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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실 그이
  • 김재성 (kimjaeseong@hanmail.net)
  • 승인 2000.08.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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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감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어 그들을 시켜서 물어 본 말이다(마 11:3). ‘오실 그이’는 구약성서 이사야서, 말라기서 등에서, 오시기로 예언되어 있는 분이다(사 35:3-6; 말 3:1). 그분은 종말의 때에 오셔서 세상의 권력자들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할 심판주이다. 세례자 요한도 그분에 대하여, 큰 능력을 가지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며,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는 심판주의 모습으로 묘사하였다(마 3:11-12).

그는 이런 종말의식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세례를 베푸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운동은 성공적이었고, 원근 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를 위험시하고 있던 분봉왕 헤롯은 요한이 자신의 불륜을 비판하는 말을 한 것을 트집잡아서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앞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의 소문을 듣게 되었다.

나사렛 출신 청년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며, 귀신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을 그를 엘리야라고 하기도 하고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막 8:28 참조). 요한은 예수가 바로 그가 기다려 온 오실 그이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보내어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해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일으킴을 받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마 11:4-5). 이것은 요한의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한 것인가, 아니라고 한 것인가,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 어떤 대답을 한 것인가?

얼핏 보기에 이것은 그렇다고 답한 것 같다. 예수의 대답은 오실 그이에 대한 예언으로 볼 수 있는 이사야서의 내용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35:5-6).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사야서에 없는 내용이 있으며 또 있는 내용이 빠지기도 했다. 나병환자가 깨끗해지는 것이나 죽은 사람이 일으킴을 받는 것은 이사야서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또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이사야서의 다른 곳(61:1)에 나오는 것이 여기에 결합된 것이며, 그것도 나열한 것들의 맨 끝에 와서 가장 강조가 되고 있다. 그리고 앞에서 인용한 이사야서 35장의 바로 앞장인 34장은 한 장 전체가 심판주가 와서 모든 민족들과 군대를 심판하고 진멸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이 민족에 대한 심판 다음에 이스라엘에 대한 위로가 나오는 식으로, 35장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그런데 예수의 대답에는 이런 심판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다. 적어도 예수는 자신을 지금 당장 저 로마 황제와 헤롯왕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하늘 군대를 불러와서 로마 군대를 격퇴시키는 심판주로 나타내지는 않았다.

세례자 요한은 오실 그이에 대해 묘사하면서, 자신은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고 하면서 그의 큰 능력을 강조하였지만(마 3:11), 예수는 자신의 일을 그런 큰 능력을 가진 분의 우주적 심판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대신에, 지금 여기에서 병이나 장애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고쳐 주고, 가난 때문에 온갖 서러움을 겪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자신의 일이라고 하였다. 그런 것은 우주적 심판에 비하면 어쩌면 지극히 미미한 일일 수도 있다.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는 자신은 오실 그이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는 것인가? 질문이 대답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질문 자체가 명료하지 않아서, ‘예’나 ‘아니오’로 대답할 수 없는 것일 때, 좋은 대답은 ‘예’나 ‘아니오’가 아니라 그 질문의 모호함이나 맹점을 깨우쳐 주면서 동시에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어떤 것일 것이다. 위의 요한과 예수의 질문과 대답도 이런 경우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오실 그이, 또는 그의 일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요한과 예수의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았겠지만 강조점의 차이가 있었을 수는 있다. 요한은 오실 그이의 심판에 강조점을 두었지만, 예수는 병자들과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얻게 될 구원의 기쁨에 강조점을 두었다. 요한은 지금 당장 하늘의 군대를 불러와서 로마 황제와 헤롯왕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악한 자들을 심판하는 것을 오실 그이의 일로 생각했지만, 예수의 일은 그것과 달랐다. 예수는 지금 당장 그런 우주적 심판을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작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은혜와 구원의 기쁨이 조용히 번져가게 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우주적 심판보다 훨씬 더 강력한 변화의 원동력이며, 그것만이 진정으로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심판주요 오실 그이이다.

