리핀인 등이다. 한국인들, 특히 여성들과 채팅을 시작하면 자신을 소개하는 순간부터 금새 대화가 끊이고 만다. '파키스탄에서 온 노동자', 이 신분은 한국의 여성들에게 마치 혐오의 대상처럼 들리는 것 같다고 하산 씨는 믿고 있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보장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국에선 적어도 나는 인간으로서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한국에선 대화를 할 때도 신분을 따진다. 이해할 수 없다."

대화가 며칠 전 일어난 미국에서의 테러 사건으로 넘어갔다. 하산 씨는 "누가 피해자인가" 되물으며 무척 흥분한 모습이었다.
"초강대국 미국은 '자국'의 개념이 없다. 어느 나라든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강요한다. 파키스탄에 왜 미군이 있어야 하나?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파키스탄은 파키스탄이고, 한국은 한국이다. 그런데 왜 미군이 있어야 하고, 미국이 그들의 생각을 강요하는가?"

하산 씨는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가르쳐주었다. 더 많은 대화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이미 해가 기울었다. 가게 앞에는 여전히 많은 '이방인'들로 붐볐다. 39번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소도 그들로 붐볐다. 작업복을 벗고 새 옷으로 말끔하게 차려 입었다. 처음 우리를 피했던 파키스탄 가게의 청년도 거기 서있었다. 여전히 우리를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9월 16일, 부천시를 찾았다. 작은 공장들이 단지를 만들고 있어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은 곳이다.

▲미얀마 출신 노동자들의 밴드 '유레카' ⓒ뉴스앤조이 김승범

부천시근로복지관 3층, '부천외국인노동자의 집'이 있다. 주일이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미리 들었다. 마침 미얀마와 네팔에서 온 노동자들이 모임을 갖고 있었다. 인터뷰 요청에 미얀마 공동체의 사무국장으로 일하는 꼬와인 씨(38)와 마움져 씨(32, 미얀마 공동체 조직국장)가 응했다. 그들은 이미 여러 차례의 상담을 통해 미얀마 노동자들의 한국 생활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6년째 한국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언어 소통도 불편이 없을 정도가 됐다.

▲꼬와인 씨 ⓒ뉴스앤조이 김승범
한국에 와 있는 미얀마 노동자들은 약 3000명 정도이며 이들의 피해사례 상담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작업을 하다 팔이 잘리는 재해를 입은 한 동료는 병원비도 못 받고 직장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한국으로 오기 위해 지불한 2000달러를 갚을 수 없다며 출국을 미루다 결국 비자연장도 못 받고 불법체류자로 남았다. 미얀마 공동체 사람들이 조금씩 보태주는 돈으로 불행한 한국생활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꼬와인 씨는 아내와 아들 딸이 미얀마에 살고 있다. 6년째 얼굴을 못 보고 전화와 편지로만 안부를 묻고 있다. 75만원의 월급 가운데 50만원을 보내고 있다. 9살 난 딸은 요즘 전화만 하면 빨리 돌아오라고 졸라댄다고 했다. 딸이 보낸 편지를 읽다 보면 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러나 불법체류자로 살아 왔기 때문에 돌아가면 다시 올 수 없으니 참는 도리밖에 없다.

아직 미혼인 마움져 씨는 언제까지 있을지 모를 한국생활에서 결혼은 아예 포기하기로 작정했다.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아기가 태어나면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움져 씨에겐 소중한 꿈이 있다. 미얀마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되면 그때는 돌아가 자신이 번 돈을 써서 시민단체 활동을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그는 시민들의 파워를 매우 인상적으로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NCC 인권사랑방에서도 교육을 받고 한국에서 배울 것은 모두 배운다는 각오로 살고 있다.

▲마움저 씨 ⓒ뉴스앤조이 김승범
복지관 3층 대강당에선 오는 10월 1일 있을 미얀마 공동체의 축제를 준비하는 '유레카' 밴드의 연습이 한창이었다. 연습시간에 쫓긴다며 인터뷰를 거절한 멤버들은 서로 얼굴을 붉혀 가며 한 곡 한 곡을 준비해 나갔다. 인디언 풍의 머리 모양에 미남형 얼굴, 테너 풍의 고운 목소리, 충분히 '오빠부대'를 몰고 다닐 만한 모습이었다. 이들은 매주일 이곳에서 연습을 한다. 그들에게도 미얀마로 돌아가 그들이 고생하며 준비한 곡들을 발표할 때가 올 것이란 꿈이 있었다. 아직 미얀마는 그들의 젊음을 담기엔 너무나 경직된 분위기이고, 일하면서 자유의 분위기를 호흡하기에 그래도 한국은 나쁘지 않은 나라였다.

부천역 앞, 백화점과 유흥가들이 즐비한 그곳에는 주일이면 수많은 '이방인'들의 발걸음이 오가는 곳이다. 아예 이곳을 약속장소로 삼아 만남을 갖는 젊은이들도 있다. 여기 저기서 다양한 얼굴의 다양한 언어들이 오가는 그곳은 이미 다국적 도시가 된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과 한국인이 너무나 다른 조건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다름을 인정하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각오하고 온 사람들은 아예 '이방인'의 삶을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빚을 갚아야 하고, 가족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는 한 '이방인'의 삶은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구속이다. 그래서 영원히 낯선 땅으로 남을지 모를 한국의 가을 공기는 그들에게 더욱 싸늘하기만 하다. 게다가 다시 그 추운 한국의 겨울이 곧 다가올 것이란 두려움으로 그들은 옷깃을 더욱 여밀 수밖에 없다.

부천외국인노동자의 집에서 활동하는 이완 간사의 이야기가 계속 머리에 남았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10년 간 떨어져 있으면 유대는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가족과 함께 들어올 수 없는 이들이 더 많지만 설사 함께 오는 경우에도 자녀 교육 문제 등이 고민거리다. 실제로 어떤 학교의 교감은 외국인 노동자의 자녀를 데리고 가면 '다른 학교로 보내달라'고 오히려 애원을 한다. 많은 학교에서 꺼리는 모습이 역력하다. 혼자서 한국 생활을 하기도 벅차다. 인격적인 모멸감도 많이 느낀다. 당장 그들은 어디 가서든 반말을 듣기가 십상이다. 게다가 그들의 박봉으로 이런 한국 생활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겠는가? 술 담배 마약 매춘…,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기적이 아닐까? 올 해 들어 우리가 아는 경우만 3명이 이런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자살을 시도했다. 아마 그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이방인'이다. 그러면 누가 그들의 이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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