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제목의 글을 올린 이후 독자들의 반응이 매우 격렬함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초점은 첫째, 왜 그렇게 전병욱 목사를 밟지 못해 안달이냐, 둘째, 의도는 동의하지만 어찌 그리 표현이 거친가, 셋째, 성서 인용 대목과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오보가 있다,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올라온 글 가운데 특히 고창현님의 글은 특별히 의미 있게 다가와 반드시 답변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뉴스앤조이> 이번 신문 발간을 끝내는 작업 때문에 이제서야 이와 관련해 정리 하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 그토록 전 목사를 끈질기게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가

우선 첫 번째, 전병욱 목사를 왜 그토록 끈질기게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혹자는 시기심 때문이라거나 혹자는 같이 뜨고 싶어서라거나 하는 식으로 이 문제에 대한 나름의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다만, 대다수의 <뉴스앤조이> 독자들은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으실 것으로 믿습니다. 전병욱 목사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올리게 된 애초의 동기는 두 가지입니다. 그가 이 땅의 청년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과, 그 영향력의 성격이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을 들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전병욱 비판적 읽기>에서 누누이 언급했던 바이기에 재론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목회자가 걸핏하면 자신의 영광을 내세우는 자세는 치열하게 비판 내지는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그는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언사를 매우 자주 쓰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혹 좀 지나친 느낌을 주지 않을까 싶어 자제했지만 명백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전병욱 목사에 대한 옹호론을 펴는 분들은 어찌해서 이렇게 그에게 관대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서는 저의 글과 관련해서는 어떻게 그렇게 인신공격적이냐, 말이 왜 그렇게 비난조냐 할 수 있는지 또한 의문입니다. 그러한 경우를 들라면 전병욱 목사의 발언에서 훨씬 더 심하고 더 많은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전병욱 목사 옹호란자들은 그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침묵하는 것일까요?  

목회자에게 있어서 자기를 유난히 내세우거나 그것을 위해서 자화자찬을 넘어서 거짓으로 들리는 말까지 하게 되면 이는 상당히 심각한 상태라고 봐야 합니다. 그 스스로 성공주의에 사로잡힌 결과입니다. 저는 전병욱 목사를 정죄 하려는 것에 글쓰기의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영향력이 더 이상은 신뢰받아서는 아니 된다는 점과, 그로써 청년 기독인들이 보다 바른 역사관과 신앙의 토대 위에 서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작업이 전병욱 목사에 대한 비판으로 완성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전병욱 목사의 유형과 같은 이들이 한국교회에 모델처럼 존재하게 될 때 한국 교회의 미래는 병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한 저의 소신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절제된 방식으로 논점에 다가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둘째, 의도는 동의하지만 표현이 보다 정제된다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견입니다. 너무 선동적이고 선정적인 측면이 강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글쓰기에 있어서 언제나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제된 표현만으로 부족한 경우도 생겨납니다. 그것이 절제되지 않은 감정을 표출한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통상적으로 정제된 표현이란 점잖고 힐난조가 아니며 객관적 논리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가는 방식을 뜻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태의 본질을 명확히 정리하는 과정은 우리에게 "아니, 이거 이럴 수 있어?" 하는 식의 표현을 요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테러 사건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도 오사마 빈 라덴이 범인인줄 모르고 있다. 그러나 나만은 알고 있으며 확신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이미 오래 전 "그의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경고를 입증할 만한 글이 사실은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오사마 빈 라덴에게서 배울 바를 강조한 글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의 정신상태를 온전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자신의 우월성을 강조하다가 그만 자신이 쓴 글의 내용조차 전혀 다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의 심리를 과대망상으로 표현하는 것조차 사실은 절제한 경우가 아닐까요?  

만일 누군가가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아무도 그걸 미리 몰랐겠지만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지, 내가 이전에 쓴 글을 봐. 그렇게 독재하면서 정치하다가는 결국 암살 당한다고 경고했잖아." 그랬는데, 그 글을 보니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은 글임이 밝혀졌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의 말을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 예가 반드시 전병욱 목사의 경우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는 자신의 글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고, 상황에 따라 그 내용을 변조해버리는 것은 정말이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 입은 실로 하나님의 말씀의 무게를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 언제나 이러한 원칙에 충실하기는 어렵겠지만, 공개된 글이 있는데 그 내용을 이렇게 자신의 예견력을 부각시키고 정당화하는데 이용해서는 아니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에는 인터넷이 있어서 이전에 했던 말과 글에 대해서 꼼짝없이 책임져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전병욱 목사는 스스로 반성해야 할 점이 적지 않습니다. 그의 말과 글을 가르켜 "과대망상", "코미디 수준", "강심장(?)" 했던 것이 그토록 거부감을 일으킬 심한 표현이었다면, 대체 어떻게 표현했어야 하는 것일까요?  