요한은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 예수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수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고 한다. 여기에서 ‘듣고 보는’은 현재형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보고, 걷고, 깨끗해지고, 듣고, 일으킴을 받고, 복음을 듣는다’에서 사용된 동사들도 모두 현재형이다. 요한은 과거 일을 회상하고 있지만, 예수는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중시한다. 요한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소문을 듣고 무슨 판단을 내리려고 하지만 예수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서 듣고 보는 것, 곧 몸으로 체험하는 것을 중시한다. 백 사람이 뭐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네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었을 때,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때 예수는 그들에게 물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막 8:27-29). 여기에서 베드로의 대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물음이 중요한 것이다. 남들에게 소문으로 들은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를 직접 만나 생의 변화를 경험하고 나서 몸으로 느껴서 아는 지식이 참된 것이라는 말이다.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치유 이야기도 이런 이야기이다. 나면서부터 눈이 멀어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여 거지로서 구걸하면서 살아온 사람이 예수를 만나서 눈을 뜨게 되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한 것을 보니 그는 죄인임에 틀림이 없다고 을러대면서 그 사람에게 동의를 구한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요 9:25). 이 사람이야말로 예수에 대한 소문이 어떠하든지 자신이 직접 듣고 보는 것을 가장 확신 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대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예수의 생애에 대해 쓴 나의 글을 주고서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라는 과제를 낸 일이 있다. 한 학생의 보고서에서 재미있는 내용을 읽게 되었다. 그는 예수의 생애를 읽고 나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감동을 받게 된 이유가 예수의 모습이 TV 연속극 〈허준〉에 나오는 허준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도 허준처럼 평범한 가정 출신이지만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처지가 되었고, 그도 허준처럼 돈이나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병든 사람, 소외된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고쳐주고 기를 살려 주는 일에 자신을 던졌다는 것이다.

내가 놀란 것은, 보통 우리는 예수에 비추어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평가하는데, 그 학생은 정반대로 허준에 비추어서 예수를 이해하고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크리스챤이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허준〉이라는 TV 연속극이 큰 인기를 끌면서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허준이라는 인물이 그렇게 큰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학생이 내 글을 읽고서 예수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게 된 것은 다행스러웠지만, 예수에 비추어서 허준을 이해하지 않고, 그 반대가 되게 만드는 현실이 씁쓸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그 연속극이 그토록 큰 인기를 끌고 허준 신드롬까지 만들어 낸 것은, 한국사회가 점점 후기산업사회 쪽으로 진입해 가면서 사람들이 개인주의화되고 이기주의적이 되어가면서, 사람들은 갈증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TV 연속극에서나마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돈이나 명예보다 사명감에 사는 사람, 자기의 이익보다 민중을 살리는 의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 가난하게 서자 신분으로 났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양반들을 보기 좋게 제쳐 버린 사람, 아내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면서도 불륜이 아닌 아름다움으로 간직할 줄 아는 사람으로 그려진 극중의 허준은 한국판 오실 그이인 셈이다.

사람들이 극중의 허준에게 매료되고, 그에 비추어 예수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의미가 크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오실 그이에 대한 상을 뚜렷하게 제시하지 못하면,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서 오실 그이의 임재를 듣고 보고 느낄 수 없으면, 그들은 교회를 떠나서 다른 데서 오실 그이를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의 많은 예술 작품 속에는 오실 그이에 대한 현대인의 갈망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1962년에 소설로 발표되고 70년대 말에 영화로도 만들어진 켄 키지(Ken Kesey)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사나이』(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는, 정신병원으로 은유되는 병든 미국사회 또는 기계화된 현대산업사회 속에서 구세주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주인공 맥머피는 정상인인데 어떻게 잘못되어서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그곳에 있는 환자들이 조금도 치료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현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간호사들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살면서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고 강제로 약을 먹어야 한다. 어떠한 질문이나 저항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들은 늘 눈치만 보고 두려워하며 억압과 강박 관념 속에서 서서히 거세되어 가고 이른바 〈베지터블〉(식물인간)이 되어 간다.

