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의 의도

전병욱 목사의 강좌 내용에 대한 비판 기사와 관련하여 그간 여러 가지 반응들을 접할 수 있었다. 부정적인 반응의 경우, 아쉬웠던 것은 기사 자체의 내용에 대한 반론이라기보다는, 왜 앞길이 창창한 젊은 목사를 겨냥하는가,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지 마라, 네가 목회 하면 얼마나 잘 할 것 같으냐? 그런 식으로 처대면 한국교회에서 남아날 인물이 있겠는가, 더 큰 놈들은 안치고 잔챙이만 건드리면서 선정적으로 떠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등등이었다.

비판 기사 자체의 논리나 그 내용과 관련하여 한국교회의 앞날을 어떻게 바르게 개혁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녹아 있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이 기획시리즈의 의도와 관련한 오해를 정리하기 위해 몇 가지 전제할 바가 있다.  

전병욱 목사 개인에 대한 옹호나 비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강좌와 신학적 사고에 깊이 스며있고 드러나는 문제들을 우리는 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전병욱 목사의 경우 대표적으로 노출되었다 뿐이지 오늘날 한국교회 전반에 걸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획은 바로 그렇게 한국교회 전반에 걸친 비판과 개혁을 기본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획의 전개 과정에서 우리는 전병욱 목사의 경우를 충분히 비판한 이후, 이러한 모델을 한국교회의 미래처럼 인식하도록 만든 보다 근원적인 요소들을 심층적으로 해부해나갈 것이다. 거기에서 차세대 지도자를 꿈꾸는 전병욱 목사를 길러낸 기존 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과 이들이 이끄는 교회들의 반 예수적 메시지의 실상을 정면으로 분석해나갈 것이다.  

하여 첫째, 전병욱 목사가 이 기획시리즈의 첫 비판의 대상으로 선정된 까닭은 그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미래를 걸머지고 나가는 젊은 목회자 세대의 대표주자처럼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신학이 나사렛 예수의 삶이 지향하는 바와 배치되고 각종 인문/사회과학적 분야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무지에 기초한 문제 투성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에, 그에 대한 비판은 불가피하다. 이 대목에 대하여 기사의 내용에 오류가 있다면 지적해주기를 바란다. 한국신학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그러한 논쟁을 귀중하게 경청할 것이다.

둘째, 어떻게 젊은 나이의 목회자가 이토록 성장주의 구세대들의 논리와 입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가에 대한 충격이 우리에게는 크다. 포장만 젊은 세대의 언어적 감성에 다가갔을 뿐, 그 내용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진정한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탄받고 있는 대형교회주의자들의 시각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어 안타까운 것이다. 그 개인의 새로운 발전과 전환의 계기를 위해서라도 전병욱 목사는 이 기획기사를 세심히 읽고 성숙의 기회로 삼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간절하다. 이 기획기사를 마련하는 팀은 전병욱 목사보다는 상대적으로 목회적 경험이 풍부하고 신학적 성찰의 고투를 해온 연조가 깊은 선배세대들이다.  

