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미국인들 (time photo essay)

지난 주일은 전 세계의 교회에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는 전 인류를 모아놓고, 매우 중요한 이야기 하나를 우리들 모두가 알아듣도록 하시려는 날이었다. 이처럼 같은 주제를 놓고 온 교회가 말씀을 선포하는 날이 인류의 역사에서 언제 있었을까 싶을 정도이다.  

우리는 지난 한 주 내내, 뉴욕과 워싱턴 D.C.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을 놓고 이야기하고, 고민하며 기도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건이 충격적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도 무수하여 마음이 참담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절망적이고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테러의 방식으로 다수의 생명을 이토록 겨냥하는 것은 명백한 죄이며 악의 사주에 휘말린 행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실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다. 어떻게도 그 정당성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 결과로 우리는 폭력의 악순환을 예감하지 않을 수 없는 <전쟁의 광풍>이 몰려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을 기다리고 있던 자들에게 테러는 명분을 주었고, 그래서 미국과 전 지구촌은 이 무모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의 결과를 감당해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다시금 이 시대에 평화의 능력이 인류에게 남아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지 않을 수 없다. 평화 없이 인간은 그 어디에서도 불안과 초조에 시달릴 것이며, 생명의 안전을 누구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가슴에 절규하듯 담긴 메시지

 

 

▲학생들의 추도행렬(time photo essay)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번 사건의 내면에 담긴, 그리고 자살테러를 주도한 세력의 가슴에 절규하듯 담긴 메시지도 함께 읽어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테러를 두둔하는 일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애꿎은 생명이 하나라도 더 희생당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테러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인류의 목에 또다시 경고의 칼을 언제 어디서 기습적으로 들이댈지 모른다. 이것으로 상대방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면, 보다 강도 높은 방식으로 폭력의 야만성을 재차 드러내려 하고 말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메시지는 다른 것이 아니다. 강자가 약자를 더 이상 억압하지 말며, 돈과 무기로 짓밟지 말라는 것이다. 강자의 테러는 지배를 목적으로 하지만, 약자의 테러는 강자와 정식으로 맞설 수 없는 형편에서 터져 나오는 마지막 저항의 한 형태이다. 약자의 저항폭력이 정당한 경우는 오직 그의 생명이 강자의 무력 앞에서 위협 당할 때의 정당방위에 한한다. 그런데 이번 테러는 그 정당방위의 한도를 넘었다. 정당방위라고 백 번 양보한다해도 그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이 떼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테러가 무고한 다수의 생명을 노리는 폭력으로 나타나는 한, 강자의 테러나 약자의 테러, 둘 다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약자의 폭력은 강자의 지배와 억압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보다 근원적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는 명백해진다. 복수를 해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는 이 미국 안에서, 이 “보다 근원적인 책임에 대한 인식”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현실에서 사실 용기 있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혹은 아직 망자들의 한과 유가족들의 슬픔, 그리고 분노가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너무 때 이른 발언이 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의 감정이 아니라 멀리 내다보려는 이들의 육성이라는 점에서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사건이 터진 애초에 다소 흥분했던 <뉴욕 타임즈>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사설과 함께, 미국을 겨냥한 반미감정의 뿌리를 보지 못하면 테러의 근절은 무망하다는 논조를 펴고 있다. 미국이 오늘날 이토록 누군가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감으면 문제를 제대로 풀 수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누가 그랬는가?”를 묻고 있을 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를 질문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를 위시하여 , <네이션> 등도 전쟁의 광기로 미국이 휩쓸려 들어가서는 아니된다는 이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워싱턴 포스트>의 칼럼니스트 헨리 알렌 역시 오늘날 세계적 제국이 된 미국은 이번 사건 속에 들어 있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읽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나섰다. 필자 역시 그의 글을 보기 전, <한겨레 신문> 칼럼에 이와 동일한 글을 기고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미국내의 지식인들이 있다는 것에 한편 안도의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지난 주 금요일 저녁 중고등부 성경공부 시간에, 아이들과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겪는 고민을 들었다. 백인 아이들이 모두 전쟁을 해야 한다, 보복해야 한다고 다수 의견을 지배하고 있는 판국에, 우리 아이들은 또다시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전쟁은 답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상황이 딜레마였던 것이다. 자신의 속마음을 진실로 말하는 것에 대해 심리적인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의 질문을 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미국인들은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 이 이야기를 듣고 우리 아이들이 어린아이들이 아니로구나 하고 놀랐지만 -, 팔레스타인에서나 다른 제3세계에서는 매일 겪고 있는 폭력과 참상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면서, 그리고 그 일에 미국이 도리어 지원까지 하면서 이러는 것은 위선이 아니냐는 것이다.  