본래 자유분방하고 반항적인 맥머피는 그렇게 거세되어 가는 친구들을 구하려고 이런 저런 금지된 일을 벌이기 시작한다. 술집 여자들을 몰래 불러다가 파티를 열기도 하고, 어머니의 엄한 교육 때문에 늘 성에 대한 죄의식을 갖고 있는 친구에게 처음으로 여자와 성 경험을 갖게 해주기도 한다. 절대 그곳은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인디언 추장에게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힘들여 설명해 주기도 한다. 그런 일로 그는 불려가서 ‘치료’를 받게 되는데, 거기에는 전기고문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도 그가 말을 듣지 않고 나중에는 수간호사의 목을 조르기까지 하자, 그들은 마침내 그를 데려가서 뇌엽을 절제하는 수술을 해버린다. 그리하여 그 자신이 〈베지터블〉이 되어서 나온다. 벙어리 행세를 하던 그의 친구 인디언 추장은, 그 친구를 그대로 두면, 정신병원 수간호사(지배체제)에 도전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 주는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편히 죽게 하는 것을 마지막 친구의 도리로 생각하여 그의 입을 막아서 죽게 한다. 그리고 친구가 일러준 대로 하여 탈출에 성공한다. 여기에서 주인공 맥머피는 현대 사회 속에서 거세되어 가는 군상들을 일깨워 살리려고 하다가 자신은 죽임을 당하는 현대판 구세주인 셈이다. 산업사회 속에서의 오실 그이인 셈이다.

최근에 나온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사이버 문화가 지배하는 오늘날 오실 그이가 누구인지 암시하고 있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사이버 세계를 지배하는 그분(the One)이 출현하는 것을 예고하는데, 예언자도 등장하고 세례자 요한 같이 앞길을 예비하는 사람도 등장한다. 오실 그이로 지목된 청년은 정작 자기 자신은 그런 사실을 모르는데 서서히 자기 내부에서 그런 능력이 발휘되는 것을 자각해 간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에게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사물은 없다고 하면 없는 것이다” 하는 식의 유심주의(唯心主義)이다. 몸을 향해 날아오던 총알도 그가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갑자기 그 앞에서 공깃돌처럼 떨어진다. 비물질적인 사이버 세계의 특징, 그리고 서구의 물질문화에 대한 회의 같은 것이 막연하게 이런 동양적인 요소에 대한 동경을 만들어 내고, 그런 현대판 구세주, 사이버 세계의 오실 그이를 만들어 낸 셈이다.

그런 소설이나 영화나 연속극 같은 것은 우리에게, 우리 속에 있는 오실 그이에 대한 열망을 깨닫게 해주고, 느끼게 해준다. 오실 그이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고 상상할 수 있게 해주고,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그런 것은 오실 그이를 만나게 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런 것에 심취하고 열광하는 현상을 비판만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런 현상에서, 현대인에게는 종교가 필요 없게 될 것이라는 피상적인 예측과는 달리, 더욱 더 오실 그이를 갈망하게 되어 가는 이 시대의 징후를 읽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변화된 세계에서 다양한 차원에서 오실 그이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오늘의 교회가 그들로 하여금 오실 그이를 듣고 보고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자기의 본분을 다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3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오실 그이를 누구라고 하는가? 그저 유행 따라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따라서, 자기 교회 목사가 한 말만을 따라서, 이런 저런 모습으로 그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오실 그이는, 자신들의 필요와 편의에 따라서, 병 고치는 이가 되기도 했다가, 마술처럼 재산의 복을 부어 주는 이가 되기도 하고, 고급 차를 사게 해 주는 분이 되기도 하고, 출세와 성공을 보장해 주는 분이 되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는 신학의 책임도 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듣고 보고 느끼는 것을 증거하는 신학을 도외시하고, 그저 남의 흉내나 내고 서구의 신학 유행이나 따라가기에 급급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오실 그이에 대한 신학도 서구 신학에서 벌인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종말론 논쟁을 벗어나지 못하고, 오늘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우리가 오실 그이의 임재를 듣고 보고 증거하는 데까지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그러니까 사람들이, 〈허준〉 연속극을 볼 때는 피곤한 줄을 모르면서도, 교회에서는 조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TV연속극이나 허황된 〈매트릭스〉 영화를 볼 때는 두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고 꿈도 꾸기도 하지만, 교회에서는 따분해 하고 아무런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그렇게 남들이 말하는 것이나 유행을 따라서 오실 그이를 머리 속에 그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지금 여기에서 듣고 보고 체험하는 것에서 오실 그이의 임재를 몸으로 느끼고 그것을 증거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백 사람이 뭐라고 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배운 사람 높은 사람이 이게 옳다고 을러대도, 절대로 흔들릴 수 없는 ‘내가 아는 한 가지’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그런 사람들이 없다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하는 질문에 예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월간 <살림〉 2000년 8월호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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