부디 이 기획기사를 개인적인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전병욱 목사와 같이 패기만만하고 열정적인 능력을 가진 후배의 아름다운 성장이 있기를 바라는 선배들의 마음이 여기에 깔려 있음을 주시해주기를 소망한다. 사실 이 기획기사 작성의 작업과정에서 우리를 괴롭힌 것은 전병욱 목사가 받게 될 지도 모를 정신적 상처였다. 그러나 그가 워낙 강좌마다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상처, 상처하는 놈들 웃긴다" 하는 식이어서 그의 이 같은 견고한 <정신적 맷집>을 믿고 이렇게 보기에 따라서는 다소 강한 논조를 유지하는 것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셋째, 우리는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속단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 부분 부분이 전체의 큰 줄기를 그대로 그리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부분이 어떻게 전체적인 신학적 입지와 연결되어 있는가를 주목하고 있다. 강좌 때마다 강조점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살피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대목이 아니다. 그 부분 부분, 그 구체적인 내용에 접근하는 총체적인 자세, 전반적인 인식의 방향과 그 기반이다. 그 어느 것도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총체적인 인식의 줄기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전체적 신학의 틀이 가진 모순과 한계를 추적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넷째, 실로 목회 현장은 까다롭고 복잡하다. 모두를 만족시킬 도리도 없고, 또 그것이 목적도 아니다. 아무리 이론적 정교성을 가지고 있어도, 목회 현장의 성격에 따라 신학적 적용의 한계가 발생하기도 하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목회 현장의 성격에 따라 그 접근의 내용이 특화될 수도 있다. 노인들이 많은 교회와 청년들이 많은 교회, 장애자가 많은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교육적 수준과 관심이 일정한 경우와 그 중간을 잡기 어려운 경우 등등 목회 현장이 요구하는 복잡다단한 사고와 접근은 목회의 실체적 경험이 없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병욱 목사의 목회적 고민과 반성, 그리고 어려움에 대하여 몰이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목회자의 고민이며, 장래 그 길을 걸으려는 신학도들을 비롯하여 함께 교회 공동체를 끌고 나가야 하는 평신도들 자신의 숙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바로 이 생생한 목회 현장에서 던져지고 길러지는 신학적 씨앗들, 신앙적 맹아(萌芽)들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목회 현장이 가하는 압박과 어려움이 있다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영적 역량으로 바르게 돌파해나가도록 해야만 한국교회에 미래가 있다.

현세의 요구에 영합하지 말고 도리어 한국의 시대적 상황을 힘있게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저력을 기르는 일을 이 기획기사를 통해서 시도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전병욱 목사의 신학적 모순과 한계를 명확히 밝혀나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목회 현장의 진로를 보다 구체적으로 정립해나가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다섯째, 서두에서도 이미 밝혔듯이 이 기획기사의 비판대상은 전병욱 목사만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이 기획시리즈를 통해서 한국교회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다고 하는 인물들에 대한 점검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작업을 위해 이 기획기사는 매우 중요한 시동을 거는 의미를 가지게 될 것으로 믿는다.

전병욱 목사의 신학과 신앙에는 바로 이 한국교회의 모순과 한계가 매우 뿌리깊게 투영되고 있기에 우리는 이 기사의 작성 과정에서 한국교회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충분한 논쟁의 기초를 마련해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실로 이러한 방식의 비판에 걸리지 않을 교회 지도자가 없다면 이것은 종교개혁 수준의 전면적인 변화가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한국교회가 진정한 나사렛 예수의 삶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나사렛 예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으며, 그것을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정당화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운명에 치명적인 자해행위가 된다.

지금 또다시 한국의 국가적 운명에 대한 깊은 불안과 위기의식이 심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교회가 다시금 속수무책의 자기도취와 자기확대의 야망에 사로잡혀 있다면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맛을 잃은 소금의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부디 독자들은 이 기획기사의 절절한 마음과 소망에 동참하여 도처에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개혁하는 일에 힘있고 논리정연하게 나서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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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욱 목사가 제기한 주제의 중요성

그는 세 번째 강좌에서 신앙의 균형을 강조하면서 이것을 바로 세울 수 있는 방안으로 (1)지식, (2)행동 그리고 (3)초월적 능력에 대한 믿음을 꼽았다. <균형있는 신앙>이라는 주제와, 이를 뒷받침해줄 이러한 항목들은 그 내용이 제대로 채워지면 매우 중요한 문제제기가 될 수 있다.  

신앙이 균형을 잃고 어느 한 방향으로만 치닫게 되면, 전체적으로 골고루 요구되는 능력을 길러낼 수가 없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다 인줄로 생각하는 편협한 무지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그의 이러한 지적은 어느 하나에만 집착하는 편집적(偏執的) 편향에 기울기 쉬운 젊은 세대들에 대한 경고로서 옳다. 그래서 지식의 수준이나 깊이도 제대로 되어 있고 이를 바탕으로 행동할 줄도 알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에 흔들림 없이 의지하는 굳건한 믿음이 추가된다면 실로 모범적으로 성숙한 신앙이 될 것이다.