얼굴을 감추고 미소짓는 하수인들

틴 에이저인 자기들이 문제를 처리해도 이보다는 잘 처리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십대의 아이들이 이해하는 것 이상의 복잡함과 현실적 요구가 얼키설키 엇갈려 있는 상황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없다. 그러나, 폭력에 의존하는 방식이 인류의 평화를 보장해주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테러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자들을 응징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명분이 되어, 지금 똑 부러지게 방법이 없고 어떻게든 이 분노를 풀어주어야 한다는 식의 논리에 사로잡혀 누군가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하나라도 더 희생시키게 될 전쟁의 길로 인류를 끌고 들어가려는 것은 가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듯이, 이 전쟁을 요구하는 목소리의 뒤에서 얼굴을 감추고 미소짓는 전쟁의 신의 하수인들, 군수산업이 있다는 현실을 우리는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의 비극을 자기 회생의 기회로 삼으려는 자들은 구덩이를 파다가 자신이 그 구덩이에 빠질 수 있으며, 담을 허물다가 그 담에 있던 뱀에게 물린다는 전도서의 말씀이 담고 있는 경고를 알아야 할 것이다.  

무기를 든 자가 테러를 통해서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려 한다면, 그는 죽음을 맞이해도 할 말이 없다. 그를 겨누는 총구는 다수의 생명을 위해 불가피한 조처가 된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게 할 전쟁을 꾸미는 자 역시 그 명분이 아무리 그럴싸해도 인간의 생명을 박탈하는 죄를 짓는 것이다. 아무런 저항의 수단이 없는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전쟁의 희생물이 되게 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다. 그것도 아직 아무런 증거도 없이 혐의가 있다는 식으로 국가 전체를 절멸시키겠다고 하는 것은 더더군다나 무서운 죄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이미 오랜 내전과 전쟁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나라이다. 이런 나라에 가공할 폭격을 가한다면, 아마도 그 나라는 앞으로 백년 안에 다시 국가의 모습으로 재기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미국을 향해 증오의 마음을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가게 될 것이라는 점 또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여, 예수께서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전쟁의 법칙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은 언제나 위험에 처할 운명이 된다는 것을 일깨우셨던 것이다.  

‘샬롬’의 용기, 잠잠해진 광풍

마태복음 5장 9절의“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으며,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 불릴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평화를 모욕하고 짓밟는 자는 복을 받지 못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평화를 외치는 일에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러나 이 말씀이 나온 당대의 현장은 전쟁과 복수가 일상사가 되다시피 한 시대였다. 그런 때에는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으면 싸움의 양편 모두에게 적대의 대상이 되고 만다. 평화는 전쟁과 복수의 필요를 주장하는 사람이나 세력에게 명분은 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무기를 내려놓고 싸움을 그치라는 요구가 될 때에는 거추장스러운 것이자, 적을 유리하게 만드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진다.

조금만 더 밀어 부치면 되는 판국에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면, 그 평화는 전쟁을 하려는 이들에게 방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평화는 언제나 용기를 필요로 한다. 평화는 전쟁을 할 용기보다 더 큰 용기가 있어야 할 수 있다. 그 용기는 그저 마음에 힘을 내고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굳게 믿는 영혼에서 나오는 능력이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전쟁의 위협에 굴복하는 겁쟁이들이 되고 말 것이다.

더 더군다나 성서의 평화는 <샬롬>이다. 그것은 그저 분쟁이 없고 대립이 사라진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의로운 인간사회의 소산이다. 분쟁과 대립이 무력으로 해결되는 상태가 아니라, 의로운 인간사회를 만들어 나가면서 폭력의 악순환이 일어나는 근본을 해결하는 자세이다. 억울한 일을 겪지 않게 해주고, 부당한 억압을 당하지 않게 해주며 생명이 위협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는 노력 속에 담긴 하나님 의 은총이 바로 샬롬이다.  

그러나 이것을 누구나 반기는 것은 아니다. 나사렛 예수는 이 샬롬의 왕으로 오셨으나, 그의 평화를 거부한 자들이 있었다. 평화를 외치면서도 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을 외면하는 자들은 모두 이 나사렛 예수의 사랑과 평화를 거부하는 자들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샬롬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의로운 평화가 사망선고를 받지 않는다. 부활의 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그 샬롬의 생명은 세상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시고, 평화의 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실 것이다.  

