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최승현·이찬민 기자] 누구나 인간으로서 존엄한 권리를 지닌다는 점을 확인하고, 지방정부가 지역 주민 인권을 실제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만드는 '인권조례'.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인권조례는 반동성애 단체를 위시한 보수 개신교의 민원 폭탄으로 번번이 좌초됐다. 인권 전문가들은 곳곳에서 '인권 정책의 후퇴'를 우려하고 있다.

보수 개신교의 압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본 '개신교와 인권조례' 시리즈를 취재하던 2019년 11월 말, 서울 금천구 사례는 유독 기억에 남았다. 금천구 또한 인권조례안을 입법 예고했다가 반동성애 진영에 좌표가 찍혀 민원 폭탄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당시 금천구 안시형 인권전문관은 "꼭 인권조례를 통과시킬 테니 제정되면 그때 다뤄 달라"고 말했다. 짧은 통화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민원이 쏟아지면 위축되거나 껄끄러워하던 여타 기초 단체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허언이 아니었다. 금천구는 12월 14일 구의회 통과를 거쳐 12월 31일 인권조례를 정식으로 공포했다. 반대 민원에도 금천구가 인권조례를 밀어붙일 수 있던 배경은 '관 주도'가 '주민 주도'에 있었다. 구민들은 2017년 하반기부터 체계적인 인권 교육을 받고, 지난해 7월 인권조례추진단을 출범해 조례 제정을 준비해 왔다. 2012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표준안과 서울시 인권조례, 이미 조례를 제정한 곳 중 잘 운영해 왔다는 평가를 받는 성북구·은평구, 경기 광명시·수원시 사례를 참고했다. 유성훈 구청장은 조례추진단 안건을 토대로 2019년 10월 금천구 인권 기본 조례안을 입법 예고했다.

밑뿌리가 튼튼하니 구의회에서도 별다른 문제 없이 안건이 통과됐다. 인권조례를 폐지하라거나 부결시키라는 고성과 혐오 피켓이 난무하기는커녕, 금천구의회에는 "조례 제정을 축하합니다" 피켓을 든 주민들이 등장했다.

조례제정추진단에서 활동하며 금천구 인권 기본 조례의 초석을 놓은 주민 양슬기 씨(왼쪽)와 조혜진 씨(가운데), 금천구청 안시형 인권전문관(오른쪽)을 만났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뉴스앤조이>는 2월 6일 금천구청을 찾아 '조례제정추진단'에서 활동한 금천구민 양슬기 씨와 조혜진 씨, 안시형 인권전문관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양슬기 씨와 조혜진 씨는 2017년 10월 열린 '주민인권배움터' 1기 수료생들이다. 평소 인권 문제에 관심이 있던 두 사람은 우연히 구청의 교육 안내를 보고 강의를 듣게 됐고, 이 인연으로 금천구 조례제정추진단 활동까지 함께했다.

한자리에 모인 이들은 민원인-공무원이 아닌, 오랜 기간 신뢰를 쌓고 함께해 온 사이 같아 보였다. 안시형 인권전문관이 주민들 덕분에 인권조례를 제정할 수 있었다고 말하자, 조혜진 씨와 양슬기 씨는 안시형 전문관이 금천구에 온 덕분이라고 서로를 치켜세우며 훈훈한 장면을 연출했다. 아래는 세 사람과 나눈 일문일답.

10대 청소년부터 70대 할아버지까지
주변 사람 설득할 수 있는 역량 길러
교육 경험 바탕으로 입법 활동 참여

- 금천구가 인권조례를 제정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다 보니, 2017년 주민 인권 교육까지 거슬러 올라가더라.

조혜진 / 40대에 접어들면서 점차 인권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생활하거나 아이를 키울 때도 점점 인권의 가치가 중요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구청 평생학습관에서 인권 교육을 마련했다. 2시간씩 8강을 듣는 코스였는데, 처음에는 인권개론을 듣고, 후에는 표현의자유·성소수자·여성 등 각 분야를 배웠다. 광명 같은 다른 기초 단체 실제 사례도 들었다. 평소 인권에 관심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주민이 교양처럼 다가갈 기회가 됐다. 40명이 들었는데 모두가 만족했다.

