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 16호

여름 한철의 뜨거움도 이제 한풀 꺾이고, 가을의 소슬함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세상 만사에 아귀다툼이 그치지 않고, 육신은 고단하며 영혼은 지치기 쉬운 때에 우리에게 믿음의 성숙함은 간절한 바람으로 다가옵니다. 정치는 이미 우리에게 고역스러운 화제가 된지 오래이며, 경제도 불안하고 사회는 여전히 안정의 길을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리저리 휘둘리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모두에게 깊은 정신적 위로가 되고 성찰의 심연을 더해주는 성숙한 신앙의 실체는 없는 것일까요? 그래서 이 힘겨운 시대를 가파르지 않게 돌파하는 새로운 자세와 무게 있는 사유 방식은 없는 것일까요?

성숙한 신앙인의 표상으로 우리들의 마음에 짚이는 인물들은 기독교 역사 속에 무수히 많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경우가 당장 그러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 명예와 지적 오만에 묻혀 살다가 윤리적 방탕에 이르기까지 했으나, 하나님의 길로 들어서면서 인생에 파격적 전환을 가져옵니다. 그리고는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서 흔들리지 않는 바윗돌 같은 위치를 차지하는 신앙적 성숙의 경지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한 시대가 하늘이 내린 인물을 만난 셈입니다. 일단 성숙한 신앙의 표상이 세워지면 시대 전체의 수준이 한꺼번에 올라갑니다. 적어도 사람됨의 기준이 달라지게 되며, 성숙함의 실체가 있다는 점에서 믿음은 매우 구체적인 현실의 증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 시대의 고뇌를 가슴에 끌어안고

그는 당대의 유명한 연설가와 논객이 되고자 했고, 그로써 정치적 명망과 사회적 존경을 얻고자 한 사람었습니다. 그가 읽었던 책들은 고대 희랍문명의 전통에서 최고의 필력을 자랑했던 것들이었으며 그가 상대했던 철학자들과 논객들 역시 한 시대를 들었다 놓았다 했던, 일세를 풍미했던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그의 눈에 비친 성경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고,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발견할 만한 가치를 가진 책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하다 못해 성경이란 무지하고 순박한 민초들에게나 적당한 책이라는 생각을 그는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에 있는 심오한 진리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어거스틴은 일대 전환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한 시대의 고뇌를 모두 가슴에 끌어안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장대한 고백과 묵상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거스틴의 명저 「신국(神國)」이 탄생하게 된 경위이며, 신앙의 성숙함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과 직결되는 것을 치열하게 갈파한 역사의 유산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거스틴 이후 계속해서 기독교 역사가 배출해낸 성자(聖者)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사리사욕에서 벗어나 이웃의 삶에 전면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의 인생을 그를 위해 헌신적으로 바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당대의 현실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일깨우고 계신지를 알려나간 예언자들의 후예였던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들이 보인 삶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바는 고난 가운데서, 자기를 버리면서 자신을 성취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로, 죽으니 살리라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 이들의 생명의 진정한 완성입니다. 이들은 진정 세상에서 자기가 완성되는 길이 자기를 나누는 것임을 분명하게 깨달았으며, 그로써 자신의 생명이 타자의 생명 속에 녹아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 또한 알았던 것입니다. 영생의 차원에 대한 눈뜸이 여기에 있고, 남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른 빛나는 삶이 펼쳐졌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 지켜

