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리화 된 종교는 형식과 틀을 강조하여 신도들을 그 틀 속에 가두어 놓고 그 밖의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맹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실수를 범하는 수가 많다. 그러나 철학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교리적인 규범과 틀을 부수어 버리고 틀 밖에서 틀 속에 갇혀있는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배양시킨다. 이러한 철학적 사고는 이성을 강조하여 비이성적 종교행위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감성과 교리만 강조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차단하는 교리화된 종교에 비하여 더 신의 성품에 가까이 다가가는 순수한 신앙인을 만드는 데 공헌하는 수도 있다.

그렇지만 교리 속에 갇혀있지 않은 순수한 성서 그 자체는 형식적 종교의 범주를 넘어서며 비판적 철학의 이성조차도 포용할 수 있는 계시(revelation)를 담고 있다. 성서에서 이 계시를 빼어버리면 인본주의적 종교가 되는 것이요 철학으로부터 공격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계시는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unity)임과 동시에 귀중성이다.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동정녀 마리아의 아기 출산을 부인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누구나 다 아는 오늘의 과학적 사고로 그 부분을 반박한다. 그러나 현대과학도 완성된 학문이 아니요 발전과정에 있을 뿐이다. 미래의 과학은 또 다시 새로운 그 어떤 이론과 결과를 가져와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과학의 지식을 뒤엎어 버릴 수도 있다. 어떻든 간에 과학은 사실을 규명하려는 데 목적이 있으며 우리는 그 노고를 치하한다. 그러나 신앙은 사실을 규명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사실은 절대자 이외에 그 누구도 밝힐 수 없는 신비의 세계다. 그러므로 신앙은 신앙으로 체험한 것을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데 고귀한 진실성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 신앙은 절망의 도가니에 빠진 사람을 새 사람으로 키워내는 힘이 있다. 그런 면에서 고백(신앙)은 사실(과학)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의 아기 출산은 그런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신앙인은 그 신앙고백 속에서 인류의 완전한 구원을 상상하며 신의 계시의 음성을 듣게 된다.    

이러한 계시의 음성으로 다가오는 성경의 말씀을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때는 종교도 철학도 다 계시에 묻혀버리고 만다. 오직 순수한 하나님의 음성만이 지휘권을 갖는다. 이 때 성서는 무한한 영감으로 우리에게 계시의 음성을 들려주고, 그로 인해 우리를 참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뿐 아니라 자연도 사랑할 수 있는 범 우주적 사랑을 소유하게 된다. 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게 된다.

그래서 성서는 거룩이라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구약성서 레위기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하여 '거룩'할 것을 강조한다(레 11:45). 요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려고 우리를 구해낸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레 22:32, 33). 그러면서 무엇이 거룩한 것인가에 대하여 너무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먼저 부모를 공경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거룩한 것(레 19:3)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레 19:11-14), 재판의 공평성(레 19:15), 사람을 비방하지 않는 것(레 19:16), 미움, 원망, 복수하지 않는 것(레 19:17, 18) 등이 거룩한 것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또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거룩한 자가 갖추어야 할 품성으로 자연과 동식물에 대한 관심이다. 우주만물의 창조자시요 주인이신 하나님은, 하찮은 미물에까지도 세세하게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그것들을 잘 관리할 책임을 주셨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는 말씀(레 19:19)이 그 하나의 예이다. 이는 동물의 고통과 혼동과 무질서를 방지하기 위함이며, 연약한 식물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가령 예를 들어 옥수수 같이 키가 큰 식물과 키가 작은 상추 같은 식물을 섞어서 뿌리면 키 작은 식물이 큰 식물의 그늘과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햇빛을 받으며 자랄 수 있겠는가? 어느 한 종교적인 틀에 매여있지 않은 성경 속의 하나님은 이렇게 세심하게 하찮게 여기는 미물에게까지도 관심과 사랑을 가지시며 인간들이 이런 계명들을 지켜야 거룩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신 25:4)고까지 성서는 말씀하고 있다. 이 얼마나 모든 피조물의 동등성과 귀중성을 나타낸 말인가. 이러한 일련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거룩하다는 것을 성서는 계속 강조하고 있다.

2.
자,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거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주일성수 잘하고, 십일조 잘 바치고 그리고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 잘하는 형식적인 종교행위에만 초점이 맞추어지지는 않았는가? 그리고 그렇게 하면 복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웃(나와 이념이 다른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더더욱 동물 식물 등 자연환경을 돌보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기독교라는 교리화된 종교가 성서의 일부분만을 강조하여 인간의 감성만을 지배하고 이성을 잃어버리게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면 너무한 말인가?

진리는 인간을 잡아매고 속박하고, 억압하는 강제적인 것이 아니다. 진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낮이 가면 밤이 오는 것이 진리이며,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이 진리이다. 그리고 동물과 식물과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삶으로 생태계의 안정을 이루는 삶이 진리이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를 영원토록 자유케 하는 것이다(요 8:32).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통하여 진리에 대한 조명을 받지 못하고 교회 공동체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만들어 놓은 '교리'를 받아들여 그것을 사수하느라고 매우 분주하고 바쁠 뿐 세상과 자연과의 관계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물 위에 뜬 기름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것이 십자가라고 외치고 있다. 자기가 바로 바리새인이면서 남 보고 바리새인이라고 외치고 있다.
  
어떤 이가 말한 것이 기억난다. 지금까지는 국가의 성숙도를 GNP(국민총생산)의 증대로 보았는데 지금은 다르게 보아야 된다는 것이다. GNP(국민총생산)의 G는 god(하나님)을 N은 natural(자연)을 P는 people(사람)을 의미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자연과 사람이 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환경이 좋아야 성숙한 국가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설득력이 있는 말이라 생각한다.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적이고 유기적인 삶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관계적인 것으로서 생명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꽃피고 실현되는 역동적인 생명의 향기이다. 인간은 자유한 자로서 사랑하는 자로서 하나님, 동료, 이웃 인간, 그리고 자연의 전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도록 피조되었다.

인간의 영성은 영 그 자체이신 창조주 하나님과의 수직적 초월적 관계에 근거를 두고 동료인간과의 수평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순환관계 속에서 꽃핀다. 인간의 '영성'은 성령의 은사들인 방언, 신유능력, 예언능력 등 종교적 은사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성숙한 영성을 지닌 자라는 말은, 성숙한 인간성 곧 하나님의 형상이 건강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꽃피고 체현된 생명에 대한 이름이다. 성숙한 영성은 하나님을 닮아서 자유하고, 사랑하며, 창조하고, 치유한다. 성숙한 영성은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의 실현이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내는 기본적인 인간성의 원형적 모습을 왜곡됨 없이 펼쳐내는 생명이다.

그렇게도 적대관계에 있었던 남한과 북한이 만남을 계획하고 화해를 준비하며 디지털과 인터넷이라는 전자혁명을 통하여 세계가 하나로 묶여지는 총체적 문명전환의 새로운 새 시대에는 이 변화하는 문명을 이끌어 갈 새로운 영성이 필요하다. 이제 모든 종교들은 변화하는 문명을 감싸안기 위하여 갈등과 대립을 조장하는 구원론적 영성을 넘어서서 화해와 만남을 이루는 평화론적 영성을 회복하길 이 시대가 요구한다는 것을 겸손히 받아들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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