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MBC에서 성직자의 호화 생활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된 이후로 또다시 한국의 개신교가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100분토론’에서는 성직자의 세금 문제가 이슈가 되기도 했는데, 세금에 대해서 이런저런 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그것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세금을 내고 안내는 것만이 문제라면, 세금만 내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되는 것이고, 벌써부터 <뉴스앤조이>의 기사에서도 보이듯이 일부 교회들이, 그 정직성이야 어떠하든, 우리는 세금을 낸다고 보도 자료를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세금 계산이라는 것도 일반 직장인들은 점심 식대를 빼고는 다 세금 공과의 대상인데, 목회자주거비·교육비·도서비·목회활동비 등등으로 받는 모든 돈과, 심방이나 특별 예배를 드렸다고 심지어 목사가 해외에 선교를(?) 명목으로 나들이 갈 때마다 쥐어주는 봉투 등의 사이드포켓은 과세 대상에 포함시키지도 않습니다. 이 때문에 그러한 식의 문제 제기와 인식은 필요는 하지만 본질은 아닙니다. 

저는 세금을 내냐 안내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논쟁과 담론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을 믿는 한국 기독교가 그러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느냐,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진실로 믿고 따르느냐,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기독교가 사도들의 정신을 가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목회가 가지고 있는 봉사 기능(정말로 그것이 있고 없고는 차치하고서라도) 때문에 세금을 안내도 된다든지, 세금을 내면 세속화된다는 논리에는 너무나 황당하여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금이 얼마나 부담스러운지에 대해서 같이 고민하고, 또 반대로 그 세금으로 사회 복지가 얼마나 개선되고 국방과 경찰과 소방 등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가 어떻게 유지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개신교) 목사들이 그러한 것에는 관심도 없고, 국가가 주는 혜택과 권리는 다 누리겠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나 유치원에 대한 보조나 사회 복지시설에 대한 보조, 국가의 예산이 들어가는 건강 보험과 국민 연금은 물론 군목과 군종제도 등입니다. 의무는 하지 않겠다는 욕심 많은 놀부 심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세상과 언론에 비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좌파니 우파니 색깔을 덧칠하면서 억울함을 하소연하기 전에 이 땅의 교회들이 도대체 언제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을 욕되게 하려고 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금이 아니라 성직자가 수억 원짜리는 아니더라도 몇 천만 원짜리 고급차를 몰고 사례비와는 별도로 자녀들의 유학을 위한 비용까지 교인들의 헌금으로 펑펑 쓰고, 초호화 아파트에서 관리비까지 받으면서 사는 것이 옳으냐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저의 양심의 한 가닥에서는 그러한 모습은 적어도 예수님의 길과 사도들의 길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멀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기독교 내부(옹호하는 그룹)에서도 두 가지 변명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니 당연히 누려야 하고 기독교가 가난해야 한다는 것은 사탄의 논리라고 말을 합니다. 또 하나는 그것은 일부 소수의 문제이며 대부분의 목회자는 힘들게 살고 있다고 하면서 기독교를 옹호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한국교회 미래는 절망적, 그러나

첫째, 논리는 기복의 논리, 성공 복음의 논리는 한국 사회에 암처럼 번져가 거의 말기 암 수준에 와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긍정의 힘>, <잘 되는 나>와 같은 책은 철저한 기복과 자본주의적 논리를 바탕으로 성경을 이곳, 저곳에서 꿰어 맞추고 진리를 왜곡했지만 이런 부류의 책들이 초베스트셀러가 되고 설교에서 가장 많이 인용됩니다.