나는 총 3번을 수료했는데, 매번 강의 주제가 달랐다. 인권 분야는 매우 다양하고 실제 사례도 해마다 달라지기 때문에 반복해서 수강하는 사람이 많다. 강사도 매번 다르다. 수강생들이 자발적으로 인권 동아리도 만들었다. 지금까지 주민들과 독서 모임을 이어 오고 있다.

양슬기 / 나도 동네 청년들이 교육받으러 가 보자 해서 참여하게 된 케이스다. 교육을 들으면서, 다른 사람이 나와 어떻게 다른지, 얼마나 다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30대 초반 여성인데 교육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나이도 직업도 달랐다. 인권에 대한 가치관이 각자 다 다르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무엇보다 교육은 실제 일터에서도 도움이 됐다. 회사 동료들도 금천구 주민인데, 처음에 인권조례를 만든다고 하니까 "친동성애다", "친노조다"는 같은 뜬소문을 듣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었다. 주민 교육을 듣고 나니까, 그런 분들에게 대답해 줄 수 있는 역량이 생겼다. "인권조례가 제정되면 행정 서비스를 받는 사람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고, 내가 인권침해를 당했을 때 지자체 차원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기관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해 줄 수 있었다. 주민 권리 증진 차원이라고 설명하면서 전반적인 인권 수준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하면 다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더라.

안시형 / 수료생 중에는 10대 청소년도 있고 70대 할아버지도 계셨다. 할아버지께 어떻게 강의를 듣게 되셨냐고 물었더니, "인권을 아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하는데, 학교 다니면서 그런 것을 배워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지금 주민자치위원으로 활동하며 인권 가치를 전파하는 역할을 해 주고 계신다.

금천구는 2017년부터 주민 인권 배움터를 열어 왔다. 평소 인권 문제에 관심은 있으나 공부할 기회가 없던 주민들은, 구청 교육에 매우 만족했다. 기존에 교육을 수료한 이들도 매번 달라지는 강사와 콘텐츠를 체험하기 위해 교육에 또 참여한다고 한다. 위 사진은 2017년 주민 인권 배움터 1기 모임에서 주민들이 토론하는 모습이고, 아래 사진은 2019년 11월 유성훈 구청장(가운데 초록색 넥타이)과 함께한 3기 수료식 현장. 사진 제공 금천구청

- 교육받은 인연으로 인권조례추진단까지 참여하게 됐는데, 내 손으로 조례를 만든다는 점이 부담되지는 않았는지.

조혜진 / 처음에는 조금 부담됐던 게 사실이다. 내가 인권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것도 아니고,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해도 되겠냐고 했을 때, 전문관님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 해서 부담감이 줄어들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현재 있는 조례를 바탕으로 만들어서 부담이 덜했다. 학계 전문가, 법조인, 행정가, 주민들이 모여서 만들었다. 국가인권위원회, 서울시 등 6개 기관 인권조례 글자 하나하나 살펴봤다. 다른 기관 조례가 없었다면 훨씬 어려웠을 거다. 먼저 조례를 제정한 분들께 감사드린다.

양슬기 / 주민들이 지방자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은 많이 하지만, 실제로 주민들이 자기 의견을 내는 경험은 해 보기 어렵다. 정당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동안 참여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는데, 인권 교육을 듣고 내 역량만큼 최대한 힘을 더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같이 교육을 들은 분들이 훌륭해서 서로 믿고 같이 맞춰 가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우리가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선에서 인권조례를 만들면 된다고 생각해서 부담은 없었다. 앞으로 또 개정하면 되니까.