자, 이제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전병욱 목사가 말하고자 하는 지식, 행동, 초월적 신앙의 내용에 대하여 점검해보기로 하자. 그 내용의 구체성이 그의 논지의 정당성을 확보해줄 것이며 그로써 신앙적, 신학적 설득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 지식과 신학의 빈곤에 대한 개탄

그는 한국교회의 청년 운동이 성서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의 전통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지적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진단하고 있다. 이들 젊은이들은 "책은 안 읽고 밤낮 음악테이프만 듣고 있고" 신학적 이론의 무장이 없다고 탄식한다. 기록을 중요시하지 않는 문화적 풍토의 문제, 성서에 대한 이해 수준의 문제 등등 전병욱 목사는 한국교회가 지적 성숙과 축적의 기반이 부족하고 이에 따라 말씀으로 무장하는 신앙부흥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감각적인 취미에 빠져 말씀을 떠났으며, 책도 읽지 않는 청년의 머리에서 나올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 지적과 주장은 개괄적으로 백 번 옳다. 하지만, 문제는 두 가지이다. 어떤 관점에서 지식의 빈곤과 신학의 한계를 논하고 있는가 이고, 어떻게 이러한 현실을 타개해나갈 것인가에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한국교회의 청년들이 단지 책을 읽지 않고, 성서도 읽지 않고 있으며 이와 함께, 한국교회가 신학적인 한계에 직면해 있다는 이야기만 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 매우 도식적인 분석과 훈육적(訓育的) 처방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전병욱 목사가 앞으로도 계속 젊은이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고자 한다면 좀 더 깊은 성찰과, 현실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피상적인 수준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도의 이야기에 밤낮 맴돌아 그 자신의 성장이 정지할 수 있다는 점을 스스로 경계해야 할 것이다.  

도대체 이 시대를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면서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떤 지식이 요구되는 것인지, 성서를 제대로 읽어내려면 어떤 안목과 역량이 필요한 것인지, 성서해석의 기본관점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한국교회가 부딪히고 있는 신학적 한계의 구체적인 실상은 무엇인지가 명료하게 밝혀져야만 그 다음의 타개책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교회의 지도자는 그 시대가 어떤 지적 빈곤과 영적 쇠퇴에 이르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포착해서 필요한 지적 재고의 내용을 제시해줘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 대제사장, 그리고 바리새파들을 생각해 보라. 이들 만큼 당대의 지적 축적에 있어서 필적할만한 이들이 없었고, 성서 읽기로 따지자면 타의 추종을 불허한 자들이었다. 사도 바울 역시 회심 이전에 마찬가지의 처지였다. 유럽의 중세는 신학적 사고와 주장이 도리어 넘치고도 넘쳐서 문제가 될 지경이었다. 이들이 당대의 위기를 자초한 세력들이었다는 점은 이들이 지적 체계를 비롯해 다른 요소들을 골고루 갖춘 균형 잡힌 신앙을 갖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지식 자체와 신학 자체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어떤 것을 알고 있으며 어떤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우치는가가 핵심인 것이다. 필요없는 지식을 아무리 많이 축적해봐야 의미가 없으며, 성서를 달달 외운다고 해봐야 구태의연하고 앞뒤가 꽉 막힌 신학적 관점에서 그 내용을 묵상한다면 교리주의적 독선에 빠질 뿐이다.  