과대망상이라는 말을 점잖게 풀어서 "자신을 좀 너무 큰 인물로 착각하고 있는 정신상태가 아닌가 싶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가 있을 것이고, 자신의 말을 뒤집어 자화자찬하는 것은 정말이지 우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코미디 수준이라고 하는 것이 비아냥이라면, "이건 좀 우스운 이야기 아닌가"해도 인신공격이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전병욱 목사가 타자를 향해 날리는 언어 폭력의 내용을 열거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매우 비열하고 야비하다는 느낌조차 가지게 합니다. 이것은 이미 <전병욱 비판적 읽기>에서 그런 예를 여럿 든 바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이런 정도의 표현은 사실 부족할 지경입니다. (왜 전병욱 옹호론자들은 그의 "빈정거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일까요?)

그러나 이런 표현조차 혹 거부감이 든다면, 앞으로 좀더 절제된 방식으로 논점에 다가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표현방식이 논점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한다면 문제가 되니까 말입니다. 아무튼 좋은 충고로 받아들여 앞으로의 글쓰기 방식에 최대한 반영하도록 애쓰겠습니다. 다만, 앞으로 글의 논점 자체에 집중해서 의견들이 개진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오사마 빈 라덴'과 '누가복음 14장 28-32절'과 관련한 문제

셋째, '오사마 빈 라덴'과 '누가복음 14장 28-32절'과 관련한 문제입니다.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고창현님의 지적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립니다. 오사마 빈 라덴은 1979년 아프가니스탄과 구소련군과의 전쟁에 참여, 미 CIA로부터 훈련을 받는 등 적극적인 지원아래 20대의 나이에 벌써 상당한 지도적 역할을 감당합니다. 구 소련군이 물러간 이후 오사마 빈 라덴 휘하의 부대는 <아랍 아프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습니다. 이들은 구 소련군이 퇴각한 공백에 영향력을 미쳐 친미정권을 세우려 했던 미국과 또다시 새로운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와 항전한 이들이 미국에 포섭될 줄 알았으나 돌아서자 미국은 상당히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인이 아니면서 아프가니스탄 독립 전쟁에 참여한 <아랍 아프간>세력을 이로써 주시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오사마 빈 라덴이 있음을 알고 그를 제거하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오사마 빈 라덴은 일단 사우디 아라비아로 돌아가 그의 가문의 재력을 재정비하는 작업에 몰두합니다. 그로써는 이슬람 혁명을 위한 새로운 준비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미국으로서는 자신을 배반한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축출을 사우디 아라비아 정권에 계속 요구했고, 친미적으로 기울어가고 있던 사우디 아라비아 정권에 반기를 든 오사마 빈 라덴은 결국 1991년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미국과 오사마 빈 라덴의 관계는 이렇게 애당초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친미정권을 수립하려던 계획이 좌절되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대결의 양상이 격화되었던 것은 그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축출 당하고 난 이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창현님이 오사마 빈 라덴의 반미테러의 시점을 1991년으로 본 것은 틀리지 않지만,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구 소련군 퇴각 이후 아프가니스탄 문제 처리의 과정에서 이미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제 차차 구체화되겠지만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키고 친미정권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음이 이번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은 자신의 이슬람 혁명의 전진기지로 아프가니스탄을 거점으로 삼았고, 미국은 그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을 이번 기회에 진멸 함으로써 이슬람 혁명의 근거지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이라크와 이란을 압박할 수 있는 중앙아시아의 거점을 확보하려는 장대한 구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민중신학적 관점도 아니고,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보는 제한된 세계관의 결과가 아니라 현실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는 이미 딕 체니 부통령을 비롯한 부시 정권의 강경파들이 주장하고 있는 바입니다. 저의 개인적 주장이 아니라, 객관적인 국제정세의 상황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를 보다 반영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었으면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식 전체에 대한 매우 중대한 오판

