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대망상도 이 정도면 메가톤 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전병욱 목사는 뉴욕과 워싱턴 D.C.에서 일어난 테러사건의 주범으로 오사마 빈 라덴임을 정확히 맞추었다고 자찬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혜안은 이미 1999년 자신이 쓴 글에서 입증된 바 있다면서 자신이 쓴 기사를 삼일교회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전병욱 목사는 "<부흥.com> 323-330pp. 에 보면 그 기사가 나온다. 참고로 그 글을 올린다. 100%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는 오사마 빈 라덴이 범인이라고 생각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그런데 경악스러운 것은 그의 글이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 사건 연루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그의 탁월성, 열정, 헌신 등을 칭찬한 글이라는 점이다. 물론 우리는 오사마 빈 라덴이 이번 테러 사건의 범인인지 아닌지 아직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오사마 빈 라덴에게서 배울 바가 많다면서 잔뜩 늘어놓은 글을 자신이 오사마 빈 라덴의 위험성을 경고한 글이라면서 내놓는 그 강심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식으로 자신의 말조차도 호도할 수 있는 것일까?

전병욱 목사는 자신의 글 앞에 이런 설명을 붙여 놓았다. “아직까지 수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오사마 빈 라덴이라고 확신한다. 왜? 그는 이미 1993년에 미국 국제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 폭파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99년 2월에 쓴 글 중에 이미 오사마 빈 라덴의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한 적이 있다. ...참고로 그 글을 올린다.”

그런데 정말 가관인 것은 그가 올린 글에는 경고의 발언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으며, 오사마 빈 라덴으로부터 배워야 할 바가 있다는 것이 초점이 되어 있다. 누가 읽어도 그 내용과 의미가 자명한데 어떻게 그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말조차도 호도할 수 있는 것일까?

그는 우선 오사마 빈 라덴이 우리에게 생소한 인물이라면서 그를 98년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 중의 하나로 소개하면서, 그가 대단한 재력가이자 러시아와 미국 모두와 투쟁한 무슬림 권의 영웅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거의 정치적 기반이 없던 라덴이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은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눅 16:8)고 말씀하고 있다. 라덴의 영향력의 비밀을 밝혀보고, 또 필요한 점이 있다면 배우도록 하자”고 역설하고 있다. 그 자신의 입에서 분명하게 언급된 것은, 라덴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점을 주목하고 그렇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를 규명하겠다는 것이다.  

전병욱 목사는 오스마 빈 라덴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그러면 전병욱 목사는 오스마 빈 라덴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과연 그가 주장했던 대로 위험한 존재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일까?

첫째, 그는 라덴의 탁월한 이론가적 기질을 주목한다. 그는 세상을 마지막에 뒤집는 원동력은 결국 이론과 신학이라면서, 라덴은 이슬람 투쟁 신학을 정리, 완성함으로써 무슬림들이 그를 열광적으로 추종하게 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이야기로 옮아가고 있다. 그는 한국교회가 문학 지향적 성격 때문에 여성들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면서 삼일교회는 그와는 달리 여성들보다 남성들이 많다고 언급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왜? 설교에 있어서 될 수 있으면, 남성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접근을 하기 때문이다. 주로 나는 인문사회 계통의 책들에서 이슈를 찾아낸다. 그리고 지금의 타임 분석과 같이 시사잡지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어떤 성도가 이런 말은 하는 것을 들었다. 삼일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면 <가정주부들은 좌절감을 느끼고, 직장인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직장을 향해 뛰어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과 확신을 가지고 나가니까, 실제로 남성들이 더 많이 나오는 교회가 된 것이다.”

전병욱 목사 자신은 라덴과 다를 바 없이 이론이 있어서 여성 취향적 교회가 아니라 남성의 영적 주도권이 중심되는 교회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전병욱 목사가 라덴에게서 배우기를 일깨우는 것은 이렇게 이론적 탁월성이다. 라덴이 그토록 빨리 무슬림의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이다. 그리고 그 자신은 그런 원리를 자신의 교회에 적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역시 자찬이다. 그도 아마 기독교인들의 영웅이 되고 싶은 것인가 보다. 그리고 그러한 인문사회과학적 이슈를 중심으로 설교를 한 결과 여성들은 주눅이 든다는 것이니 무슨 이론과 신학이 이렇게 성차별적인가?  

둘째, 전병욱 목사는 라덴이 열정적 행동가임을 주시한다. 예수의 제자들도 이와 마찬가지라면서 “즉각적인 순종”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에게 있어서 즉각적 순종은 열정적 행동과 동의어이다. 한국교회의 병폐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즉각적 순종을 강조하면서, 무엇에 순종할 것인가를 묻지 않는 것에 있음을 그는 지나치고 있다. 결국 이러면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종교지도자의 종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셋째, 그는 라덴이 헌신을 아는 재력가라고 강조한다. 그에게 라덴이 중요한 것은 이렇게 재력으로 헌신하는 자세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어떤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최영 장군은 결코 이성계를 이길 수 없었다. 왜? 황금보기를 돌같이 했으니 어떻게 이성계를 이기겠는가? 황금은 황금이고, 돌은 돌이다. 정확한 현실 인식만이 승리의 관건이다.> 나는 이 말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타이틀로 대체적으로 아무 대책도, 준비도 하지 않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이것은 제대로 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전쟁을 하려면 정확하게 계산하고, 회계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지도자의 역량 중의 하나를 이렇게 정의한다. 지도자는 한정된 자원을 동원할 수 있어야 하고, 그 한정된 자원을 집중시킬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지도자 스스로의 살신성인의 자세도 중요하다. 그러나 지도자는 무슨 방법을 동원하든지, 성도들의 헌신을 끌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 헌신을 정확한 목표를 향해 집중시킬 줄 알아야 한다....”  