다른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비평하는 것은 실례가 됩니다만, 공개가 되었기 말씀을 드립니다. 얼마 전에 조용기 목사는 십일조를 강조하면서 말한 ‘족장들의 거부론’은 예전에 “EU가 통합되면 그때 예수님이 오신다”고 한 계시록 강해와 같이 철저한 성경의 왜곡입니다. 성서는 분명히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늘 손해만 보고, 양보하고, 작은 것에 만족하였지, 그들이 거부로 산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아브라함은 롯이 에덴동산과 같은 소돔을 택할 때, 그 반대인 빈들을 택한 가난한 시골 사람이었고, 이삭은 생존의 기반이던 샘을 몇 번이나 빼앗긴 힘없는 사람이었으며, 야곱보다는 에서가 얍복강 부근으로 야곱을 마중 나올 때 400명의 부하를 데리고 나올 정도로 훨씬 잘 살았습니다. 더구나 에서의 자손은 애굽에 노예로 가지 않았고, 히브리인들이 출애굽할 때 벌써 그들은 왕국을 이루고 살지 않습니까?

둘째, 논리는 일면 그럴 듯해 보이지만 농촌 교회 목회자로서 겪은 현상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 현상적으로는 가난하게 보일지라도 추구하는 가치와 내용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농촌 교회 목회자들이 농민·빈민들과 정체성을 함께 나누는 사람도 있지만, 적지 않은 목회자들의 마음은 도시 대형 교회 목사님들의 삶을 동경하고 있는 것이 솔직한 그리고 너무나 슬픈 현실 아닐까요? 농촌 목회자들도 그럴진대 오직 성공 목회를 꿈꾸는 대부분의 일반 교회와 그러한 인간적인 청운의 꿈(?)을 안고 개척하는 교회는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능히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를 교인 수에 따라 사고파는 현상이 비일비재하게 생기고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이유로 가치 추구나 현상, 목회자 사회의 의식 구조 속에서 그러한 목회자의 모습은 한국 사회에서 소수가 아니라 다수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교회의 미래는 절망적입니다.

아미쉬들의 삶 속에서 발견하는 행복열쇠

지난 며칠간 이 문제를 생각하면 답답하고 우울하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미쉬를 번역하면서, 특히 부록에 나오는 아미쉬들의 삶을 번역하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다시 한번 무엇이 문제인지 깨달을 수 있었고, 그 깨달음 속에서 답답해하고 화를 내는 나도 똑같은 사람이구나 하고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미쉬들은 한계를 가지고 사는 법을 배웠다. 참으로, 그들은 거의 모든 것에 한계를 설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지혜의 기초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미쉬에게 있어서 한계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 필요조건이다. 한계가 없으면 개인들은 교만해지고, 자만해지고 그리고 자기 파멸적이 된다고 아미쉬 사람들은 믿는다.

확실히, 제한은 개인의 자유와 개인적인 선택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자기표현을 감소시킨다. 동시에, 그것들은 현대 생활이 제공하는 여러 가지 끊임없는 선택들보다 개인들에게 존엄성과 안정성을 준다. 아미쉬가 생각하는 방식에서는, 한계에 대한 존중이 공동체를 세우고, 소속감을 가져다주고, 정체성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인간의 만족과 행복에 이르는 세 가지 중요한 열쇠이다.”

아미쉬 사람들이 차를 소유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악마라서가 아니라, 자동차의 편리함이 공동체의 결속을 깨뜨리고 도시 소비문화를 급속하게 유입시켜 사람을 타락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동차 소유를 금지합니다. 그들이 공공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 텔레비전과 라디오와 퍼스널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일부 아미쉬 그룹 중에서는 태양전지나 할로겐 전지를 사용하여 소형 냉장고나 전등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있지만-전기의 대량 사용을 통해서 전해지는 퇴폐적이고 소비적인 문화가 유입되는 것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전화를 사용하지만 집 밖에 전화를 두는 이유는 교인들 간의 대화는 얼굴을 마주보며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고, 전화는 꼭 필요한 응급한 일에만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들을 번역하는 동안 저는 선악과의 의미가 새롭게 깨달아졌습니다. 왜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설정해 두셨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즉, 단지 인간의 순종을 떠보기 위해서 선악과를 두신 것도 아니고, 또는 선과 악의 판단이 인간에게 있지 않음을 나타내는 의미로만 해석되는 것을 넘어, 모든 것이 허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지되고 삼가는 것이 있는 것이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길이고,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행복한 길이라는 의미로 재해석되었습니다. 그리고 줄기차게 고난의 길을 가고 감옥 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조용기 목사와 김홍도 목사의 삶이 무조건 비난 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능력에 대한 강한 체험과 확신 속에서 1960~1970년대 가난과 분단과 독재의 질곡의 삶을 살고 있는 불안한 신도들에게-물론 그것이 아편적 기능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강한 믿음을 강조하고, 성령의 능력을 확신시키면서 자신감과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러한 확신이 교회를 성장시켰다는 점에 있어서 그들의 공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서 그쳤고 그러는 바람에 그들의 설교에서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거룩한 삶과 가르침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한계를 통해 맛보는 하나님 은혜