"전쟁을 하려면 정확하게 계산하고 회계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는 전병욱 목사의 발언이 성서적 근거가 있다는 지적과 관련하여 논란이 된 성서의 대목, 누가복음 14장 28절-32절의 전후를 살펴봅시다. <표준새번역>으로 보겠습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와 동행하였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 누가 망대를 세우려고 하면, 그것을 완성할 만한 비용이 자기에게 있는지를, 먼저 앉아서 셈하여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하지 않아서, 기초만 놓은 채 완성하지 못하면, 보는 사람들이 그를 비웃기 시작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짓기를 시작만 하고 끝내지는 못하였구나' 할 것이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로 밀고 들어오는 자를 만 명으로 당해 낼 수 있을지를,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당해낼 수 없겠으면, 그가 아직 멀리 있는 동안에,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청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서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전병욱 목사는 믿음을 내세워 현실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해 실패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전쟁을 하려면 정확하게 계산하고 회계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그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전병욱 목사의 말이 성서적 근거가 있다고 여기는 분들은 그 말이 앞에 든 누가복음의 본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보자면 얼핏 그렇게 볼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어디에서도 "전쟁을 하려면 정확하게 계산하고 회계해야 한다"는 명령적 결론을 내리신 바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일을 끝까지 완성하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용이 충분한지 우선 계산해 보는 법이며, 왕이 전쟁을 해도 자신의 형편을 먼저 살펴보는 법이 아니더냐, 는 것입니다. 이 망대 건설과 왕끼리의 전쟁 비유에는 어떤 일을 할 때에 자신의 형편을 먼저 측정하는 것이 세상사의 보편적인 논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용과 군대를 계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마치시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러므로>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그러므로>의 전제는 예수를 따르려면 모든 것을 바쳐 십자가를 지라는 요구에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므로>로 이어지는 결론은 자신에게 십자가를 지고 갈 만한 자세가 있는지 먼저 깊이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사를 감당하는 경우에도 계산하는 법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일을 맡겠다고 나설 때에는 자신의 헌신여부에 대해서 깊이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과 군대를 헤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병욱 목사의 말대로 믿음이라는 타이틀로 '현실적인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질타가 아니라, '십자가적 헌신의 각오'가 자신에게 있는지를 물으라는 것입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고 있으나, 그 가운데 제자가 되려는 이는 십자가의 각오를 스스로에게 되새기라는 것입니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말고(망대 짓다 끝까지 일을 하지 못해 빈정거림의 대상이 되지 말며), 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지내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전쟁보다는 화친을 택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따져봐서 돈이 없거나 군대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의 조건을 계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십자가적 헌신이 현실적 준비의 정확성을 뛰어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이를 가지고 전쟁을 하려면 정확하게 계산하고 회계해야 한다는 명령형으로 인용하여, 그 뒤에 "지도자는 한정된 자원을 동원할 수 있어야 하고, ...무슨 방법을 동원하든지 성도들의 헌신을 끌어내야 한다"는 식의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말씀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 말씀은 이러한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자신의 일을 할 때조차도 자기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따진다. 나는 너희들에게 묻는다. 그들이 따지는 것 이상으로 자신에게 헌신의 영혼이 얼마나 분명한가를 먼저 물어라. (이때 따짐은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계산적 사고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계산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승리에 대한 헌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현실의 부족함은 하늘이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품지 않을 바에야 애초부터 따라올 생각일랑 말고, 적당히 세상사와 타협하면서 지내는 것이 도리어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따르려면 먼저 헌신의 자세를 점검해야 할 것이다."  

현실을 바로 알고 정확히 판단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헌신을 보다 정교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령,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빌립은 그들이 필요한 돈이 이백 데나리온이라고 계산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이 계산을 뛰어넘는 하늘의 방식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계산해도 오병이어의 기적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전쟁에 임할 때 정확하게 계산하고 회계하라는 작전 명령을 예수님은 결단코 내리신 바가 없습니다. 오로지 십자가의 헌신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헌신의 각오가 있는지 치열하게 질문을 던지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전병욱 목사의 말대로 "무슨 방법을 써서든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 의에 대한 비전과 이에 대한 열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계산이 정확하고 빠른 사람의 헌신을 요구하게 된다면 그것은 세상의 논리를 따르는 방식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계산의 한계를 초월하는 곳에 있습니다. 전병욱 목사가 예수께서 계산하라고 말씀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방식 전체에 대한 매우 중대한 오판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자주의적 해석의 해독(害毒)입니다. 예수께서는 따르는 무리들로부터 헌신을 이끌어 내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따르는 무리 자신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헌신성에 대한 자세를 정립하라는 요구를 하신 것입니다. 나아가 이 질문은 우리들 모두에게 언제나 '제자도'의 원칙을 점검하게 해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 십자가가 인간의 계산으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 네! 하고 응답하며 자신을 전부 바치는 영혼에게 열리는 길이 아닐까요? 계산의 현실적 유익을 부정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그 계산의 한계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렇게 세상의 경영방식에 맞추어 해석하고 왜곡 인용하는 것은 성서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결론적으로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따르기란 얼마나 어렵습니까? 결국 무슨 말씀이시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현실적 자원 동원의 전략과 관련한 언술입니까? '자기 소유'라는 말로 대변되는 일체의 세상적 가치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에 전력 투구하는 자가 아니면, 제자의 길을 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할 마음이 없다면, 시작은 했으나 중도에 포기하든지 아니면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로 이 말씀이 그대로 따르기 어려우니, 우리가 가는 예수 제자의 길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품고 나가노라면, 어느새 우리가 차차 자기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적 가치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쏟는 그런 사람들로 훈련되어 가겠지요.    

부디, 글의 논점 자체에 집중하여 우리의 논의를 풀어나갔으면 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세대의 위기에 대하여 우리가 예언의 육성을 토하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향한 우리 모두의 열정을 새롭게 불태워 한국 교회와 이 나라, 인류의 미래를 바꾸어 나가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독자 여러분들의 의견과 질정에 감사를 드리며, 특히 논점의 심화를 위해 사려깊고 차분한 글쓰기를 해주신 고창현님에게 특별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좋은 문제제기이자 대화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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