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일 낮 예배를 마치고 청장년 남자들의 부인들이 남자들을 제외하고 자기들끼리만 가을 나들이를 간다고 하여 남자들은 뿔뿔이 헤어지고 집이 먼 청장년 회장인 o집사만 혼자 남아 있기에 '우린 수안보에 온천이나 가자'고 하다. 마침 목욕표가 두 장 있는지라 돈들 일도 없어 둘이 오붓하게 보기 좋은 가을색으로 물들어 가는 들판을 달리고 산을 넘어 교회 차로 약 20분 걸려 수안보 못 미쳐 있는 '문강온천'으로 가다.  

특유한 유황온천수의 냄새는 마치 겨란 썩는 냄새 같은 쿠린내가 나지만 오히려 그 냄새가 일반 지하수와 구별되는 독특한 냄새로 온천에 온 기분이 들게 한다. 따듯한 온천수에 몸을 충분히 담그고 다시 옥돌 싸우나 탕에 가서 땀을 흘리고 냉탕에 들어가 아이들처럼 헤엄을 치며 다니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니 기운이 돌고 기분이 상쾌해 지다. o집사가 때를 밀어 준다기에 나는 평소에 때를 밀지 않는 습관이 있으므로 o집사의 등을 대신 밀어 주다. 한참 등을 밀어 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보다 더 좋은 교제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o집사에게 말하길, '교회에 새 신자 남자가 들어오면 목욕탕에 데리고 와서 때 밀어 주기 하면 좋겠구먼' 하니  o집사가 기가 막힌 좋은 생각이라며 껄껄 웃으며 말한다.

'참 좋은 생각이시네요. 하지만 목사님만 고생하시지요 뭐'
'나만 고생하긴 우리 함께 와서 때 밀어 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서로 정도 들고 얼마나 좋겠어요'
'그거 좋겠네요'


정말로 새신자뿐만이 아니라 성도들끼리 서로 한 가족처럼 마음을 터놓고 목욕도 같이 하고 때도 서로 밀어 주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협력하며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의 훈훈한 정을 잊어버리고 벌어먹기에만 정신이 빠진 사람들에게 그렇게 마음과 정을 나누며 잠시나마 여유롭게 살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삶의 공간 마련을 교회가 하고 목사가 해야 되지 않을까. 먼저 믿은 성도가 해야 되지 않을까.

그렇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목욕을 마치다. 교회 얘기도 하고, 마누라 흉도 보고(흉이라야 실은 자랑이지만), 직장 얘기도 하다. 직장상사와 맘이 맞지 않아 속을 많이 썩는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안됐다. 그러나 목자와 그런 말을 하는 동안만이라도 마음의 위로를 받을 것으로 생각하니 한편 다행이다.  

언제 구두를 닦으라고 했는가. 목욕을 마치고 잘 닦아 논 구두를 신으니 더욱 기분이 좋구나. 목욕도 하고 새 구두도 신고, 초가을 차지도 덥지도 않은 바람이 따가운 햇볕 사이로 살랑 살랑 불어와 기분을 좋게 만든다. 탕에서 나오니 눈앞에 펼쳐진 가을 풍경은 시골 가까이 살며 자주 보는 모습이지만 그래도 정겹고 아름답기는 여전하다. 아직 노랗게 패이지는 않았지만 막 패이려 하는 연두빛 벼이삭의 물결과 멀리 보이는 야산과 높고 맑은 가을 하늘 등은 그림 솜씨가 있는 이면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릴만한 풍경이다. 그냥 가기 아쉬운가. o집사 매점을 향해가며

'무엇을 좀 드시지요' 한다.
'콜라를 드실까요, 사이다를 드실까요'


목욕을 마치고 컬컬한 목에 o집사가 마시고 싶은 건 분명히 다른 것이면서 목사님 때문에 콜라나 사이다를 먹어야 되는 마음. 저 분이 부인하고 자녀들하고 오붓하게 왔더라면 분명히 기분 좋게 그것을 마셨을텐데 나 때문에 좋은 기분 망치게 할 수 있는가.

그래서 대뜸 한다는 말이
'시원한 맥주나 한 잔 하시지' 하니까

o집사 입이 딱 벌어지며
'뭐라구요?  정말 그래도 되겠어요?' 하며 반색을 하다.
'그런데 맥주 마시고 차 운전을 할 수 있을까요?'
'목사님이 하시면 되잖아요?'
'이 양반아 난 구경만 하고 앉아 있으란 말이요?'

o집사 더 기분이 좋아 어찌할 바를 모르며
'이까짓 캔 맥주 한 잔쯤이야 냄새도 안나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요사이 교통단속이 심한데 교회차 끌고 가다가 술 먹었다고 잡히면 꼴 망신이요!'
'염려하지 마세요, 목사님은 술을 못 드셔서 잘 모르십니다. 술 잘 먹는 사람들은 맥주 한잔은 술도 아닙니다. 까딱없어요'
'그래도 교통한테 잡히면 o집사님 유치장 행이야요'
'염려 마세요'


넓은 유리창으로 풍요롭게 펼쳐진 연두 빛 물결을 바라보며 목욕 후 마시는 맥주가 그렇게도 시원하고 좋은지 o집사의 기분이 너무 좋아 보인다. 그렇게 좋아하는 걸 평소에 왜 눈치만 보게 했는가. 이제 앞으론 더욱 편안하게 대하도록 해야겠다.