예수님의 능력은 마귀들도 인정했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병 고침을 받고 문제가 해결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핵심 사역인 십자가에 이르자, 모두가 떠나가고 심지어는 비난을 하기도 했습니다. 성공과 승리에만 예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한다면 바로 그 승리와 성공과 축복은 사탄의 가장 강력한 유혹의 도구일 수 있습니다. 이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금식을 하신 예수님을 유혹한 사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능력과 축복은 주님 앞에 나아가는 과정이지 그것이 주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불에 던지운다고 했습니다. 그 열매는 목사가 강조하는 교회 신도수가 아니라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 22절~24절에서 주장하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그리고 또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는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까지 말하고, 야고보 사도도 또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볼 때, 믿음과 행위, 믿음과 삶은 분리된 것이 아니고 하나이며, 인간을 사망으로 인도하는 가장 강력한 사탄의 무기는 기복과 성공에 대한 인간의 욕심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이름으로 그 사망의 길을 축복이라고 현혹하면서 그 길을 초고속으로 달려가는 교계 지도자들과 그것을 능력으로 알고 따라가는 신도들, 넓은 길로 고속도로로 달려가는 대다수의 한국 교인들이 보면 안타깝고 안쓰러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저도 알게 모르게 그것을 욕하면서도 그것을 은근히 부러워했고 아니면 지금도 조금은 부러워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점에서 저도 똑같은 죄인입니다.

아미쉬들에 대해 공부하게 하면서, 그들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는 한계의 설정과 제한 혹은 절제를 통해 누리는 하나님과의, 성령님과의 동행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악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인간에게 한계를 설정하고 그것을 통해 참된 행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무엇이나 할 수 있음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고 절제하는 것이 자원과 에너지가 유한한 지구에서 사는 바른 길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아무리 채우려고 발버둥을 쳐도 채워지지 않는 그 욕망을 추가하지 마십시오. 한계 속에서 자족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리고 선악과가 있기에 에덴이 낙원일 수 있음을 아미쉬를 통해서 배웁니다.

오늘날 보수주의 교회가 욕망에 있어서 선악과는 따먹고 한계는 설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진보주의 기독교는 믿음 생활에 있어서 구별되고 거룩한 삶을 사는 한계를 가볍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믿으면서 성령의 열매가 없는 신앙이 주류 교회의 신앙이라면,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면서도 성령의 능력에 대한 강한 확신이 없음이 또 다른 우리의 잘못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은 지금까지 열매도 못 맺은 것이 아닌가 하는 회한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순절이 시작하는 이번 주부터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마십시오. 성령의 능력에 대한 확신은 가지되 한계를 삶과 욕망에 설정하여 참된 예수의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는, 즉 좁은 문을 즐겁게 들어가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리고 기독교에 실망하고 지친 사람들에게, 그리고 교회를 욕하는 모든 분들에게 머리 숙여 사과의 인사를 드립시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너희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김재일/ 예장생활협동조합 대표· 현재 화성에 있는 아름다운성빛공동체에서 농사를 지으며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