사도 바울의 일생은 실로 성숙한 신앙인의 모형적 표상이었습니다. 바울이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전 우리는 그가 유대교의 전도 양양한 청년 지식인이자 지도자임을 알고 있습니다. 지적 능력도 있고, 종교적 열정도 있으며 확신에 찬 행동력도 있는 그에게는 당대의 유대 지도자들이 기뻐해 마지않는 헌신과 신앙 그리고 우수한 지적 역량이 풍부하게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앞으로 나아갈 바에 대하여 주저할 이유가 없는 인생의 미래가 주어져 있었고,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지위가 약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즉 사울은 어느 날 천둥벼락이 치듯 그를 습격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혀 실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고 그로인해 기독교의 정신적 성숙을 심화시켜나가는 길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사실 다른 제자들에 비해 조건이 나빴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삶이 없었다는 점이었으며, 또한 그의 사도 직이라는 것도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었다는 전력으로 인해 신뢰하기 어려운 느낌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형편에 개의치 않고 복음 전파에 헌신적으로 전력투구해 나갑니다. 그러면서 그는 고난의 세월을 보내도 여전히 선하고 자비로우며 성령의 열매를 품은 신앙의 품격을 지닐 수 있는 길에 대한 일깨움에 정열을 불태웠습니다.  

보통의 경우, 어려운 일을 겪거나 또는 선한 일을 하다가 당하는 도전과 위기 앞에서 좌절하기 쉽고 중도에서 포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바울은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어려움을 겪을수록 더욱 강해졌고, 기회가 아닌 듯한데도 기회를 만들어 복음의 능력을 입증하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신앙은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가 옥에 갇혀 있음에도 도리어 그로 인해 복음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기뻐했으며, 자신의 처한 어려운 처지가 그의 믿음에 깊이를 더하고 능력을 강하게 만드는 근거가 됨을 감격해 했던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유난히 성숙한 믿음에 대하여 강조했습니다. 그가 강조한 성숙한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신앙의 품격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지칭했으며 온유와 겸손, 절제와 자비, 기쁨과 열정 등 성숙한 믿음을 가진 신앙인들이 지닌 품성의 특징들을 열거했고, 그로써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는 존재로서의 신앙 인격이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를 갈파해 나갔던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신앙의 목표와 의지 못지 않게 성숙한 신앙인이 드러내야 하는 사람됨의 모습 또한 중요했습니다. 그 안에 성령의 열매로서의 성숙한 품격이 있지 않을 경우, 그런 신앙인들은 남들을 걸려 넘어지게나 할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신앙 인품이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덕을 가리는 일이 되며 그로 인해 선교의 문이 막힐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바울의 신앙이 성숙의 지표라고 주목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만사에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존귀하게 여겼고 앞서 언급했듯이 어려운 형편에 처했을 때에 보다 강해지고 깨우침이 깊어지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의 신앙행위, 그 중심에는 기쁨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범사에 감사하라며 기쁨의 신앙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는 실로 성숙의 믿음이 아니고서는 체험할 수 없는 신앙의 감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그의 신앙이 범상치 않고 기쁨의 신앙이 중심이 된 것에만 주목하면 그의 이러한 신앙의 뿌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어려운 이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깊이
마음을 쏟아 세상에 구원의 깃발이 되는 감격을
누릴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은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뉴스앤조이 김승범

바울의 신앙, 그 중심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으려는 믿음의 결단과 각오가 있었습니다. 좋을 때에는 좋다가도, 어려운 고비에서는 돌아서는 피상적이고 배신적인 자세가 아니라 어느 때라도, 어떤 처지에서라도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이라면 이를 모두 달게 감당하는 마음과 영혼의 기본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즉 고난에 대한 감수가 그에게 역설적이게도 기쁨의 진수를 체험하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에 성숙의 높이와 깊이를 더해주었던 것입니다. 하여, 그는 말년에 자신이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다고 장중하게 고백할 수 있었으며, 나를 본받으라는 증언을 아무 두려움이나 주저함 없이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확신에 찬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체험의 거짓 없는 증언이었으며, 그의 일생 전체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의 육성을 울리는 존재

