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인간  존재의 궁극적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을 안고 있는 다른 종교의 고뇌와 깨우침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함부로 가타부타 하는
것은 당연히 무지한 자세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와의 대화가 곧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더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기독교의 경전, 성서의 세계에 깊숙이 들어가는 일을 통해 가능해진다. 우리는 거기에서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출발과 원천 그리고 발전의 현실을 만나게 된다.

다른 종교와의 대화는 기독교의 위상과 실체를 객관화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겠으나 '그 안으로 들어가는 일'과는 다르다. 말하자면 기독교 자체에 대한 내면화의  과정 없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지난번까지의 핵심적인 요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강남 박사는 성서를 어떻게 이해하며 접근하고 있을까?

성서 이해 수준을 비판 대상으로 삼아

그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성경을 믿는다,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행동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이 문제에 대한 자세가 바로 되어 있지 못할 경우, 우리는 성서의 진정한 육성과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어쩔수 없이 각자의 처지, 지적 능력, 영적 성숙도, 문제의식 등에 의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하나의 경전 텍스트를 놓고 이해도와 해석의 관점 그리고 추출해내는 메시지의 수준이 다른 것을 보아도 이 말은 옳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면서 논의를 계속해보자. 하나는 성경이라는 책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는 점, 둘째는 그 책을 대하는 우리 자신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이 두 가지 질문은 서로 맞물려 있다.

오강남 박사는 성서에 대한 여러 가지 접근, 즉 서구 신학이 발전시켜온 방식을 기준으로 하여 이미 서구에서는 이런 식의 이해는 없다는 등의 언급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 이해의 수준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과 논의는 첫째 성서학에 대한 발전사의 축적이 약한 우리의 입장에서 옳은 이야기인 동시에, 둘째 그렇다고 서구 성서신학이 도달한 성서 이해가 반드시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서구의 성서 이해는 발전의 축이 성서가 가지고 있는 내면적 구조, 역사적 지층을 집중적으로 주목해왔으며, 이러한 점검의 과정에서 이른바 오늘날의 과학적 이성의 기준에 맞추어 볼 때 설득력이 약한 대목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밑에 깔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서의 증언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성'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 논의는 이른바 역사적 예수의 상을 오늘날에 되살리는 작업 자체가 오늘의 관점에 의존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서구 신학의 논리와 연결되어 있다. 즉 성서에서 역사성을 따지는 것은 정력 낭비라는 것이며,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서가 고백하고 있는 바에 대한 의미를 깊이 헤아려 신앙의 성장에 도움이 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이야기(노아)의 역사적 과학적 가능성을 따지는데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는 대신, 조용히 그 이야기가 지금 나에게 주려는 깊은 뜻이 무엇인가 헤아려 보고 거기에서 얻을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믿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믿음의 근거는 그 이야기에 의미가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역사적 사실성' 따지는 것은 정력 낭비?

오강남 박사는 또한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현재 기독교 신학자로서 고집불통의 몇몇을 제외하면 기독교인이 그들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믿고 있는 아브라함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이라고 간주하거나 그에 관한 이야기가 실제 사건의 기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여 그는 덧붙이기를 "단군이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삼국유사」 등에 나타난 그에 대한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하자. 그렇다고 그를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일부 기독교인의 주장은 결국 역사적 인물이 아닌 아브라함이나 역사적 사실이 불분명한 예수를 역사적 사실과 상관없이 믿고 있는 그들 자신의 신앙 내용에 대한 자가당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는 중대한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역사적 예수의 실상을 우리가 정확하게 복구할 수 없다는 것과 역사적 사실로서의 예수의 존재가 불분명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
다. 가령, 아무개의 역사적 존재에 대한 규명과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그 아무개에 대한 이해를 규명의 주체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한계에 가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역사적 예수의 실상을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 정확히 파악하고 아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남아 있는 흔적 자체도 파편적이며, 그로 인해 예수의 현존을 총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일도 쉽지 않다. 그가 어떤 얼굴과 몸집이며, 어떤 음성의 소유자이고 어떤 걸음걸이의 특징을 지녔는지, 그가 가장 좋아한 노래는 무엇이며 그가 제자들을 불러모아 새로운 예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때 가장 헌신적으로 도운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역사적 예수의 복구 작업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예수의 역사적 존재, 실존 자체가 부인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존재가 갖고 있는 역사성·현실성에 깊이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증언이 있고, 이들 자신이 바로 그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고 복구하려는 노력을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복음서 자체가 이미 예수의 역사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재구성하고 복구시킨 예수의 상 또한 부분적이며 파편적이다. 그것이 총체적 예수의 상을 우리에게 전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누가복음은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의 증언 외에도 다수의 증언들에 대한 작업이 진행되었던 것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모든 증언들을 모을 수 있다고 해도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불충분할 것이다. 우리가 성서를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역사적 실체를 전부 알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존재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하늘의 능력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근거이다. 그리고 그 근거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에서 목격된 것들이다. 그 현장의 목격담이 오늘날 우리 언어세계와 다르기 때문에 현장에 대한 접근에 한계나 제약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계와 제약이 있다는 것이 곧 역사적 실체로서의 예수가 부인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예수의 능력이 이 땅에서 하늘의 능력을 드러낸 현장과는 상관없이 누군가 예수라는 인물을 상정하고 그를 통해서  인생과 하늘에 대한 의미를 전달한  문서를 읽고 있는 셈이 된다. 그리고 그 의미가 너무 좋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와는 상관없이 그것을 믿게 되었다는 식이 되고 만다. 그러나 우리의 예수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의 예수 신앙은 2천년 전 갈리리 척박한 땅에서 예수의 존재가 발휘한 위력, 그 영적 영향력의 역사적 현실성에 감화감동 받은 사건의 실체, 거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부인된다면 우리의 신앙은 허구 위에 구성된 의미 체계일 뿐이다. 허구 위에 구성된 의미 체계가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성서의 현실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자 함이다.

