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이 연출한 영화 '두 교황 Two Popes'은 내게 긴 여운을 남겼다. 두 명의 교황은 바티칸의 해방신학 비판자로 명성을 날리던 라칭거(Ratzinger) 추기경, 베네딕트 16세, 그리고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 과거 베르골리오(Bergoglio) 추기경을 지칭한다. 나는 두 교황이 택한 시성諡聖이 베네딕트와 프란치스코라는 점에서 그들이 바라보는 성직자로서의 삶의 지평을 상징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라칭거 추기경은 교황으로 선출되자 베네딕트라는 이름을 택했다. 베네딕트는 서구 기독교 역사에서 베네딕트수도회를 세운 성인의 후예를 상징한다. 베네딕트수도회는 6세기에 형성되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수도회로, 가톨릭교회의 장구한 역사와 더불어 왔다. 가톨릭 역사에서 6세기 말 교황이 된 베네딕트 1세 이후, 같은 이름을 선택한 이들은 모두 16명이다. 교황으로 선출된 이는 거의 한 세기에 한 명씩 베네딕트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베네딕트수도회는 "평화를 지키며 기도하고 일하는" 원칙을 지킨다. 베네딕트 수도사들은 정주定住 원칙을 지키며, 베네딕트가 만든 수도 생활 규범을 따라 평생 기도와 헌신의 삶을 살아간다. 베네딕트 16세는 길고 긴 교회의 전통과 가르침을 따르고 지켜 온 파수꾼 역할을 소중히 여기는 사역을 선택한 셈이다.

반면 '프란치스코'는 12세기 말 이탈리아 아시시 출생으로, 부유해진 수도원의 개혁을 주창하고 무소유 청빈 전통을 재확인하면서 개혁 운동의 요람이 된 프란치스코수도회를 세운 성인의 이름이다. 프란치스코는 당시 중세 교회와 수도회가 1000년 넘도록 신도들의 헌신과 봉헌을 받으며 축적된 부유함을 누리는 데 반해, 청빈한 삶과 가난한 자들의 이웃으로 머무는 수도사의 삶을 중시했다. 교회 전통과 교리보다 창조 중심 영성을 통해 뭇 생명의 소중한 가치를 받아들이는 신앙의 길을 제창해 권력 지향적 종교 흐름에서 가난과 벗하는 청빈의 영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을 '작은 형제'라고 불렀고, 복종과 무소유라는 정결한 삶의 원칙을 따랐다. 그래서 그런지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한 교황은 지금까지 없었다. 금번 프란치스코 교황이 처음이다. 다음에 이 이름을 선택하는 교황이 있다면, 그때는 프란치스코 2세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교황의 자리에서 내려온 베네딕트 16세와 이후 선출되는 프란치스코 교황. '두 교황' 스틸컷

이렇듯 이 영화는 신학적으로 사뭇 다른 전통에서 나온 두 명의 교회 지도자가 진솔한 대화를 통해 서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에게 알맞은 소명의 길을 선택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영화 대부분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이 대화의 깊이가 그들의 진솔함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깊은 곳을 보이고, 교회를 섬기는 길에서 일어나는 실패를 감추지 않는다. 또한 두 사람은 대화를 통해 교회를 바르게 섬겨 나갈 가능성을 참된 영성의 관점에서 긍정하고 있다.