요한계시록의 사도 요한 역시 믿음의 성숙에 있어서 고난의 불길을 뚫고 등장한 표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밧모 섬에 묶여 박해받고 있던 처지에 굴복하지 않고, 사도 요한은 악의 종말을 미리 내다보았고 하나님의 의가 승리하는 것을 뜨겁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신앙의 길에서 이탈하고 배신하며 자기 목숨을 구하던 때에, 사도 요한은 배신의 시대가 결국 종료할 것을 예언하면서 그의 믿음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 나라의 장대한 천기(天機)를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이는 실로 성숙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인식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 대한 영적 눈뜸이었습니다. 그로써 폭압적인 탄압의 현실 앞에서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있던 신앙인들에게 늠름한 믿음의 길을 연 은총의 표상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자면, 이제 믿음의 문은 닫히고 말았구나, 하나님의 축복은 거두어졌구나, 악한 권세에 붙지 않으면 목숨이 부지되기 어렵겠구나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사도 요한은 모든 낙담과 패배를 타파하고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확신하는 자로 우리 앞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로써 진실로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대한 영적 개안(開眼)의 기쁨을 나누어주었던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란 실로 모두의 신앙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잃고 세상 권세에 마음과 영혼이 굴복하려고 할 때 이를 가로막고 하늘의 헤아릴 길 없는 위로와 인간의 체험을 뛰어넘는 계시 그리고 시대의 흐름을 내다보는 예언의 육성을 울리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있기에 우리는 어려운 시대의 한복판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신앙의 깃발을 그대로 움켜쥐고 하나님 나라의 길을 향해 진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브라함, 굳건한 믿음으로 후대까지 영향력 미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모습 또한 신앙의 성숙함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보여줍니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것 하나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새로운 땅을 향해 걸어 들어간 존재였습니다. 그것은 환난과 시험이 무수히 기다리고 있는 과정이었고, 인간적 한계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상황이 존재하는 현실이었습니다. 그의 시작은 초라했고 그의 유랑의 시간은 길었으며 그의 처지는 실로 아무도 나서서 보호해주지 않는 미약한 나그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브라함의 인간적 한계와 약점이 또한 드러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가 하나님의 벗이자 의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의 마음이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향해 있었고, 이를 근거로 아브라함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믿음의 거대한 혈통의 시작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대의 현실에서 감히 꿈꾸기 어려웠던 일이면서도 결국은 실현된 놀라운 믿음의 열매였던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의 이름 없는 야인(野人)에 불과했던 그가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신뢰와 이 신뢰를 자신의 생명선으로 삼아 비전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 행로를 시작하니 그 결과가 그의 대에서만이 아니라 그의 후대, 대대로 깊고도 놀라운 믿음의 맥박을 이루었다는 것이 성서의 증언입니다. 한 사람의 성숙한 믿음은 이토록 자신 한 사람의 삶만이 아니라 그를 시초로 무수한 인생의 진로를 바꾸며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노아의 순종은 이방인에게도 ‘생명의 밧줄’

이렇게 보자면, 노아 역시 성숙한 믿음의 표상으로 주목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시대 전체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거의 저버리다시피 하는 상황에서 노아는 휩쓸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줄 알았던 영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이란 현세에서 우스꽝스러웠고 비현실적인 듯했으나 사실은 가장 현명했고 가장 현실적이었다는 역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리석다고 여긴 것이 가장 슬기로운 것이었으며, 세상이 미련하다고 여긴 것이 가장 똑똑한 것으로 판명되었던 것입니다.  

대홍수 이후의 세상은 노아의 믿음 위에 존재하는 세상이었으며, 그로써 우리는 거대한 방주를 아무런 회의 없이 순종하며 지어낸 노아의 철석같은 믿음이 지상의 생명체들과 인류의 미래를 구원해냈다는 성서의 증언 앞에서 겸허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한 사람의 성숙한 믿음은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타자의 운명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밧줄이 되는 것입니다.

