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부터 전쟁 관련 소식이 들려왔다. 지구상에서 전쟁하고자 마음먹고 단시간 내에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나라는 손에 꼽을 것이다. 그중 한 곳, 초강대국을 자처하는 미국은 이러한 가능성을 다시금 우리에게 보여 줬다. 전 세계는 두 눈을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미국과 이란, 두 국가 중 어느 나라에 책임이 더 큰지 경중을 가리기 힘들 것이다. 1970년 중반부터 시작된 미국 중동 정책으로 발생한 나비효과를 설명하고, 오늘날까지 서로의 책임이 어느 정도 되는지 고민해 봐야 하기 때문이다. '핵 확산 금지 조약'(NPT) 발효 후 50년이 지난 2020년, 다시 갈등이 불거졌다.

발단은 트럼프 행정부가 오바마 행정부 때 맺은 '포괄적 공동 행동 계획'(JCPOA)을 탈퇴한 것이었다. 이란은 나름대로 명분을 얻었고, 미국은 군사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돼 서로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였다. 그러나 이는 특정 부류 몇몇을 위한 극히 이기적 발상에서 비롯됐다. 소수의 정치 놀음과 숫자 놀음은 많은 희생을 불러왔고, 민간인·시민에게 트라우마를 새겨 넣었다. 이번에 이란이 비핵화 합의를 사실상 탈퇴하면서 핵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는 또 하나의 변수를 안게 될 것이다.

전쟁은 긴장을 야기한다.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 사건이 이란의 오인으로 발생한 여객기 격추다. 뒤늦게 사과를 전했지만, 전쟁 때문에 생긴 긴장이 아니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실질적 피해는 죄 없는 민간인에게로 돌아간다. 일촉즉발 상황은 군인이나 군대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정치·경제·문화까지 위축되게 만든다. 이는 전쟁뿐 아니라 긴장 국면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매번 이러한 긴장 때문에 위축을 겪는 나라 중 하나이다. 성주 사드(THAAD) 배치로 중국과의 긴장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평창 동계 올림픽 이전을 곱씹어 보면, 북한과 미국 사이에 오간 발언 수위만 생각해 보더라도, 북한과의 긴장은 버튼만 안 눌렀을 뿐 이미 전쟁 스위치에 손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이 긴장을 통해 몇몇은 이득을 챙긴다. 그 이득은 인류나 우리 사회를 위해 별로 좋지 않다. 긴장은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스트레스는 안 좋은 방향으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우리는 대부분의 전쟁을 미디어를 통해 접한다. 하지만 전쟁 전후 과정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미디어는 게임을 보듯이 사건을 보도하거나 희생자, 피해 규모 등을 숫자로 명기하면서 비교한다. 적나라한 전쟁 모습은 보여 주지 않는다. 전쟁은 그 자체로 참혹하다. 전쟁하는 쪽이든 받아들이는 쪽이든 참상을 보는 순간, 전쟁 명분은 사라진다. 죽음과 희생뿐이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전쟁에 대해 객관적으로 다가서는 것 같지만, 이슈나 기삿거리로 소비할 뿐이다.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전쟁은 절대 무용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올해는 한국전쟁 70주년인데, 아직도 대한민국은 전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휴전 상태인 한반도는 이 긴장을 안고 살아간다. 반공 프레임은 지금도 유효하고, 한국 개신교는 이를 전가의 보도처럼 이용해 교인들을 현혹한다. 전쟁 트라우마가 종결되려면, 평화협정을 맺어야 할 텐데, 오늘날 상황을 봤을 때 평화로 가는 길이 험난하다.

고대 그리스 광장 정치에서 주된 흐름이 있었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굴복시키고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흐름은 오늘날에도 주류 이데올로기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스가 이오니아를 침공했을 때 이 논리가 크게 작용했다. 결국 이오니아를 점령했고, 그 뒤 펠로폰네소스전쟁이 발발해 그리스의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같은 논리로 패배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시국가를 이어 주는 전쟁 억제의 끈 델로스동맹이 끊어지면서 전쟁이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는 현재 미국과 이란의 관계에서 보듯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역사의 교훈은 이익 당사자들 앞에서 한낱 글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광장 민주주의가 주류 이데올로기에만 편중된 것은 아니다. 이오니아로 원정을 가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반문한다. 트라시마코스와의 유명한 입씨름이다. 정의正義라는 큰 테제 앞에서 트라시마코스가 주장한 "힘이 곧 정의다"라는 입장에 반문한 셈인데, 소크라테스는 특유의 산파술로 논쟁을 벌인다.

소크라테스는 과연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굴복시키는 것이 온당한가, 그것이 정의인가 질문을 던진다. 시정잡배들이 생각하는 '이득'에만 머물지 않는 생각이다. 또한 '정의'는 통치자를 위한 이익이 아니며 '좋음'과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현악기 예를 들면서, 조화·화음·조율을 통한 어우러짐을 말한다. 이것은 평화다. 오케스트라도 마찬가지고, 4부 합창이든 뭐든 서로 간에 약속·예의·규칙을 이루어 냈을 때, 음을 내면서 서로를 증명하고 타인에게 이로움을 준다.

평화가 곧 답이다. 전쟁은 서로를 부정하는 방식이기에 희생이 필요하다. 희생은 내부와 외부를 가리지 않는다. 지난한 중동 전쟁을 겪은 이란 시민들은 참상을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란의 여객기 격추 사건 이후 이란 아미르카비르대학 앞에서 벌어진 시위는, '힘이 정의다'라는 악다구니 사이에서 사막에 내리는 단비와 같은 평화의 소리다. 우리는 사회에서 반전反戰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외쳐야 하고, 외치는 자들을 응원해야 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전쟁을 생각하는가. 전쟁은 서로가 패배하는 길이다. 오늘날 전쟁은 핵전쟁 위험을 안고, 인류의 공멸을 부추기는 아주 질이 나쁜 전쟁이다. 우리는 핵전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야말로 공멸이다. 그런데 한국 수구 세력은 북한과의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간담이 서늘한 발언을 쏟아 놓고 있다. 전쟁 트라우마는 나비효과처럼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때때로 적폐로, 폭력으로 드러나 우리를 괴롭힌다. 서구가 일으킨 중동(이 단어는 서구 중심적이다)과의 갈등, 전쟁의 횡포는 나비효과로 돌아와 난민 문제로 유럽 사회를 괴롭히고 있다.

기독교 평화주의자는 역사에서 주류가 아니었다. 이들은 서로가 이기는 제3의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가장 간단한 방식인 정치적 수 싸움을 하지 않는다. 신앙으로 전쟁을 극복하려고 한다. 어떻게 보면 극단적일 수도 있다. 이들이 서로를 증명하는 방식, 절대 평화는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다.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우리가 기득권 편을 들면서 살고 있는 학자들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27절(공동번역)에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신다. 평화를 행하는 것은 예수님이 보증하신다. 기독교인은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의 선택지에 전쟁은 없다. 평화가 답이다.

남기평 / 한국기독청년협의회 총무. 에큐메니컬 청년운동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노동하는 기독 청년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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