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미쉬 여성들. 그들의 단아한 옷 가운데에는 신앙적 의미가 숨겨져 있다. (사진제공 임재근)
많은 크리스천 형제들이 이명박 장로님의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희 가족들은 누구를 찍자고 회의를 하지도 않았지만, 아무도 그분을 찍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막상 이전처럼 누구를 찍어야겠다고 누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기대가 적다보니, 안타깝지만 그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제가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은 꼭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작년 년 말부터 아미쉬 공동체에 대해서 공부하면서부터 더 그러합니다. 언젠가 공부를 더 하고 나서 아미쉬 공동체를 여러분에게 자세히 소개드리려고 했지만 지금 간단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와중에서 유아 세례를 부정하고, 국가와 종교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하여 급진적 종교 개혁가들로 알려진 아미쉬들은 흔히 아나밥티스트-재세례파의 후예들입니다. 토마스 민쩌도 재세례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유아 세례의 부정과 재세례에 대한 의견도 지금의 관점이 아닌 중세의 유럽의 사회경제적 삶의 자리에서 보면, 태어나면서부터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국가나 영주에 의해서 신앙 행위를 강요받는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독선이 아니라 충분이 존중되어야 할 신앙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앙은 자발적인 고백과 결단이어야 하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것만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미쉬가 21세기의 현대 사회에서 주목을 받는 이유는 재세례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현대 문명의 한 복판인 미국 동부와 중부에서 자동차와 전기를 거부하고, 고등학교까지 의무 교육인 미국에서 8학년까지만 원룸 스쿨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개인주의의 나라 미국에서 그리고 사회주의가 몰락한 현대에서 공동체적으로 생태친화적인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미쉬에 대해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그들이 그렇게 사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슨 이념이나 생태적 관점이 아니라-오늘날 철저한 환경운동론자들보다 전혀 환경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100년 전의 사람들이 더 환경 친화적으로 살았듯이-하나님 말씀에 따라,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삶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아미쉬들은 국가에 세금은 내되, 국가로부터의 일절 지원은 받지 않고-세금은 안내면서 사회복지 시설이다, 유치원이다, 중고대학교를 운영하면서 엄청난 지원을 받는 한국교회와 얼마나 정반대입니까?-국가의 공적 사회적 보험이 아닌 공동체적 상호 부조를 더 신뢰하고, 집단적으로 마을을 이루어 살아갑니다. 정치는 물론 선거 개입마저 거부하되, 지역 공동체의 시민으로서의 의무(예를 들면 의용 소방대와 자원 봉사 등)는 다하는,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미쉬 공동체의 특징

▲ 자동차를 거부하는 아미쉬 공동체. 그들은 마차를 이용해서 이동한다. (사진제공 임재근)
그들은 농사를 가장 귀히 여기고, 손으로 일하는 것을 귀히 여기면서 이 땅에 부를 쌓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기는 그들이기에, 가업 특히 농업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유기농업이니 친환경농업을 떠들지 않으면서도 자손들이 농사를 지어야 할 땅이기에 가장 유기적으로 농사를 짓고, 그렇게 생산된 농산물을 다른 농산물과 다르게 값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아미쉬들의 일과 삶에 대한 일반적인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거의 모든 아미쉬 성인들은 농장 소유주이거나 사업체를 경영하면서 스스로 생계를 이어간다.
* 아미쉬에는 범죄, 폭력, 알코올 중독, 이혼, 약물 복용이 거의 없다.
* 의료, 노인복지, 또는 8학년 이후의 교육에 절대 정부 보조를 받지 않는다.
* 아미쉬 아이들은 성인이 되기 직전에 아미쉬의 삶을 떠나 휴식년을 갖는다. 공동체에 남아 그 관습을 이어 갈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서다. 보통 아이들의 85%가 공동체에 남기를 바란다. 그래서 아미쉬의 규모는 20세기에 30배나 커졌다.

아미쉬들이 다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고 목공을 비롯한 다양한 가업과 사업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소규모 사업에서 미국 전체 성공률은 15%밖에 안 되지만 아미쉬의 성공률은 95%에 이르는데, 그것을 분석한 도널드 크레이빌의 사업가 아미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 그들은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과 그들은 외부의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는다.
* 그들은 컴퓨터와 전기와 자동차를 사용하지 않는다.
* 그들은 마케팅 계획 세우기를 배우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에겐 농장에서부터 쌓아온 자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기업가다운 정신, 위험을 무릅쓰려는 의지, 개혁의지, 건강한 노동윤리, 값싼 가족 노동력, 수준 높은 기술이다.
* 그들이 존중하는 가치 가운데 하나는 작음이다. 그들은 가게나 사업이 커지는 걸 바라지 않는다.