따라서 많은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어떤 책들을 집어들어 파고 들어가야 하는가가 보다 더 중요하다. 성서를 많이 읽는다고 성서가 제대로 열리는 것도 아니다. 신학적 이론을 풍성하게 알고 쌓으면 신학적 한계가 자동적으로 타파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전병욱 목사의 지식 체계는 적지 않은 결함과 문제를 안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그는 기록부재의 현실이 역사를 후퇴시키는 보기로 아즈텍 문명, 잉카 문명을 들고 있다. 전병욱 목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문명 가운데 아즈텍 문명, 잉카 문명 이런 문명이 대단했지만, 지금은 지리멸렬했던 지금은 기록에도 남지 않았던 이유가 뭡니까?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의 고대사적 유적의 대표로 꼽을 수 있는 아즈텍, 잉카 문명은 16세기 서구 제국주의 침략과정에서 파괴되고 멸종 당한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 문명은 기록부재로 소멸된 것이 아니라, 백인 우월적 인종주의와, 정복주의적 기독교 문명을 앞세웠던 세력에 의해 토벌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 문명의 역사적 승계를 중단시켰던 것은 이들 문명 자체의 기록능력이 없는 탓이 아니라, 문명과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과학지식을 지배와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한 자들의 죄악 때문이었다.

전병욱 목사의, 라틴 아메리카 고대문명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이해가 이런 각도와 수준에 있는 것은 그가 기본적으로 강자에 의해 억압당한 사람들의 현실에 관해 관심이 부족한 데서 기인한다. 그는 잉카, 아즈텍 문명 등 이런 경우 하나를 논할 때에라도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기록이 남겨져 있지 않다는 점 하나로 이들의 문명에 대한 평가를 하려드는 것은 역사와 인간의 삶에 깃든 복잡다단한 사연을 승자위주의 역사관으로 단순화시킬 위험이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에 덧붙여, 그 기록에 대한 가치평가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잘못된 기록,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보존하는 기록 등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정보와 지식을 독점한 기득권 세력에 대한 심각한 굴종주의를 낳게 되고 만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록에 대한 열정이 없게 된 까닭은 이민족의 지배와 정치적 박해라는 경험이 주효했다는 점을 살펴봐야 한다. 과거 우리 나라의 경우, 유교적 문화가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는 이름 없는 향촌의 지식인들도 자기자신의 문집(文集)을 만들어 기록의 방대함을 자랑했었다.

전병욱 목사가 전쟁의 와중에서 <난중일기>를 쓴 이순신을 놀랍다고 평가하지만, 당대에는 그런 기록작성이 이순신에게만 특별히 한정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지배하에 이러한 전통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이후 정치적 탄압이 기록을 남기는 일을 기피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 기록이 자신에게 언제 어떻게 불리하게 작용할 지 모른다는 점에서 기록 유지의 관습은 어느새 우리 문화에서 집단 무의식적으로 소멸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보기를 통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지식이란, 실무적 지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인간의 삶을 파괴한 세력들의 정체를 파악하고 이들이 누리고 있는 기존질서를 타개하는데 도움이 되는 지식이 되어야 나사렛 예수의 정신에 부합한다고 역설할 수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이들 문명이 기독교를 깃발로 든 세력들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엄연한 사실(史實)에 눈을 뜬다면, 역사에 대한 지식체계 하나만 해도 얼마나 정교하고 비판적으로 정리되어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존 칼빈의 기록에 의해 완성될 수 있었다는 주장은 종교개혁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이해가 빈약한데서 발생하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틴 루터는 아주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혁명가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틴 루터만 있었더라면 혁명, 이 종교개혁은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록이 없기 때문에...존 칼빈. 생기기도 아주 깐깐하게 생긴 사람인데, 이 사람은 앉아 가지고 용의주도하게 종교개혁의 사상들을 정리했습니다. 그게 <기독교 강요>아닙니까? 결국은 정리하고 기록하고 책 쓰는 사람에게 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사에서 이 두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며, 존 칼빈의 신학적 논리가 종교개혁의 이론적 지주가 된 것 또한 분명하다. 그러나 바로 이 존 칼빈의 권위주의적 신학체계가 종교개혁의 불길이 민중적 차원에서 새롭게 생명력을 얻으려는 상황을 질식시켰다는 점을 안다면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당대의 농민들이 봉건체제의 억압에서 신음하고 있는 현실을 결국 외면하고 신흥군주와 결탁함으로써 갈수록 개혁성을 상실해갔고, 존 칼빈에 이르면 신흥 중산계급의 지배체제를 새롭게 구성하기 위한 정치철학적 기반이 되어갔다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종교개혁사의 과정을 조금만 깊이 공부해보면 누구나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여기서 <기록된 지식>이 한 역할을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 기록된 지식은 기록되지 못한 지식보다 못한가? 아니다. 기록성 여부로 그 지식의 수준과 성격이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 자체의 목적과 성격, 그리고 내용 자체로 우리는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마틴 루터나 존 칼빈이 가톨릭의 억압적 위계질서에 항거한 시점에서는 그들의 지식과 신학은 개혁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당대의 신흥 정치경제 지배세력과 손을 잡으면서부터는 개혁성 보다는 또 하나의 억압적인 체계를 지향하기 시작했고, 봉건적 질곡 속에 있던 가난한 농민들의 아우성을 짓밟는 일을 정당화하는 일에 앞장서고 말았던 것이다.  