주민 인권 배움터에서 공부한 이들 중 일부는 2019년 7월 출범한 '조례제정추진단' 활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국가인권위 인권조례 표준안, 서울시 인권조례, 성북구와 은평구 인권조례 등을 비교하고 분석하며 초안을 작성했다. 사진 제공 금천구청

주민들이 일일이 찾아다니며 서명
찬성 461건 중 구민 341명
반대 339건 중 구민 6명

- 금천구 역시 보수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반동성애 진영의 집단 민원이 있었다. 안시형 전문관뿐 아니라 감사담당관실 팀장, 과장과 구청장까지 모두 반대 민원에 시달렸다고 들었다.

안시형 / 들어온 민원 총 800건 중에 찬성이 461건, 반대가 339건이었다. 반대 의견 때문에 직원들이 많이 시달렸다. 이걸 분석해 봤더니, 반대 339건 중 주소지를 남긴 금천구민은 6명밖에 없었다. 찬성 461명 중 금천구민이 341명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 분은 중국에서도 반대한다고 전화했다. 대부분 특정 내용을 복사해서 붙여 넣는 수준이었다. 항의 전화한 사람에게 어떻게 알고 연략했냐고 물었더니, 위에서 시켰다는 투로 답하더라.

- 다른 지자체의 경우, 민원 중 대부분이 반대 의견인데 금천구는 찬성 의견이 더 많았다.

안시형 / 주민분들이 적극적으로 설득해 주셨다. 추진단에 참여했던 여덟 분이 직접 서명을 받으러 돌아다녔다. 독산3동에서 활동하는 한 분은 어르신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하고 서명을 받았다.

조혜진 / (구의회 심의까지) 시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어떻게 주민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같이 고민했다. 반대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나. 통과되더라도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더 많은 주민이 같이 가야 하니까. 그래서 주민들에게 직접 서명을 받으러 나섰다. 이렇게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한 거 같다. 정책을 고민할 때 주민과 행정기관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쉽지 않다. 서로 한 걸음씩 다가가야 한다.

안시형 / 인권조례가 통과되는 본회의 당일까지도 반대 시위를 걱정했는데, 의외로 어렵지 않게 통과됐다. 보통은 조례를 입법 예고하면 민원 접수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부분 0건인데, 인권조례는 일단 의견이 들어온다는 자체가 이슈였다. 그러나 구의원들도 금천구 정책인데 다른 지역 사람들이 반대 민원을 제기하는 것을 의아해했고, 무엇보다 주민 인권 교육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이 좋다는 말이 구의원들 귀에도 들어가서,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는 의원들이 많았다.

조혜진 / 주민이 실질적으로 참여하니 성과가 난 것 같다. 주민이 의기투합하지 않으면 조례는 통과하기 힘들다. 금천구에서 인권조례 말고도 민주시민교육조례도 추진했는데 통과되지 못했다. 학교 교육에서 민주시민으로서 교육도 받고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데에 다들 공감하지만, 왜 인권조례는 통과되고 민주시민교육조례는 통과되지 못했을까. 주민 스스로 시간과 노력을 조금 더 들이는 교육 모임, 동아리 모임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졌다고 본다. 인권조례는 주민 한 명 한 명이 자발적으로 교육과 모임에 참여하며 자신의 공간을 더 내어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금천구 인권조례는 여타 기초 단체와 다르게 '축복' 속에 통과됐다. 조례를 위해 동분서주해 온 주민들은 구의회 본회의장에서 축하 피켓을 들고 환영했다. 사진 제공 금천구청

조혜진 / 나는 사실 교회 다니는데(웃음), 교회 소식지에 어떤 목사님이 인권조례 관련해서 쓴 글이 실렸다. 성경에 동성애 반대 메시지가 있지만, 현실에서 무 자르듯 "동성애는 죄다"고 정죄할 순 없으니 고민해야 한다는 칼럼이었다. 나는 인권조례를 찬성하지만 반대하는 사람도 의견을 낼 자유는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단순히 의사를 존중하겠다는 차원에서 받아들이면 안 되고, 그 주장 때문에 누군가의 인권이 침해받는지 생각해야 한다.