한센병 김신아 장로의 ‘육신의 창조적 승화’

필자가 기자 생활을 하면서 얻게 된 가장 큰 자산이 있다면 그것은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입니다. 특별히 충광농원의 김신아 장로님은 나의 신앙과 삶에 큰 도전과 위로를 주신 분입니다. 김신아 장로님은 한센병이라는 육신의 극심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같은 병을 앓고 있던 사람들을 모아 교회를 세우고, 이후 농원을 만들어 장애인들이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을 일구어 나가는 일에 지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것이 이후 한국 축산업에 성공 사례로 꼽히는 충청북도에 있는 '충광농원'의 시작이었고, 이후 이분은 경향 각지와 일본 등을 다니시면서 장애인들의 개척 생활을 소개하고 자신의 신앙을 간증하는 일 등을 통해 육신이 멀쩡한 사람들보다 더 분명한 믿음과 생명력으로 마음을 새롭게 일깨우시는 일을 해온 것입니다. 지금은 거의 실명(失明) 상태인 김신아 장로님은 오랜 세월 병으로 일그러진 육신의 한계를 초월한 노(老) 신앙인의 영적 열매가 어떤 것인지 보여줍니다. 충광농원의 출발은 한센병에 걸렸던 사람들을 동정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차원을 바꾼 사건이었습니다.

김 장로님은 소록도에서부터 시작해서 이곳에 오기까지 겪은 일생의 고난과 훈련을 신앙의 힘으로 새롭게 변화시키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작은 일에도 마음 상하기 쉽고, 정신적으로 무너지기 쉬운 사람들에게 신앙의 능력 가운데서 자신들의 삶을 개척하도록 독려하고 일으켜 세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충광농원이 인간적인 땀의 결정체가 아니라 신앙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공동체였기에 이들은 인간적 상처를 딛고 감사로 일어설 힘을 길러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작업에 바로 김 장로님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분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한센병에 걸려 치렀던 무한한 고통과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처지에서 새로운 가치를 사람들의 삶 속에 창조해 나가는 열정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튼, 60년 가까운 세월을 병의 고통과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마음과 영혼의 내면은 몸이 건강한 사람들보다 훨씬 밝고 생기에 차 있으며 늘 새로운 비전을 향해 활발하게 움직이시는 것을 목격하면서 하나님이 그 육신과 영혼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의 가치를 새삼 돌아보게 됩니다. 김신아 장로님은 "인간에게 불행과 절망을 주는 것 같은 온갖 삶의 장벽과 질병들을 창조적으로 승화시킬 때, 그것은 오히려 영과 육의 성장에 있어 생명력을 키워주는 힘으로 작용"하며,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규제와 압력들은 하나님의 신비스런 의미를 담은 축복"이라고 고백합니다.

장로님을 뵈면서 인간에게 축복 가운데 축복은 우리의 육신과 영혼을 하나님이 거처하는 현장으로 삼으시겠다는 말씀과 약속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육신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으셔서 그 안에서 세상이 상상하기 어려운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시는 놀라움을 이분의 신앙과 삶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한센병의 고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정도의 고난에 짓눌려 자신의 삶 속에 뿌려진 가치가 채 발아(發芽)하기도 전에 포기하고 마는 인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나와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요? 그러나 김 장로님은 자신의 존재 내면에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하나님이 주신 긍지가 있는데 무엇이 좌절스럽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김신아 장로님의 존재는 그런 차원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 대하여 대답해야 할 지점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현실로 돌아가면 우리는 구원과 생명의 표상이 빈곤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자신이 성숙한 신앙의 표상이 될 것을 일깨우시는 하나님의 육성을 듣는 기회임을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요? 없다고 할 것이 아니라, 성서의 인물들과 김신아 장로님 같은 분들의 삶을 되돌아보며 우리 자신이 그렇게 되어 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는 다짐 말입니다. 이미 주어진 모델이 있는데, 그에 따른 믿음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 문제이지 세상과 시대를 탓하는 것만으로 우리의 믿음의 책임이 면제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려운 이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깊이 마음을 쏟아 세상에 구원의 깃발이 되는 감격을 누릴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은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한 축복, 독자 모두에게 가을의 열매처럼 풍성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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