우리는 흥부전이나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현존했던 존재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부활에 대한 제자 공동체의 놀라움과 증언의 현장에 토대를 둔 의미 체계와 우리를 관련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능력으로는 현재 모든 것의 완전한 복구가 어려운 시대의 역사적 존재이기는 하나, 역사적 현장의 생생한 생명력이 우리에게 강하게 전달되어 오는 힘 때문에 우리는 예수의 삶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은총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노아의 실체 부인하는 것도 문제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도 아브라함의 역사적 실체가 일언지하에 부인되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은 그가 실제 존재했던 인물이거나, 아브라함으로  대표되는 종족의
체험이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에 집약되어 압축되었든지 또는 전설적·신화적 구성의 소산일 수 있는, 여러 가지 설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의 존재 그리고 그러한
존재의 인생 체험과 신앙고백이 역사적으로 있지 않고는 성서의 아브라함 이야기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이야기가 모두에게 공감을 사고, 오랜 세월을 통해 되풀이되어 구전(口傳)으로 전해져 왔던 것은 그런 인물의 역사적 존재가 전제되어 있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다. 그 인물의 체험이 응축되어 몇 가지 사건이 크게 부각되든지 아니면, 그 체험이 후대의 체험과 하나로 녹아 성서의 기록으로 남겨지게 되었든지 간에 '아브라함적 실존'은 그런 현실에 처한 존재의 역사적 상황과 분리되지 않는다.

노아의 이야기도 다를 바 없다. 노아적 현실에 대한 인류의 역사적 경험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이 제한적 형태로나마 성서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며 반영의 표현 방식이 노아적 현실을 모두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다고 해서 노아적 현실의 역사성이 부인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필요한 것만 선택적으로 진술될 수 있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전달 주체가 서로 다른 구전 내용을 후대에 남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자주의는 문제가 있다는 오강남 박사의 지적은 옳다. 가령,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동물들의 수가 한 대목에서는 한 쌍씩, 어느 대목에서는 일곱 쌍씩 하는 식의 엇갈림이 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경우, 노아 이야기는 진술의 신빙성에 문제가 발생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아의 이야기를 전한 사람의 관점도 반영되는 현실이다. 한 쌍이라는 수를 선택한 사람은 세상 천지의 동물에는 암수가 있다는 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표현 방식이고, 정결한 동물 일곱 쌍이라는 수를 선택한 사람은 정결의 완결성을 강조하는 것에서 나온 표현 방식이다. 그러니 문자적으로 곧이곧대로 읽으면 의미 파악에 장애가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대홍수로 대표되는 인류의 역사적 체험이 존재했고, 그 엄청난 재앙으로부터 살아난 생존의 경험 또한 존재함으로써 노아에 대한 진술이 형성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노아의 존재를 너무 쉽게 전설적·신화적 존재로 만드는 것은 노아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인류의 역사적 경험 자체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 즉 성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결국 첫 번째 문제와 직결된다. 역사적 실존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성서의 진술은 우리의 삶이 갖고 있는 역사적 현실성과 연결될 수 없다.

그런데 오강남 박사의 포인트는 매우 중요하다. 예수께서 '그러나 나는'이라며 자신의 독특하고 주관적인 관점의 특성을 강조하는 대목을 그는 주목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 우리가 처
한 구체적 삶에 적용될 수 있도록 더욱 발전적이고 깊은 해석을 덧붙이신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성서의 예수를 만나게 될 때, 그리고 그 성서를 우리의 삶과 연
결하여 읽어내려 갈 때 특별하게 주시해야 할 바가 있다.

고도로 치밀한 성서독법 필요할 때

그것은 해석의 과정에서 성서의 문맥과 글자 하나 하나에 깊이 주목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도의 치밀한 성서 독법을 요구한다. 즉 성서의 내면을 치밀하게 읽어내는 훈련을 하지 않
고서는 자칫 자기 현실의 관점에서만 성서를 읽어 자기가 원하는 바만 읽어내는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이다. 성서 자체가 우선 말하고자 하는 바를 먼저 듣는 훈련이 되어 있지 못하면 '그러나 나는'의 특별하고도 영감이 충만한 발상이 불가능하다. '남들은 이렇게 읽고 있으나 나는'이라는 구별의 경계선이 그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가령 성서의 문맥 속에서 '마침내'라는 구절이 있다면, 그 '마침내'의 시점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과 체험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가 있어야 하며 그 시점 직전의 고비와 그 고비를 넘는 순간 터져 나오는 감격과 인생의
전환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성서의 내면에 대한 이해가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른 종교의 경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이 무익할 리 없겠지만, 기독교인들은 먼저 성서의 샘 깊은 바닥까지 내려가 영감의  원천에 온 몸을 적시는 기쁨의 훈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훈련이 비로소 우리를 성서의 예수와 보다 친밀하고 생생하게 만나게 해줄 것이다.

이것이 무지한 문자주의를 넘어서서, 또한 계몽주의적 역사주의도 넘어서서, 실존의 예수와 대면하고 함께 지낼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김민웅 / 뉴저지 길벗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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