성직을 수행한다는 것은 끝없이 성직자 내면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영성의 힘을 요구한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측면에서 영성의 고갈을 느끼고 있었다. 한 사람은 교회를 지키느라 영성이 고갈되어 교황직을 수행할 힘이 결여된 자신에게서 메마른 영성을 느낀다. 다른 한 사람은 형식을 지키는 교회 때문에 고갈을 느껴 추기경직을 사임하고 평범한 사제로 돌아가기 원한다. 한 사람은 교회의 고귀한 직무를 맡았으나 그것을 풍요롭게 채우지 못하는 데서 무거운 책임을 느끼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진실로 다가가지 못하게 만드는 교회에서 누리는 직무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고해성사하듯 고백한다. 한 사람은 "나는 더 이상 교회의 영업 사원으로 살 수 없다"고 고백하고, 한 사람은 "나는 삶의 아름다움을 누릴 줄 모르는 죄를 지었다"고 고백한다. 진실한 만남을 통해 베네딕트 교황은 베르골리오 추기경에게서 활기 있게 교회를 이끌어 나갈 새로운 힘과 가능성을 본다. 생명력 넘치는 관계성이 결여된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영성의 결핍이 결국 교회 권위에 생명력이 없기에 미련을 두지 않고 추기경직을 사임하겠다는 베르골리오 추기경의 결단을 낳았다고 느낀 것이다. 그는 추기경직을 사임하겠다는 베르골리오 추기경에게서 교회를 이끌어 나갈 활력을 보고, 신학적으로는 자신과 전혀 다른 전통 아래 있지만, 교황직을 넘겨주겠다고 작정한다.

교회와 교리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고독한 내면의 사제와 살아 있는 평범한 이들과 교제를 나누는 사제. 홀로 식사하는 사제와 탱고를 추는 사제. 두 사람 중 교회를 이끌어 갈 영성적 능력을 갖춘 사람은 누구였을까. 나는 그 답을 베네딕트 교황의 진심 어린 고해성사에서 얻는다. 삶의 모든 에너지가 소비된, 여든 살 넘은 교황이 어릴 적부터 하나님이 주신 삶의 아름다움을 즐기지 못한 죄를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삶이 선물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공부하는 일에만 몰두하여 교회와 교리를 위해 살아온 자신. 그런 자신은 생명력 넘치는 교회를 이끌어 가기에는 역부족이며, 그와 더불어 귀하고 천한 것의 경계 없이 삶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사목해 온 이가 교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두 교황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것이다. 교회주의자는 베네딕트 교황을, 교회가 민중을 위해 존재하길 바라는 자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지지할 것이다. 하지만 베르골리오 추기경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 적도 있다. 누군가는 그가 좋은 추기경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이는 그를 좋은 사제라고 인정하거나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진실한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없다. 진실한 사람이라면 진실을 지키기 위해 간혹 욕심 많은 이, 진실하지 못한 이와 어쩔 수 없이 다투기도 해야 한다.

나는 이 영화의 핵심 주제가 두 교황에 대한 전기적 기록이 아니라, '누가 교회의 진정한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가'를 말하려는 데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그 방향은 귀하고 천한 것을 가리지 않고 생명의 소중함과 삶의 아름다움을 사랑할 줄 아는 이가 교회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들을 만들어 교회를 위해 살게 하는 사역이 아니라, 진정으로 생명을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사역을 추구하는 게 더 진실한 것이라는 관점이다.

이 영화는 가톨릭교회 역사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은 일, 교황이 스스로 교황 직위에서 물러난 사건의 깊은 이유를 이렇게 넌지시 밝히고 있는 셈이다. 교인을 앞세우며 교인을 모아 교회를 위해 존재하게 만드는, 종교를 영업하는 이, 큰 교회 목사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성공한 목회 운운하며 자만하여 우쭐대는 이는 베네딕트 교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성찰하며 허세를 부리지 않는 길을 택하는 베네딕트 교황과 자기 포기의 길을 찾다가 오히려 무거운 중책을 짊어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에서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교단마다 돈 선거와 상대를 향한 법정 소송까지 동원하며 감투싸움에 열심인 개신교 지도자들에게 신앙 양심과 소명에 대한 정직한 고민이 과연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아니, 종교 지도자로서 교회 전통에 대한 깊은 신학적 이해나 교회의 최고 성직자로서의 품위라도 가지고 그 자리에 오르려 하는 것일까…. 내심 묻고 싶어졌다. 어쩌면 이런 물음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교회 현실이 매우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충구 / 감리교신학대학교 은퇴교수. <인간의 마지막 권리>(동녘), <종교의 두 얼굴>(홍성사) 등을 썼다.

※ 위 내용은 2020년 1월 2일 박충구 교수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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