'o집사님, 나 말이야 정말 편안하게 목회하고 싶어요, 교인들을 가족처럼 가정처럼 생각하며 목회하고 싶단 말이요,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함께 몸을 부비며 살고 싶단 말이요'
'좋지요, 그렇게 하시잖아요'
'아직 부족해요 더 터놓고 살고 싶단 말이요'


그렇게 둘이서 좋아 떠들다가 교회에 와 저녁을 먹고 저녁예배시간에 o집사와 목욕 갔던 이야기며 맥주 먹은 이야기를 다 까발려 버렸다. 그랬더니 교인들 배꼽이 빠지라고 웃어댄다. 저녁예배가 끝난 후 o집사 내 앞으로 다가와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오늘 설교가 이겁니다. 하며 너무 좋아한다. 교회 다니기 싫어 부인 예배당에 오면 억지로 따라와 교회 밖에서 자녀들과 놀다가 예배 끝나면 잽싸게 부인을 챙겨 가던 사람이 어느 날 나한테 붙잡혀 예배드리기 시작하고 어느덧 집사가 되고 우리 교회 청장년 회장이 되어 목회를 돕는 훌륭한 동역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대견하고 사랑스러운가. 그 부인 또한 내가 전도하여 집사까지 되고 건장하고 마음이 넉넉하고 시원시원하여 앞으로 우리교회의 여 장로감이니 얼마나 좋은가.  


2.

교회가 무엇인가. 복음(福音) 전하는 곳 아닌가. 복음이 무엇인가. 사람들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게 아닌가. 세상에서 찌든 사람 교회 와서 기를 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 받고 평안하게 살게 하는 게 아닌가. 틀을 짜 놓고 거기에 사람을 옭아매는 게 복음이 아니고 틀에 박힌 사람의 틀을 벗겨 영원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게 복음이 아닌가.

금주 금연 문제도 그렇다.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한국에 처음 들어 올 때 한국 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너무나 피폐해 있었다. 특히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운 시대였다. 밥 먹고 살기도 힘들어 보리죽으로 연명하던 시절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미군들과 선교사들이 가져다 주는 우유를 받아 집에서 쪄 먹던 생각이 난다. 철들어 알고 보니 그건 서양 사람들은 먹지도 않는 동물 사료용 우유였지만----, 그것도 못 얻어 먹어 우린 얼마나 걸신들린 사람처럼 살았던가. 그러던 시절에도 정신나간 사람들은 몰래 밀주를 담가 먹고 비싼 담배를 사 피우고 모이면 노름이나 하고, 가정경제에 좀 먹는 일을 행하지 않았던가 이런 모습을 본 서양 선교사들이 교회에서부터 백성 살리기 운동을 하자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복음으로 정신을 올바로 세우고 검소 검약 절약하는 정신운동을 벌이고 이어 금주 금연 운동도 벌인 게 아닌가. 이렇게 하여 미개문화민족의 경제를 살리는 데 선교사들이 한 몫 한일은 한국기독교사에 훌륭한 업적이라 볼 수 있겠다. 이렇게 하여 교회에서 금주 금연운동이 토착화되고 전통화 된 것은 어떻게 보면 한국 개신교가 성장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으며 개신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 할 수 있겠다. 지금도 주초를 금하지 않는 천주교회에 비해 금주 금연하는 개신교의 모습은 더 깨끗한 모습으로 표상 될 수도 있으며 개신교가 자랑할 만한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금주 금연 문제는 한국교회가 나은 아름다운 전통일 뿐이지 그것이 복음의 핵심인양 목숨걸고 사수해야 될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가령 예를 든다면 교우들이 술 담배를 끊고 더욱 정신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도록 권면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 아직 신앙심이 몸에 배지 못하여 금주 금연을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는 사람을 교리적 잣대로 마구 나쁘게 평가하여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가 두렵게 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누구나 성경말씀을 통하여 높은 정신세계에 눈을 뜨게 되면 세상의 하찮은 기호품을 통하여 만족을 얻으려 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기엔 쉬운 길이 아니다. 아직 걸음마 단계인 초보 신앙인에게 너무 큰 것을 강요하면 지쳐서 쓰러질 수가 있다. 모든 것은 단계가 있는 것이다. 유아기 때에 맞는 교육방법이 있고 유년기에 맞는 방법이 있는 게 아닌가.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다. 성도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고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모든 것을 용납하고 포용할 수 있으며 그를 선한 곳으로 자연스럽게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먹어선 안 된다고 주먹다짐하지 말고 복음으로 사랑으로 그를 감싸안으면 그는 잘 알아서 자기 처신을 할 것이다. 이것이 현대의 교육방법이고 또한 예수님의 교육방법이시다. 아흔 아홉 마리보다도 제멋대로 노는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섰던 주님의 마음에서 이를 배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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