종교개혁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역사적 지식은 따라서 나사렛 예수께서 선포하셨듯이 가난한 민중들의 삶에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이루어지기보다는, 성서의 본래적 정신이 이렇게 새로운 기득권 세력의 이념적 도구로 변질되어 간 과정에 대한 파악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 만이 우리의 지식이 올바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기준과 내용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게, 지식은 많으나 불의한 기득권 세력과 기존질서에 봉사하는 결과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전병욱 목사는 바로 이 불의한 기득권 세력이 해석해온 역사관에 물들어 나사렛 예수의 제자로서 지향해야 할 지식의 성격에 대하여 분명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지식의 문제를 논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역사관이 우리가 앞서 비판하고 강조했던 그의 성공주의, 승리주의의 논리를 낳고 있음을 분명히 봐야 할 것이다.

지식의 빈곤을 타개하는 방식, 특히 성서에 대한 무지를 타개하는 방식에서 그는 성경에 대한 무조건적 암기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다. "유태인들은 어려서부터 신학화 작업을 합니다. 초등학교 나이에 가는 학교를 갖다가 벧하세퍼라 그럽니다. 이것을 성경의 집이라 그래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 어렸을 때에는 뭐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을 외우게 만들어요. 신명기부터 그냥 외우게 합니다. 사서삼경 외우듯이 암기해 버립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당시의 나이에 무조건 암기하는 거예요. '독서백편의자현'이예요. 그냥 많이 읽어 봐라 그러면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한 교육학을 배워가지고 초등학교 아이들을 모아놓고 난 다음에 토론식 학습을 하재요. 뭐 알아야 토론을 하죠. 중학교 일학년 애들 다섯명을 모아놓고 열시간을 토론해도 미분을 풀 수 없습니다. 적분을 풀 수 없습니다. 기초적인 작업이 되어 있어야 토론이 되는 거지요.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토론을 하재요. 우리는 무슨 주입식 교육은 아니다, 뭐 교회가 이 꼴이 뭐냐? 그래놓고 기초도 안된 사람들을 모아놓고 토론을 하재요... 처음엔 주입식입니다. 우리가 뭘 압니까?... 그리고 난 다음에 중학교 정도의 나이가 되면 벤탈무드, 그래가지고 설명의 집, 적용의 때입니다."  