양슬기 / 나도 기독교인이다. 기독교에 보수 진보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보수 기독교에서 성경을 곡해하는 부분도 많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두고 목사님이 가지는 강한 권위로 말하면서 사회적으로 상처를 주는데, 그게 과연 기독교 가치에 적합한 것인지 고민해봐야 한다. 개인의 호오 때문에 누군가를 상처 줘서는 안 된다.

조례 제정, 오래 걸리더라도
주민 역량 강화가 우선
"인권조례 발의가 종교의자유 침해?
헌법의 기본권 실현하는 것"

금천구 인권 기본 조례를 제정하는 데는 안시형 인권전문관의 공이 컸다. 그는 국가인권위 부산사무소와 보건복지부 산하기관 인권센터 등에서 일하다 2017년 7월 금천구 인권전문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인권 전문가들 자문과 부서 공무원들 간 토론을 토대로, '주민 참여형' 인권조례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안 전문관은 "주민들 역량이 뛰어나 성과를 낸 것 같다. 오늘 인터뷰 내용에서도 정말 말씀을 잘해 주셔서 놀라웠다"고 말했다.

안시형 전문관은 "금천구청에 왔을 때는 충남 인권조례가 폐지되고 반동성애 단체들이 인권 정책을 흔들던 시기였다. 인권조례를 급속히 만들기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주민 인권 역량을 강화한 후에, 주민과 함께 추진한다면 인권조례에 힘이 실리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금천구 인권 기본 조례는 △5개년 기본 계획 수립 △인권위원회 구성 △인권센터 설립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주민들은 조례 제정 과정에서 정원 15명 이내인 인권위원회에 주민 위원을 8명 이내로까지 위촉할 수 있도록 초안을 짰다. 안시형 전문관은 주민과 함께 인권 기본 정책을 짜고, 인권위원회를 구성해 가동할 계획이라고 했다.

특히 기본 계획을 주민들이 직접 짜는 게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기초 단체들은 주로 4개년 혹은 5개년 단위로 기본 계획을 세우는데, 공무원들이 직접 계획을 수립하지 않는다. 행정 업무가 늘어나는 것이 부담이라, 대부분 수천만 원을 들여 인권 정책 기관에 연구 용역을 준다. 금천구는 실태 조사만 외부에 맡기고, 정책은 주민들과 직접 토의하며 세울 계획이다. 안시형 전문관은 "담당자 입장에서는 편한 방법이 아니지만(웃음), 주민 중심으로 토의하며 직접 정책 방향을 잡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금천구 특성에 맞는 인권 정책도 고민하고 있다. G밸리(가산디지털단지)를 중심으로 한 기업들의 인권 의식 향상과 독산동 일대 중국 동포들의 이주민 인권 등이다. 최근 유행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중국 동포 거주 지역이 혐오의 대상으로 꼽히기도 했다. 안시형 전문관은 "관내 이주민 거주지가 많기 때문에 이 부분 관련해서도 신경을 쓰려 한다. 주민들의 중국 동포 인식도 많이 개선되고 있다. 유성훈 구청장도 이번 사태와 관련해 전 직원에게 '중국 동포 혐오가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는 안내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인권조례 제정조차 어려운 시대에 주민과 함께 의미 있는 이정표를 세운 금천구. 안시형 전문관은 조례를 제정하려는 이들에게 현실적인 조언도 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반동성애 진영 때문에 냉가슴을 앓는 공무원들을 위해 한마디를 부탁했다.

"인권 업무는 지자체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다. 헌법의 기본권 실현 차원에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다. 공무원들이 행정부에서 인권조례를 발의하는 게 종교의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법제처에서 2012년부터 일관되게 판단해 오고 있다. 주민의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되, 정책적으로 반영할지는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인권 정책이, 소외되는 사람 없이 모든 주민을 위해야 한다는 것을 유념하면 좋겠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