우선 어디서 예수님이 “전쟁을 하려면 정확하게 계산하고, 회계해야 한다”고 하셨을까? 그가 읽는 성경은 우리가 읽는 성경과 판본이 다른가 보다. 또한, “지도자는 무슨 방법을 동원하든지, 성도들의 헌신을 끌어내야 한다”? “무슨 방법이든지”라니? 바로 이렇게 해서 한국교회는 멍들어가기 시작했고 병들게 된 것이다. 온갖 구호와 신학적 협박과 신앙적 세뇌로 한국교회는 헌신을 내세워 교인들의 주머니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그 헌신으로 교회를 살찌워나갔던 것이다.  

어디에 그가 말한대로 오사마 빈 라덴의 위험성이 경고되어 있는가?

그의 글은 이렇게 맺고 있다. “한 무슬림의 무서운 헌신을 보라. 우리는 그를 바라보면서, 분노심 이전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가? 이 시간에 적어도 오사마 빈 라덴 보다는 더한 열정과 헌신으로 주를 향해 충성할 것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 어디에 그가 말한대로 오사마 빈 라덴의 위험성이 경고되어 있는가? 그는 오사마 빈 라덴의 영향력에 압도되어 그의 이론, 열정, 그리고 재력을 통한 헌신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그의 주장대로 이번 테러 사건의 주범이 오사마 빈 라덴이라면, 그 테러는 바로 이 이론과 열정, 재력을 통한 헌신이 될 터인데 이것을 그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라덴을 끌어들여 실컷 칭찬해놓고 나서, 나중에 사건이 터지니까 라덴은 위험한 놈이라고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라고 주장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인가?

그가 라덴에게서 이론과 열정, 헌신을 배웠다면 그것을 탓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가 이 글을 통해 라덴의 위험성을 경고했다는 식의 자찬은 거짓이지 않는가? 결국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말도 엉뚱하게 왜곡한다는 비판과 혐의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오사마 빈 라덴과 관련하여 언급할 것이 있다. 그는 다만 자신의 이론과 열정, 그리고 헌신을 통해 무슬림 세계의 영웅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언론에서 알려진 바대로 미국 CIA의 작품이다.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간의 전쟁 과정에서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을 중심으로 한 반군세력을 지원했고, 이로써 러시아는 손들고 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의 재력과 중동지역의 영향력을 주목하고 그를 포섭하여 러시아의 영향력을 분쇄하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입김을 강화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에게 그대로 굴종하지 않았다. 이슬람세계의 독자성을 내세워 미국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여기서 미국은 그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의 제거에 노력하게 된다. 러시아가 물러난 자리에 미국이 들어서려 했으나 그 계획이 실패하고 만 것이다. 그의 존재가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지의 남서 아시아 및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확산에 걸림돌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의 목숨을 노리는 미국의 움직임이 빨라지자, 오사마 빈 라덴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테러라는 방식으로 미국과 일전을 불사했고, 결국 미국은 자신이 키운 호랑이에게 당하는 일을 겪자 격노하게 된 것이다.  

이후 미국은 CIA 요원으로 러시아와 대항시켜 그 정치적 영향력을 급증시켰던 그를 테러분자로 분류하여 추적의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이번 사건의 배후로 미국이 그를 일차적 혐의자로 지목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구원(舊怨)이 있었던 것이며, 증거가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단 미국과 맞서는 세력을 분쇄함으로써 미국의 힘에 대한 본때를 보이겠다는 것이다.  

아무튼, 오스마 빈 라덴에게서 배울 교훈을 열심히 찾자고 부르짖었던 전병욱 목사가 이제 와서는 그가 바로 범인이라면서 남들은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데 자기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거의 코미디 수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식의 발언과 발상을 하는 이가 이론과 열정, 헌신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은 오호! 이 얼마나 실로 심각한 일인가. 자기가 뱉은 말도 뒤집어 곡해하면서 여기에 이론, 열정, 헌신을 결합시키려 한다면 그로 인한 신도들의 영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게 된다.  

이게 다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든지” 신도들의 ‘재력헌신’을 끌어내겠다는 발상에서 나온 웃지 못할 소산이다. 그가 일반신도라면 그냥 웃고 넘어가겠지만, 적어도 신앙의 지도적 위치에 있어야 할 목사라는 점에서 우리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부디, 오늘날과 같은 위기와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그가 더 이상 자찬의 언어 속에서 헤매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조차 기만이 된다. 지금은 실로 바른 예언의 목소리와 용기 있는 말씀의 선포, 정직한 자기 고백이 담긴 신학이 절실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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