인간의 인지발달과정을 보면, 비판적인 이성이 급속하게 발달하는 시기가 있다. 그러기 전에 그러한 인식능력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따라서 그러한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지적 재고를 충분히 쌓는 작업을 하는 것이 순서라고 여기는 것은 당연한 논리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전병욱 목사는 처음에는 성서에 대한 무조건적인 입력과정이 있어야 하고 성서의 의미를 깨닫고 적용하여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작업은 그 다음에 이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인간의 초기 지능발달단계에서 사물에 어떻게 접근하도록 하는가는 그의 일생을 지배 내지는 좌우할 정도이다. 그런데, 비판적인 이성과 파격적 깨우침은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기능이 꾸준히 길러지는 가운데서 온전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주입식 교육이 교육 초기부터 전반적으로 강조 또는 강요되면 그 영향은 거의 평생을 간다.

한국교육의 문제 가운데 이 대목은 실로 심각할 지경이다. 사물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에 관심을 보이는 나이에 질문이 허용되지 않고 새로운 발상이 자극되지 않는 교육은 그 인간의 다양한 인지능력을 처음부터 죽이는 교육이다.  

전병욱 목사는 미분 적분을 푸는 일에 기초도 없는 사람들을 데려다놓고 토론해봐야 아무런 소득이 없다고 주장한다. 당연하다. 미분과 적분이라는 고도의 사고방식은 그 사고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이 역사적으로 축적된 기반 위에서 비로소 가능했기 때문에 그런 사고발달과정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들의 토론은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기초적인 작업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분과 적분의 기본공식과 개념을 뜻하는가? 아니다. 바로 이렇게 잘못된 개념으로 이루어진 <기초>에 대한 주입식 교육이 존재해왔기 때문에 어려운 대학수학을 마치고도 왜 미분과 적분이라는 사고가 우리에게 요구되는지 알지 못하고 문제 푸는 일에 매달리는 "똑똑한 바보"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미분과 적분은 운동하는 사물, 3차원의 사물이 유지하고 있는 질서를 어떻게 수학적 관계로 해명해내는가의 과제 앞에서 필요해진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미분과 적분의 기본적인 수학공식을 주입시키는 것이 수학교육의 기초가 아니라, 사물의 운동, 3차원의 사물을 어떻게 해부해야 되는가에 대한 생각을 자극하고 길러주는 과정에서 미분과 적분의 인식은 매우 명료해지게 되는 것이다. 지식이란 의문과 관심, 그리고 추구의 과정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의문과 관심을 배제하고 주어진 지식체계를 그대로 입력하는 것은 인간의 뇌에 존재하는 매우 귀중한 기능들을 손상시키는 행위이다.  

성서에 대한 접근과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이야기와 기록들은 모두 인간이 살면서 직면했던 의문과 도전, 위기에 대한 신학적 해명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영감을 받고 잉태된 것들이다. 하여 "왜"라는 질문이 자라나도록 해주어서 그에 대한 해답으로 성서의 증언이 주어지는 과정을 통해 성서의 내면구조가 자연스럽게 다가올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성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에 대하여 아이들이 자유롭게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토론이 포함된 작업이 어찌해서 문제가 되는가? 주입식으로 이야기를 아이들의 머리 속에 박아놓아야만 성서의 입력이 만족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사는 아이들이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대목과 각도, 내용에 대하여 일깨우고 이것을 아이들이 자신의 삶으로 소화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암기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매우 필요하고 유용한 틀이 될 수 있음을 체험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러면 외우지 말라고 해도, 그 내용이 자연히 머리 속에 남게 되어 있다. 이것은 실로 매우 심도있는 연구와 꾸준한 노력이 요구된다. 우리가 주력해야 할 바는 이것이다. 이 능력이 없으니까 "그냥 무조건 외워"하고 강요하면서 "이 다음에 다 알게 돼" 하고 윽박지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야기 방식을 주목해보자. 놀랍게도 그는 사람들의 체험에서 매우 잘 알고 있는 내용을 소재로 하여 하나님의 뜻에 다가가도록 하셨다. 성서를 무조건 암기하는 것을 기초로 내세우지 않았다. 당대에 성서에 접할 수 있었던 사람들도 매우 제한적이었고, 그것을 암기할 수 있는 계층은 더더욱 제한적이었다.