아미쉬의 그러한 문화와 삶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그들의 교육관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들은 20세기 중엽에 농촌의 소규모 학교를 통폐합하면서 효율성을 강조하는 실용 교육을 미국 정부가 추진하고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을 실시할 때, 그것에 반대하여 적지 않은 아미쉬 사람들이 의무교육법 위반으로 감옥에 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 끝내 대법원 판결과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서 그들은 아미쉬만의 독특한 교육관을 그대로 유지시킬 수 있었습니다.

아미쉬는 새로운 공립학교가 우유분리기 같은 기계 원리로 움직이는 사회분리기라는 걸 일찍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학교가 우유분리기처럼 어린 마음을 휘저어서 부모와 그에 밀착된 아이들 마음을 분리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교육은 사람들을 일상생활로부터 분리시키고 세계를 학과, 과목, 수업, 학년으로 나눕니다. 거기서 교사들은 이방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종교도 연구 분석되며 나아가 가정, 역사, 일상생활로부터도 멀어집니다. 종교는 중요하게 분석해야 할 또 다른 과목으로 전락할 뿐입니다. 또 끊임없는 경쟁은 많은 이들을 패배자로 만들며 수많은 패배자들은 수치스러워하고 스스로를 미워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미쉬 공동체의 삶이 요구하는 보편적 건강함과 완전히 다릅니다. 아미쉬는 그 일부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요구했습니다.

* 학교는 집에서 걸어 다니는 거리에 있어야 한다.
* 아이들은 칸칸이 나뉜 교실에 나이별로 따로따로 집어넣고 해마다 다른 선생님을 배치하는 큰 학교여선 안 된다.
* 학교의 결정은 부모가 감독한다.
* 한 해 수업은 8개월을 넘기면 안 된다.
* 교사는 아미쉬의 가치관과 전원에서 사는 삶을 잘 알고 공감해야 한다.
* 아이들은 지혜와 지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 모든 아이들은 부모 감독 아래 실제 훈련을 받고 도제살이를 해야 한다.

그러기에 아미쉬의 교육관은 지적인 삶보다는 미덕의 삶을, 전문적인 지식보다는 지혜로움을, 개별적인 경쟁보다는 공동체의 번영을, 세속과의 융합보다는 분리된 거룩한 삶입니다.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사학법을 반대하면서 삭발을 하고 순교 운운한 한국교회가 도대체 어떠한 교육관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스러울 뿐입니다. 아미쉬는 자기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일체 지원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원을 목말라 하고 부정마저도 저지르면서 순교를 운운하는 이 땅의 교회들과 기독교 사학들, 철저한 입시 경쟁의 한복판에서 그것의 성취를 자랑하는 교육관이 진정 기독교 교육관인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눈 쌓인 벌판도 차 대신 마차를 이용한다. (사진제공 임재근)
아미쉬와 다른 한국의 기독교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명박 장로님은 그러한 것을 더욱 부추길 자립형 사립학교를 300개나 만들겠다고 하고 대치동 학원가와 교육관련 주식은 폭등한다고 합니다. 문선명 집단이 하는 청심국제중학교에 크리스천 자녀들이 단지 특수중학교라는 이유로 특별 교육을 받으면서 준비한다니, 정녕 우리들의 교회에 신앙적 교육관이 있는 것입니까?

세상에 살되 세상에서 분리된 거룩한 삶 그것이 아미쉬 삶의 기적입니다. 그것을 놓치고 단순히 전기와 자동차를 거부하고 공동체적인 삶을 산다고 생태적인 관점에서만 아미쉬를 이해하면 언제나 사회주의가 그랬듯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은 2006년 10월에 니켈 마인스 총기 사고에 대한 그들의 반응으로 미국 사회에 보여주었고, 그 핵심은 주기도문에 대한 그들의 자세입니다.

아미쉬들은 산상수훈 말씀에 따라 대중적인 공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목사마저 그러합니다. 개인적 기도는 주님의 가르침대로 은밀히 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기도를 안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아미쉬 가정은 아침과 저녁 하루에 두 번의 기도회를 가집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예배가 보통 3시간이 걸립니다. (참고로 아미쉬 목사들은 사도 바울과 같이 월급을 받지 않고, 농사를 짓거나 가업에 종사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기도회와 예배의 핵심에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저와 우리 교회들의 기도와 예배를 살펴보니 주기도문은 목사의 축도보다도 가치가 없고, 주일(대) 예배서는 당연히 찬밥이고, 주기도문은 당지 목사가 없을 때 축도 대신 그냥 주문 비슷하게 예배를 마무리 짓는 장식품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희 공동체에서는 올해부터 주기도문을 예배의 가장 중요한 시간에 배치하여 뜻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낭송하기로 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한국교회에서 주기도문이 새롭게 인식되고, 묵상되고,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넷에서 본 주기도문에 대한 어떤 글로 새해인사를 마치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지 말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하지 말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 하지 말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지 말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지 말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 말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 말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말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 말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 말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김재일/ 예장생활협동조합 대표· 현재 화성에 있는 아름다운성빛공동체에서 농사를 지으며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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