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가 '사건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신앙고백과 응답을 신학적 접근과 표현으로 정리합니다. 매달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칼럼을 게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신학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제는 '성탄, 성찰 2019'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예수의 탄생은 비천하고 어린 소녀의 고백에서 시작된다. 천사 가브리엘은 소녀에게 은혜 입은 자라 칭하며 주의 말씀을 전했고, 친척이자 산모 동기인 엘리사벳은 믿음 있는 그대야말로 복된 여인이라 화답했다. 복중에 노는 아이를 쓰다듬으며 소녀는 비천하고 주린 자들을 돌보시고 권세 있고 부한 자를 거꾸러뜨리는 자비와 정의의 하나님을 찬양했다. 붉은 볼의 앳된 엄마는 몸 풀 곳조차 없는 마구간에서 그렇게 첫아들을 낳았다.

소녀의 당찬 결단은 역사의 흐름을 바꿨다. '파혼, 미혼모, 가문에서의 추방'이라는 위기를 무릅쓰고 하나님의 무모한 제안을 수락한 결과, 그녀는 세상에 길이 남는 믿음의 어머니이자 성녀가 되었다. 해마다 교회는 별빛 아래 잠든 아기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는 어린 부부의 이야기를 전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이자 영광과 평화의 서막임을 선포한다. 그러나 그것은 갈등과 고통의 시작이었다.

뒤늦게 귀한 아들을 본 엘리사벳과 벌거숭이인 채로 아들을 안은 마리아. 두 여인은 앞날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노래했으나, 끝내 자신보다 먼저 간 아들을 지켜보아야 했다. 부패한 유대 민족에게 회개와 세례 운동을 촉구했던 요한은 헤롯 정권을 비판하다 참수형을 당했고, 자기 민족에게 배척받으며 율법의 본질 회복과 민족 갱신 운동을 벌였던 예수는 십자가형을 당했다. 성서는 자식의 찢긴 몸을 받아 든 여인을 은혜 입은 자, 복 있는 자,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자라고 전했다. 하나님은 권세 있고 부한 자가 아니라 생때같은 그녀의 아들들을 거꾸러뜨렸다.

일 년 전 12월, 김미숙 씨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경찰서에서 온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간 그녀는 태안화력발전소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몸이 찢겨 나간 아들을 안아야 했다. 사고 두 달 전 아들은 비정규직 공동 투쟁 신청을 하며 해맑게 웃었다. 돌이킬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녀는 짐승처럼 악을 쓰며 울었다. 그렇게 일 년,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살던 집도, 하던 일도, 만나는 이도, 쓰던 말도, 그리고 세상에 대한 믿음도. ('김용균들'을 위하여, <시사IN>)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자가 되어 법정에서, 광화문광장에서 수많은 김용균과 김미숙을 만났다.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는 고 김용균의 사망 사고는 "발전소 쪽이 안전 조치를 하지 않은 상황에서 위험업무를 노동자에게 전가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위험의 외주화와 원·하청 간 책임 회피가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사고 책임자 11명이 검찰에 넘겨졌으나 이들에게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혐의는 적용되지 않았고, 원청 책임자인 한국서부발전과 한국발전기술의 대표이사 7명은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되면서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 없음으로 판결이 났다. 최근 '김용균법'으로 불리는 산업 안전 보건법 개정안이 28년 만에 마련됐다. 그러나 온갖 예외 조항을 포함시키고 발전소나 조선업 같은 위험업무를 승인 대상에서 제외하면서 원청 기업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주었다. 말단 관리자들만 처벌받는 꼬리 자르기식 행정은 그대로였다.

2016∼2018년 산업재해로 사망한 하청 노동자는 총 1011명. 해마다 300명이 넘는 산재 사망자가 지속되는 가운데 원청 책임자를 처벌한 사례는 전무했고, 산업 안전법 위반에 대한 과태료는 2000~3000만 원 선에서 마무리됐다. 반면 2013년 영국의 한 슈퍼마켓에서 발생한 하청 직원의 사망 사고에 대한 손해배상액은 37억 5000만 원, 미국 내 현대기아차의 하청 노동자 사망에 대한 손해배상액은 30억 원이 부과되었다. 자본주의 체제가 돌아가는 세계 어느 곳이든 위험의 외주화와 산재 사고라는 구조의 문제는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불평등하고 비윤리적인 사망 사고는 원청 기업에 대한 책임 강화와 징벌 손해배상 제도의 도입 이후 절반 이하로 감소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산재 사망이 '기업에 의한 살인 행위'라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최소한의 강력한 규제와 정규직 전환, 안전시설 확충으로 노동자의 목숨, 한 사람의 가치를 지켜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컨베이어 벨트, 철도 레일, 크레인 아래와 철판 용접 현장에서, 동료들이 사라진 바로 그곳에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목숨 걸고 일하고 있다. 발전소, 조선소, 건설업, 철도청, 각종 화학 공장 등 보이지 않는 곳에 투입된 수많은 사람은 한 가족의 가장이자 한 어머니의 아들이며, 누군가의 아내이자 귀한 딸이다. 기업의 이윤 앞에서 무참히 밟히고 버려지는 잉여적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존엄성을 가진 존재이자 살아 있는 자체로 가치 있는 사람들이다.

성서는 예수의 생을 세상에서 가장 비루하고 연약한 이의 탄생으로, 그의 죽음은 철저하게 실패한 무력한 이의 삶으로 묘사한다. 그의 곁에는 그보다도 더욱 무력한 여인이 당찬 결단만큼이나 비통한 가슴을 안고 서 있었다. 그러나 성서는 무력한 이들의 탄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자비와 평화를 노래한다. 새로운 세상은 그저 기다리거나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없고 무력한 고난의 한복판에서 삶으로 살아 냄으로 도래한다고, 세상의 모든 고통과 실패를 딛고 하나님이 함께함을 믿는 자리에 임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찢긴 아들을 품에 안았던 마리아가 부활을 목도할 수 있었던 힘인 것이다.

송진순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 사건과신학팀, 이화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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