양피지에 적힌 성서를 볼 수 있는 것은 랍비를 비롯하여 회당에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성서를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예수께서 씨뿌리는 이야기, 물고기 잡는 이야기, 양을 잃어버린 이야기 등으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신 것은 의미심장하다.  

전병욱 목사의 이야기대로 하자면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가난한 백성들은 성서에 대하여 무지했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기초가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무시당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매우 쉽고 간단한 이야기를 제시하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의미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그 뜻에 눈을 뜨는 일은 성서를 달달 외우고 그 내용을 전면적으로 암기하는 것에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서의 내용을 다 알지 못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를 알아야 한다면, 성서의 형성사에서 창세기만 존재했던 시기, 복음서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 등은 모두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예수님 시대는 신약성서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이며, 신약성서의 등장은 AD 100년이 가까운 시기에 이르러서였다는 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단 한가지 이야기라고 할 지라도 그 이야기에 담겨 있는 의미를 충실하게 살펴보고 생각하고 그 이야기를 삶의 이야기로 풍성하게 창조해내는 작업이 훨씬 중요한 것이다. 자신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르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신앙교육의 요체이다.  이야기를 아는 것은 물론 첫출발이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외우도록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방식이다. 외우지 않고,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뜻을 헤아리는 길이 막히는 것은 아니다.  

듣고 의문을 던지고, 대답하고 생각하는 과정이 있게 되면 그로써 사람은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그걸 모르고 "너는 기초 반이니까 그냥 읽고 외워" 하는 것은 인간모독이자 인간의 사고능력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다. 전병욱 목사의 강좌에 윽박지르기적인 분위기가 있는 것은 그의 인간관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장을 끝내기 전 참고로 한가지 첨가할 바는, <원리>에 대한 그의 주장 대목이다. 그는 "왕들은 권력을 가지고 있고 선지자들은 원리를 가지고 있다. 원리,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어디에 있는 지 아십니까? 원리에 있습니다. 원리. 그래서 세상을 보십시오.

모슬렘들을 보면 그 펀더먼털리스트라고 그러죠. 원리주의자, 그 회교원리주의자 그들이 강력한 것 아닙니까? 교회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도대체 예수를 믿으면, 예수 믿는 원리가 뭔지를 알아야지요. 내 목숨을 걸만한 십자가의 복음이 뭔지를 알아야지요."

그 믿는 종교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오늘날 현실에서 원리주의자들, 펀더먼털리스트들의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들은 매우 독선적이며, 자신들의 원리만이 정통이라고 주장하고 남들을 배타하며 그로써 자신과는 다른 신념과 종교를 가진 이들을 죽여서라도 박멸해야 한다고 믿는다. 기독교 펀더먼털리즘과 회교도 펀더먼털리즘은 공히 교조적 교리를 내세워, 종교의 생명력을 박탈하고 있음을 주시하라. 안식일에 대한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경직된 사고는 바로 그 펀더먼털리즘의 소산이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안식일의 본질보다는 안식일이 가지고 있는 교리적 위계질서에 집착하는 것이 펀더먼털리스트들의 특징이다.

안식일에 대한 이러한 개념의 경계선이 붕괴되면 신앙 전체가 깨어져 나간다고 믿는다. 하여, 예수께서 가장 맹렬하게 투쟁하신 대상은 다름 아닌 이 펀더먼털리즘의 교조적 권위주의와 냉혹한 인간관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식일의 진정한 주인을 복원하신 예수님의 뜻을 깊이 헤아려야 한다.)

전병욱 목사가 개탄한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학적 한계의 비극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신학이 나사렛 예수의 삶과 고난, 그 죽음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사회적 확산에 노력하지, 않고 교회의 제도적, 구조적 기득권 유지를 염두에 두고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신학을 명분으로 교인들을 목회자에게 순종하는 종으로 만들고 있으며, 그로써 교회가 교회 지도자 세력들의 특권을 방어하는 성채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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