한 시대가 광기의 폭풍에 휩싸이면

그러나 한번 한 시대가 광기의 폭풍에 휩싸이면, 그때부터는 대화나 논리나 합리적 토론의 힘은 사라져가게 된다. 이른바 “집단 히스테리”라고 해서 누군가를 겨냥한 집단적 증오가 기세를 얻으면, 누군가 이에 대하여 이의를 다는 순간 그는 이 집단적 증오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단적 히스테리 속에서 폭력은 정당화되고 만다. 2차 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은 이 집단적 증오의 히스테리로 인한 희생자들이 되었다. 냉전의 시기가 한참 절정을 이루었던 때에, 한번 빨갱이로 찍히면 미국 사회에서도 직장을 잃고 사회적으로 매장되며 테러를 당하고 죽기까지도 했다. 이른바 마녀사냥 식의 광풍이 부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던킨 도너츠에서 일하는 많은 중동사람들이 겁을 내고 있다. 수단, 리비아 출신들이 주눅이 들어 있다.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뉴욕 맨해튼 옐로우 캡 운전사들이 손을 놓고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들과 생김새가 비슷한 인도인들도 직장이나 일터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중동 출신의 아이들이 폭행을 당한 사건도 일어났다. 레스토랑에서 아랍계 사람이 주인과 웨이터에게 쫓겨나는 장면을 T.V.에서 보았다. 흑인과 백인이 서로 격론을 벌이면서 흑인은 미국의 죄를 묻고, 백인은 보복 전쟁을 옹호하는 장면도 보았다. 전쟁의 에너지가 축적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워싱턴 D.C.에서 행해진 다종교 예배에서 평화라는 단어는 단 한번 나왔다. 종교 지도자들도 분노의 물결에 휩싸인 미국 사회에서 샬롬의 용기를 쉽게 갖지 못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샬롬의 왕을 광풍이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바다를 건너다가 광풍을 만난 예수 일행의 현실에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능력이 무엇인가를 일깨움 받게 된다. 무서운 폭풍이 몰아치자 제자들은 질겁을 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두려움에 떨면서 파선의 위기에 직면한 자신들의 운명에 어쩔 줄 몰라한다. 그런 와중에서도 예수께서는 가장 동요가 심한 고물에서 아무런 일이 없는 듯 편안히 자고 계셨다. 이런 예수를 보고 제자들은 항변하며 깨운다. “우리가 다 죽게 생겼는데 어찌 이리 계실 수 있습니까?”라고. 그러자 예수께서는 깨어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고요하고 잠잠해져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졌다.

누구도 바람을 향해 맞서려는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그 바람을 향해 샬롬의 능력을 펼치셨다. 바람에 압도당하는 것이 아니라, 고요하고 잠잠해지라는 말씀에 광풍이 숨을 죽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왜들 두려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이들 제자들이 두려움에 빠졌던 것은 자기들이 탄 배가 바람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광풍의 능력을 더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바람이 그들을 해할 수 없음을 일깨우셨다. 예수와 함께 타고 가는 배는 바람이 닥치지 않는다, 가 아니라, 바람이 닥쳐도 그 배를 뒤집을 수 없는 것이다.

샬롬의 왕을 광풍이 이길 수 없다. 그 권세를 받은 우리가 거친 풍파에 굴복하게 되는 것은 그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을 때부터 비롯된다. 그 순간, 우리의 영혼은 그 바람의 힘에 뒤흔들리게 된다. 그래서 혼비백산해지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미치고 있는 바다를 잠잠하게 하는 샬롬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그러면, 광풍은 우리의 영혼 속에서 힘을 잃게 된다. 광기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것은 이미 그의 마음과 영혼이 패배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더욱 분명하게 확정되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에 출렁이는 풍파가 세상의 풍파를 만들어 낸다. 그렇지 않은가? 테러분자의 영혼에 끓어오르는 풍파가 오늘 이 비극을 만들어냈다.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이들의 영혼에 끓어오르는 분노의 바람이 내일의 새로운 비극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부디, 샬롬의 용기를 가지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이다. 죽은 이들의 명단에 새로운 이름이 추가되지 않도록 평화의 목소리를 키워야 할 때이다. 그리고 광풍이 불어닥칠 때, 거세어진 바다를 잠잠하고 고요하게 할 능력 있는 행동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약하고 힘이 없지만, 오직 믿는 것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 그분의 은총과 그분의 사랑으로 이 힘겹고 어려우며 혼란스러운 시대를 바로 이겨나갈 수 있도록 간구하자. 참사를 당해 비탄에 빠진 이들의 마음이 이로써 진정으로 위로 받고, 무고한 생명의 죽음이 더해져서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는 이들이 지구촌 어디에도 더 이상 없도록 기원하자.

우리들 모두의 마음에 솟구치는 샬롬의 용기로, 이 위기의 시대를 참되게 이겨나가는 능력이 있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이제 우리는 그 어느 누구도 지구촌에서 벌어지는 일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통절하게 깨닫는다. 그런 일에 무지해도 좋다고 여겨온 우리들의 죄를 고백하자. 그 무지의 와중에 누구도 그 사연을 들어주는 이 없어 절망과 죽음의 계곡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잊지 말자. 또한 그들의 절망이 언제든 폭력으로 변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이 무서운 사실을 우리는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이 지상에 의로운 평화, 샬롬이 이루어지는 일에 우리가 쓰임 받기를 기도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그 복, 충만히 받아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기쁨 누리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김민웅 / 뉴저지 길벗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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